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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여성시인 김호연재 "취해 보니 천지가 넓다"

서울 중랑문화원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망우리를 가다'의 한 장면. 탤런트 백일섭씨가 진행해 친근감을 더했다.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 중랑문화원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망우리를 가다'의 한 장면. 탤런트 백일섭씨가 진행해 친근감을 더했다.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1. 으스스한 공동묘지로 여겨졌던 망우역사문화공원. 이 곳에 ‘잊을 망(忘)’과 ‘근심 우(憂)’의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조선 태조 이성계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끝난 후,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의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게 된다. 실의에 빠진 태조를 위로하고자 무학대사는 태조에게 묻힐 능터를 찾아가자고 제안한다. 태조가 이 곳 고개에 올라 건원릉(현 경기 구리시 인창동) 터를 결정하고 바라보며 “이제야 내가 근심을 잊는구나”라고 이야기한 게 ‘망우’란 이름으로 남았다. 1933년부터 1973년 폐장 때까지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용됐던 이 곳에는 현재 7000여 기의 무덤이 있다. 개화기와 일제시대, 해방과 한국전쟁 등 급변했던 근대사를 거치며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그 중에는 한용운ㆍ오세창ㆍ서동일 등 독립운동가와 박인환ㆍ방정환ㆍ이중섭ㆍ강소천 등 문화예술인들도 상당수다.  
 
대전 대덕문화원에서 제작한 그림책 『당당한 그녀, 김호연재』.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대전 대덕문화원에서 제작한 그림책 『당당한 그녀, 김호연재』.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2.김호연재(1681~1722)는 200여 편의 한시를 남긴 여성 문인이다. 조선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의 후손으로 태어나 1699년 송요화와 혼례를 치른 뒤 대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삶은 ‘호연재’라는 호에서도 느껴지듯 호방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가 술을 마신 뒤 쓴 한시 ‘취작(醉作)’만 봐도 그의 의연하고 당당한 정신세계가 읽힌다. 시의 뜻을 풀어보면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마음을 여니 만사가 편안하구나/고요히 자리에 누웠으니/잠시 인간사 잊음을 즐기노라’다. 성격도 대범했다. 진잠(현 대전 유성구)에 사는 시숙부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일이다. 병이 옮을까 다들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그는 “염병에 걸려 돌아가셨으니 그 누가 들어가서 상을 치르겠나”며 직접 나섰다. 수의를 지어 장례를 치렀고, 미음을 끓여 남은 가족을 돌봤다.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대전 송촌의 ‘소대헌ㆍ호연재 고택’이 바로 그가 살았던 집이다.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얽힌 사연과 조선 중기 여성문인 김호연재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와 그림책으로 만들어졌다.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지난해 3월부터 진행한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의 성과다. 전국 231개 지방문화원을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설화ㆍ인물ㆍ역사 등에 얽힌 향토문화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활용 가능한 콘텐트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이달말까지 마무리되는 이 사업으로 망우역사문화공원과 김호연재를 비롯한 총 185개 ‘원천콘텐츠’가 발굴ㆍ개발됐다. 한국문화원연합회는 다음달부터 이들 콘텐트를 인터넷 홈페이지(www.kccf.or.kr)를 통해 공개할 계획이다. 그림책 『당당한 그녀, 김호연재』를 제작한 대전 대덕문화원 김인숙 사무국장은  “신사임당ㆍ허난설헌에 버금가게 문학성이 뛰어난 김호연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전북 고창문화원에서 제작한 뮤지컬 '진채선'. 전체 공연을 담은 영상도 제작했다.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 고창문화원에서 제작한 뮤지컬 '진채선'. 전체 공연을 담은 영상도 제작했다.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발굴된  ‘원천콘텐츠’는 다양한 문화 콘텐트로 다시 태어났다. 부산 사상문화원은 대표적인 지역 향토음식 재첩국을 소재로 1970∼80년대 재첩 채취ㆍ유통ㆍ판매 등에 종사했던 ‘재첩아지매’들의 인터뷰를 구술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당극 ‘재첩 사이소’의 희곡 대본을 완성했다. 대구 북구문화원은 염불 타령ㆍ담바구 타령ㆍ오흥혜야 타령 등 사라져가는 토속 민요 17곡을 채보해 편곡하고, 국악기와 함께 녹음한 디지털 음반으로 제작했다. 충남 서천문화원은 최초 성경 전래지인 서천군 서면 마량리 마량포구의 상징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성경이 전래된 과정을 무용극 ‘신비한 책’으로 만들어 지난 연말 논산ㆍ홍성 등에서 순회 공연을 펼쳤다. 서울 성북문화원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삶을 재조명한 창작뮤지컬 ‘아나키스트의 아내’를 제작했다. 이 여사는 해방 후 정릉에 거주하며 성북구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애니메이션 ‘속리산 도깨비 솔비깨비’(충북 보은문화원), 만화책 『피리 부는 정승 맹사성』(충남 온양문화원)와 『석주성을 지켜라』(전남 구례문화원), 뮤지컬 '진채선'(전북 고창문화원) 등도 각 지역의 향토문화콘텐트를 가공한 성과물이다.  
충남 온양문화원에서 만든 만화책 『피리 부는 정승 맹사성』.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충남 온양문화원에서 만든 만화책 『피리 부는 정승 맹사성』. [사진 한국문화원연합회]

 ‘원 소스 멀티 유스’ 의 사례도 여럿이다. 경남 고성문화원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도왔던  ‘기생 월이’의 전설을 다큐멘터리(‘조선의 의기 월이의 길’)와 동화책(『고성 무기정(舞妓亭)의 비밀, 월이를 만나다』)으로 제작했고,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성 둘레길 자료집 『월이와 떠나는 도란도란 고성여행』도 펴냈다. 부산 낙동문화원은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줬던 구포국수에 얽힌 이야기를  ‘구포국수 탄생의 비밀’이란 이름의 애니메이션과 웹툰으로 만들었다.  
독특한 생활양식도 흥미로운 ‘원천콘텐츠’가 됐다. 제주특별자치도문화원연합회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1970년대 제주지역 혼례문화를 60분 분량의 재현 영상으로 만들었다. 제주도에서는 혼례를 ‘가문잔치’라고 부른다. 친지들이 신랑ㆍ신부의 집에 모여 사흘 동안 잔치를 치르기 때문이다. 결혼식 이틀 전 ‘돗(돼지)’을 직접 잡고, 산에서 베어온 소나무ㆍ대나무 가지를 다듬어 신랑ㆍ신부 집 대문 앞에 ‘솔문’을 세우는 것도 제주지역의 특징이다. 제주문화원 백종진 사무국장은 “1975년 선흘리에서 결혼한 안시택씨 부부의 고증을 토대로 ‘돗 잡는 날’을 비롯한 혼례의 전 과정을 마을 주민과 극단 배우들이 재현해 영상에 담았다. 선흘리를 ‘가문잔치 마을’로 개발하는 등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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