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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호의 이나불] 드라마 막장 소재된 낙태, 여성은 사라졌다

MBC '이별이 떠났다'.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정효(조보영 분)에게 영희(채시라 분)는 당연하다는 듯 "언제 지울거냐. 병원을 알아봐줘야 하느냐"고 묻는다. 정효의 의견은 듣지도 않는다. [사진 MBC]

MBC '이별이 떠났다'.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정효(조보영 분)에게 영희(채시라 분)는 당연하다는 듯 "언제 지울거냐. 병원을 알아봐줘야 하느냐"고 묻는다. 정효의 의견은 듣지도 않는다. [사진 MBC]

 
낙태는 오래된 '뜨거운 감자'다. 지난달 24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공개변론을 계기로 다시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통상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는 헌법재판소마저도 2012년 이미 낙태죄에 대한 의견이 반반(합헌 4대 위헌 4, 6명 이상 동의 시 위헌)으로 팽팽히 갈렸다. 당시 낙태죄가 위헌이란 의견에는 “(낙태죄는) 이미 완전한 인격체로서 스스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임부의 자기결정권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아 양자 간 법익의 균형성을 도모하고 있지 않다”는 보충 의견이 있었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현실을 담는 대중문화, 특히 ‘드라마’ 속에서 낙태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최근 낙태가 언급된 드라마부터 살펴봤다. 지난달 26일 방송된 MBC 주말극 ‘이별이 떠났다’. 극 중 철부지 대학생인 민수(이준영 분)는 임신 뒤 잠적한 여자친구 정효(조보아 분)를 떠올리며 혼잣말로 말한다. “결국 지울 거 깔끔하게 지우고 끝내자고! 알량한 니 자존심 세워봤자 니 몸만 더 아프다고. 지 생각해서 빨리 지워주려는 배려는 모르고, 아씨 짜증나게.”
 
드라마에서 일상적으로 다뤄지는 낙태
그 시각 정효는 “대화가 통할 것 같다”는 이유로 민수의 엄마 영희(채시라 분)를 찾아간 상태였다. 정효는 영희에게도 핍박을 받는다. “언제 지울 거야? 병원은 알아봤어? 아니면 내가 알아봐 줘?” ‘지운다’는 결론 앞에 임부인 정효의 의견이나 상황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이별이 떠났다' 외에도 올해만 KBS2 ‘황금빛 내 인생’, JTBC ‘미스티’, SBS ‘해피시스터즈’, MBC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 등 여러 드라마에서 낙태가 등장했다. 드라마 속에서 낙태는 이처럼 일상적이다. 이는 현실과 닮았다. 법에서 정하는 특별한 사유 없이는 불법임에도, 한 해 최대 50만 건씩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팽배한 현실 말이다.
 
KBS2 '황금빛 내 인생'. 낙태를 위해 병원을 찾은 아내에게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서지태. [사진 KBS]

KBS2 '황금빛 내 인생'. 낙태를 위해 병원을 찾은 아내에게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서지태. [사진 KBS]

 
하지만 이 많은 드라마에서 낙태를 그리는 방법은 너무도 천편일률적이다. 그저 갈등 전개를 위한 극적 장치로 작용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여성의 의견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고 배제되기 일쑤다. 지난 3월 종영한 KBS2 ‘황금빛 내 인생’. 병원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남편은 낙태하려는 아내에게 “낙태할 경우 신고하겠다”며 협박한다. 그리고는 강제로 택시에 태워버린다.
 
지난해 방송된 KBS2 ‘이름없는 여자’에서는 대기업 회장의 부인인 홍지원(배종옥 분)이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골수가 맞는 손여리(오지은 분)를 양녀로 입양한다. 이후 여리가 임신하자 지원은 “네가 건강해야 아들을 살릴 수 있다”며 여리를 감금한 채 낙태를 강요한다. 이렇다 보니 극 중에서 실제 낙태가 실행된 경우에도 합의된 낙태는 없다. 남자친구 어머니의 손에 끌려 낙태를 당하다시피 하거나(JTBC ‘선암여고 탐정단’), 심한 경우 납치돼 강제 낙태를 당한다(SBS ‘해피시스터즈’).
 
선택권 잃는 여성…아이 낳거나 '악녀' 되거나
이러한 재현 속에서 임부의 자기운명결정권 등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낙태를 들여다보는 과정은 지워진다. 여성의 상황과 입장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며, '남성'이나 '남성의 가족'을 위해 낙태가 이뤄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남성'이나 '남성의 가족'을 위해 아이를 낳게 된다. 이때, 여성이 제 뜻을 굽히지 않고 낙태를 감행하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여성은 그저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기적 존재나 '틀린 여성'으로 그려진다(JTBC ‘미스티’, SBS ‘나도 엄마야’). 아이를 끝까지 낳는 여성은 대부분 해피엔딩을 맞으며 '옳은 여성'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과는 반대다. 자연스럽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낙태는 무조건 나쁜 것'이란 이분법적 사고가 굳어진다.
 
물론 드라마가 사회적 논의를 다 담을 필요도 없고 담을 수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고민'은 필요하다. 현실에선 실제 생산적 논의를 통해 낙태에 대한 담론이 확장되고 있는데, 대중문화는 그저 갈등을 일으키기 위해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같이 쉽게 낙태를 끌어오고 있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과정에서 여성을 지운다.
 
SBS '나도 엄마야'. 남편 몰래 아이를 지운 여민경(송유안 분). 민경은 드라마에서 자신의 성공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사진 SBS]

SBS '나도 엄마야'. 남편 몰래 아이를 지운 여민경(송유안 분). 민경은 드라마에서 자신의 성공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사진 SBS]

 
지난 3월 논문 ‘대중문화 속 낙태 재현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 교수(영화평론가)는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낙태는 그저 소재로 전락할 뿐 '담론'을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외국의 경우 낙태 문제를 핵심 주제로 끌고 와 화두를 던지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낙태는 지금 논의가 진행되듯 미혼모의 현실 등 사회 구조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측면도 분명 있다. 그런데 드라마는 낙태를 그저 '개인적인 일'로 만들어버린다”고 덧붙였다.
 
현실의 재현이라며 현재로서는 불법인 '낙태'를 안방까지 아주 일상적으로 끌고 온다. 그러면서도 '출세' 욕심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해야 하는 여성의 현실은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외눈박이'가 된 드라마 속 낙태, 이렇게만 다뤄도 정말 괜찮을까. 낙태가 다시 화두가 된 지금,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노진호의 이나불] 시리즈
※[노진호의 이나불]은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메일, 댓글, 중앙일보 ‘노진호’ 기자페이지로 의견 주시면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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