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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시각각] 예언과 희망 사이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단테는 『신곡』 ‘지옥편’에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아홉 단계의 지옥을 여행한다. 그중 제8옥이 ‘말레 볼제’다. ‘악의 구렁텅이’란 뜻이다. 커다란 구렁텅이가 모두 열 개다. 그 속에서 온갖 종류의 죄 지은 영혼들이 온갖 종류의 형벌을 받고 있다. 네 번째 구렁텅이를 지날 때, 단테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탄식을 쏟고 눈물을 흘리며 줄지어 걷는 무리들이 있다. 그런데 모두 얼굴이 등 쪽으로 돌아가 있다. 마치 뒷걸음질 치듯 걷는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등과 엉덩이를 적시고 있다. 단테가 이유를 묻자 베르길리우스가 답한다. “저들은 스스로 예언자라 자칭하며 미래를 내다보려 했지. 그 벌로 뒤만 볼 수밖에 없게 됐고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는 것이라네.”
 
요즘 북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이 얘기를 떠올렸다. 북핵과 한반도, 남·북·미 관계의 미래를 점지하는 수많은 예언이 넘실대고 있는 까닭이다. 신탁은 같은데 해석은 저마다 다르다. 대화와 긴장 사이에서 엎어지고 뒤집히는 극적 반전을 거듭하면서 예언자 대열이 길어지고 격차도 더 커졌다.
 
크게 나누면 두 가지다.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할 것이며, 국제사회로 걸어 나올 것이다.’ ‘김정은은 결코 핵 야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끝내 국제사회를 배신할 것이다.’ 분석과 전망은 정당한 일이다. 하지만 냉철할 때까지만 그렇다. 거기에 ‘희망 사고(wishful thinking)’가 섞이면 그저 ‘희망사항’이 된다. 거기서 그치면 문제가 없다. 그저 ‘희망 고문’이 될 뿐이다. 하지만 ‘예언’이 되는 순간 위험해진다. 특히 지금처럼 진영 논리 속에서 서로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상황에선 치명적일 수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리라 믿는 안보 전문가는 거의 없다. 국내외도 마찬가지다. 4반세기 동안 핵에 올인했는데 완성 단계에서 포기하겠냐는 합리적 의심이다. 비핵화 약속 역시 모호하다.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는 입에 담은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약속을 그대로 믿는 건 ‘희망 사고’일 수 있다. 그런 예언을 좇아 어정쩡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 정도로 제재를 푸는 것은 평화공존이 아니라 핵 우환을 짊어지고 사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의심과 비판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전과자를 색안경 끼고 보는 것과 같다. 북한이 마르고 닳도록 비대칭 대량살상무기 하나에 정권의 명운을 걸 것이라는 믿음 역시 ‘희망 사고’일 수 있다. 정상국가로 나아가겠다는 북한 젊은 지도자의 의지를 믿어줄 필요가 있다. 당장은 미약하더라도 우선 국제사회로 이끌어 내야 그 의지를 더욱 굳게 만들 수 있다. 멀리 나와서 돌아가기보다는 계속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게끔 해야 한다.
 
“양다리 걸치냐” 한다면 다리가 찢어져도 양쪽을 딛고 서겠다. 박쥐라 부른다면 기꺼이 박쥐가 될 테다. 그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희망을 가지고 협상을 응원하되, 완전한 비핵화는 양보하지 않은 것 말이다. 어쨌거나 정부가 나섰다. 평화는 진영이 아니라 민족의 소망이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양 진영 사이에 있다. 양쪽을 잘 살펴서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쪽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약속 대신 현재의 분열만 초래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목이 돌아가는 걸로 그치지 않는다. 말레 볼제의 아홉 번째 구렁텅이가 준비돼 있다. 목이나 팔다리가 잘리거나, 턱밑에서 배꼽까지 배가 찢기는 형벌을 받는 곳이다. 분열의 씨앗을 뿌린 죄가 그만큼 큰 것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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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