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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사] #14. 안녕, 내 이름은 나무. 모기 사냥꾼이지.

기자와 집사 투잡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컨디션 난조로 몸이 유독 무거운 날엔 퇴근 후 만사 제치고 쓰러져 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10시간 넘게 혼자서 집을 지킨 나무가 섭섭하지 않게 말도 걸어줘야 하고, 사냥 욕구를 채워주는 낚싯대 놀이도 해야 한다. 화장실 청소도 하고 간식도 챙겨준다. 그렇게 하루 치 할 일을 다 마치면 진짜로 녹초가 돼서 거실 맨바닥에 드러눕곤 한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다. 괜히 아무 말이나 해본다.
“나무야, 물 좀 떠다 줘.”
이제 한국말을 알아들을 때도 됐는데, 나무는 내 부탁을 한 번도 들어주지 않는다.
“누나한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저 누워있는 나를 제 머리로 툭툭 건드리며 더 놀자고 보채기만 한다.
 
깃털 낚싯대 앞에 선 나무. "자, 어서 이걸 집어들고 휘둘러줘." 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다.

깃털 낚싯대 앞에 선 나무. "자, 어서 이걸 집어들고 휘둘러줘." 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다.

나무는 이 집에서 하는 일이 없다. 개는 집을 지키고 소는 밭을 갈면서 인간과 함께 살게 되었다. 개나 소만큼 인간에게 협조적인 동물은 아니었지만, 과거엔 고양이도 쥐를 잡으며 인간 곁에 머물렀다. 우리 집엔 쥐가 없다. 내가 진짜 집사면 월급이라도 받겠는데 나무는 나에게 한 푼도 주지 않는다. 순전히 열정페이다. 착취도 이런 착취가 없다.
 
“그 고생을 하고 키워서 뭐에 쓰니? 주인도 못 알아본다며.”
가끔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발끈해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나무는 정말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은 효용이 있어서 키우는 게 아니거든요!’ ‘고양이는 귀여움으로 할 일을 다 한 거거든요!’ ‘주인 알아보거든요!(부를 때 안 와서 그렇지)’ 내세울 ‘쓸모’가 없으니 맘 속으로만 반박할 뿐이었다.
 
귀여움 하나로 호의호식하는 나무를 보면서 다음 생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귀여움 하나로 호의호식하는 나무를 보면서 다음 생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나무의 ‘쓸모’를 발견했다. 나무와 처음으로 함께 맞이한 여름이었다. 우리 집은 모기가 유난히 많아서 매일 밤 헌혈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잠결에 마주치는 모기는 마치 스텔스 전투기와 같다. 귀 바로 옆에서 윙윙거리다 불만 켜면 눈앞에서 사라졌다. 도통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잡지도 못하고 잠도 못 들고 미칠 지경이었다.
 
뒤척이는 내 옆에 가만히 누워있던 나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는 벽 위쪽을 올려다보며 자세를 낮추고 사냥감을 관찰하는 포즈를 취했다. 아니, 이건 설마…? 나는 기척을 최소한으로 하고 이불 속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불을 켰다. 밝아진 방 안, 나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나의 피(나무 피는 아니길 바란다)를 빨아먹고 배가 불룩해진 모기 한 마리가 앉아서 쉬고 있었다.
 
퍽! 머리맡에 놓인 책을 들고 모기가 앉은 벽을 힘차게 가격했다. 모기는 새빨간 피를 뿜어내며 명을 달리했다. 흠칫 놀란 나무가 ‘내 장난감을 왜 죽여…?’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 나를 봤다. 나는 전우애를 느꼈다. 이 바보야, 너와 내가 우리의 밤을 좀먹는 유령을 함께 잡았다고! 나는 나무를 끌어안고 마구 뽀뽀를 하며 칭찬을 폭풍처럼 늘어놓았다. “오구, 우리 나무가 모기를 잡았어요(사실 안 잡음)! 나무가 이제 밥값을 해요! 오구오구, 이뻐 죽겠어!” 그날 밤, 나무는 모기보다 내가 더 잠을 방해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누나가 기껏 낚싯대를 흔들어 줘도 누워서 팔만 뻗을 때가 많다. 움직이는 모기나 파리가 나무의 운동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

누나가 기껏 낚싯대를 흔들어 줘도 누워서 팔만 뻗을 때가 많다. 움직이는 모기나 파리가 나무의 운동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나무의 사소한 움직임도 흘려보내지 않는다. 나무가 갑자기 뜬금없는 장소에 집중하며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거기엔 틀림없이 뭔가 있다. 모기든 거미든 날파리든, 나무보다 다리 개수가 많은 무언가가. 나무의 탁월한 ‘벌레 감지 능력’은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에게 심적 안정을 준다. 나무가 가만히 있으면 내 주변에 벌레가 없다는 뜻이 되니까. 이 얼마나 대단한 쓸모인가!
 
“그게 뭐야”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하루 24시간 귀여움을 뿜어내느라 바쁜 나무가 벌레까지 찾아주니 집사는 황송하다. 어느 날 벌레 잡는 일을 멈춘다고 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 숨만 쉬어도 예쁘고 받는 것 없이 고마운 존재가 인생에 하나쯤 있는 게 나쁠 건 없지 않나.
 
글·그림=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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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