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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년의 숫자로 읽는 경제]부채 같은 자본 '영구채'의 뒤끝

두산인프라코어 굴착기. [사진: 차이나랩]

두산인프라코어 굴착기. [사진: 차이나랩]

기업이 만기 정하는 '영구채'…두산의 '경영 패러다임 전환' 선언 
때는 2012년 10월이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금융 부문에서 조선·해운·중공업 등 기간산업으로 한창 파고들 무렵입니다. 굴삭기·지게차 등 중장비를 만드는 두산인프라코어는 국내 제조업체론 처음으로 영구채권(Perpetual Bond)을 발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두산인프라코어는 미국의 '알짜' 중장비 제조사 '밥캣'을 인수하느라 큰 빚을 지게 됐고, 이를 갚기 위해 영구채를 발행해 자금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 채권은 일정한 만기가 없습니다. 기업이 돈 갚을 날짜를 '영원히' 마음대로 연장할 수 있는 특징 때문에 '영구채'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자본이냐 부채냐…촉발된 '영구채 성격 논쟁' 
영구채는 채권시장의 '돌연변이'였습니다. 당시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이 채권을 발행하면서 "저성장 대응을 위한 경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치켜세웠지요.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물론 채권시장의 일부 신용 분석가들은 이 채권의 성격을 놓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기업이 만기를 정할 수 있다지만, 자기 돈이 아닌 빌린 돈을 회계장부에 '자본'으로 기록하는 게 과연 옳으냐는 것이었습니다. 기업은 '내 돈'인 자본과 '남의 돈'인 부채를 끌어와 사업을 하게 되는 데, 투자자로부터 빌린 돈을 '내 돈'으로 기록하는 게 정책당국 입장에선 탐탁잖았던 것입니다. 두산 입장에서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구채 발행 전 금융감독원·회계기준원 등에 자문해 '자본'이란 해석을 얻어 이 채권을 발행한 상황에서 금융위가 계속 문제를 제기하면 자금조달에 '빨간불'이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회계 현안의 '국내 심판' 회계기준원 의뢰로 '국제 심판' 격인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국제회계기준위원회 산하 해석위원회는 이듬해인 2013년 5월 영구채를 '자본'으로 결정했습니다. 채권 시장에선 그 유명한 '영구채 성격 논쟁'입니다.
 
IASB, '영구채=자본' 결정하며 국내 기업 본격 활용 
국제회계기준위원회의 교통정리 이후 국내 기업들은 우후죽순 영구채를 발행했습니다. 현대상선·한진해운·대한항공·현대중공업 등 중후장대 산업에 속한 기업들이 주로 영구채를 현금 유동성 위기 탈출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회계 전문가 사이에선 '영구채 발 제2의 금융위기'를 걱정하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영구채는 기업이 만기를 무한정 연장할 순 있지만, 만기 연장을 결정하면 투자자에게 줘야 할 이자가 '불쑥' 늘어나게 됩니다. 기업에 따라 치솟는 이자율이 연 10%를 넘어가는 곳도 수두룩했습니다. 지난달 29일 금감원 조사 결과, 국내 기업들은 올해 3조6275억원, 내년 2조1292억원, 내후년 2조931억원 등으로 영구채 만기 연장 시점이 돌아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만기를 연장하지 않으면 금리가 급격히 오를 수 있는 위험이 올해부터 2020년까지(전체 영구채 발행액의 65.3%) 몰린 것입니다.
[서울=뉴시스】추상철 기자 = 현대상선은 1976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버려진 유조선 3척으로 당시 아세아 상선을 설립해 1983년 지금의 현대상선이 탄생했다. 2016.

[서울=뉴시스】추상철 기자 = 현대상선은 1976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버려진 유조선 3척으로 당시 아세아 상선을 설립해 1983년 지금의 현대상선이 탄생했다. 2016.

 
영구채 만기 연장 시점이 오면 기업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만약 영구채를 갚을 돈이 없어 만기를 늘리는 기업이 많아지면, 이들이 지급해야 하는 이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고, 고금리 부담을 견디지 못해 '두 손을 드는' 기업이 늘어나게 되겠지요. 그때는 '영구채 발 위기'가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중앙일보는 최근 대한항공·두산인프라코어·포스코·현대중공업 포스코 등 올해 만기 연장 시점이 돌아온 기업에 문의해 봤습니다. 모든 기업이 "만기를 연장하지 않고 영구채를 갚을 것"이라고 답했지요. 영구채를 발행했던 2012년~2014년 당시보다 갚을 돈을 충분히 번 곳도 있고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을 만큼 신용도가 좋아진 곳도 늘어나는 등 경영 환경이 그때보다는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달콤했지만, 쓰디쓴 '뒤끝'…갚을 땐 부채비율 '쑥' 
영구채는 발행할 땐 달콤한(?) 자금 조달 수단이었지만, 갚을 땐 아주 쓰라린 아픔을 남기기도 합니다.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돼 부채비율을 높이지 않고도 자금을 끌어 쓸 때는 좋았죠. 하지만 영구채를 갚을 땐 반대로 그만큼의 자본이 빠져나가는 꼴이 됩니다. 게다가 영구채를 '부채'로 분류되는 회사채나 은행 대출로 갚게 되면 부채비율이 더 높아질 수 있지요. 예를 들어 1조원의 영구채를 가진 기업이 1조원을 은행에서 빌려 영구채를 갚으면, 1조원의 자본이 사라진 다음 1조원의 부채가 순식간에 생기게 되는 꼴입니다. 금감원이 최근 조사한 결과 한 기업은 영구채를 회사채로 갚을 경우 부채비율이 988%에서 7092%까지 급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부채비율이 급상승해 재무 상태가 나빠지는 곳이 현재 4곳에 달한다는 게 금감원의 설명입니다.
 
아이러니한 건 영구채는 만기를 '영원히' 연장할 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아무도 만기를 연장하길 바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돈 갚을 날짜를 기업이 정할 순 있지만, 사실상 만기가 있는 일반 채권하고 비슷하게 활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또다시 '제2의 영구채 성격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알고 보니 결국 채권과 다를 바 없으니 다시 이를 '자본'에서 '부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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