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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나는 ‘지하실’은 당신에게도 있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1> 상트페테르부르크: 반역
『지하에서 쓴 수기』를 구상할 무렵의 도스토옙스키(1863)

『지하에서 쓴 수기』를 구상할 무렵의 도스토옙스키(1863)

도스토옙스키는 폐결핵 말기의 부인을 보살피며 틈틈이 쓴 『지하에서 쓴 수기』를 1864년 ‘시대’지에 연재했다. 1부는 주인공(제목 때문에 흔히 ‘지하 생활자’라 불린다)이 당대 유행하는 사상을 공박하는 논쟁 형식을, 2부는 일인칭 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잡지 연재 당시나 단행본 출간 후에나 소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논설문과 스토리텔링의 ‘콜라보’ 형식도 파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 도대체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수많은 작가와 사상가들, 특히 실존주의 계열의 저자들이 이 소설에 열광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하 생활자에게 이름을 안 붙여준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랬더라면 그 이름은 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처럼 수시로 독자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부인의 병구완을 하고, 의붓아들을 키우고, 잡지사 운영까지 해야 하는 와중에도 작품의 완성도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생각보다 쓰는 게 어려워. 하지만 반드시 훌륭하게 써야 해. 나를 위해서 반드시 그래야만 해.” 그는 소설이 “기이하고 거칠지만 강력하고 솔직한 것”이며 “진실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위선적인 세상에 대한 도저한 ‘반역’
소설은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사악한 인간이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한다.” 주인공의 자기소개는 일단 직설적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하급 관리였으나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은 덕에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작은 지하 셋방에 칩거한 채 책만 읽으며 살고 있다. 소설을 조금만 읽어 보아도 그가 얼마나 뒤틀리고 비비꼬인 인간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소심하고, 지나치게 예민하고, 심술궂고, 쩨쩨하고, 자존심만 강하고, 자존감은 최저 수준이고, 뒤끝 길고, 앞뒤가 안 맞고, 대인관계는 엉망이다. 시쳇말로 ‘비호감’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 곁의 누군가가 “나는 건강한 인간이다, 나는 착한 인간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좋아한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누가 더 ‘비호감’일까? 왜 선뜻 대답이 안 나올까? 자기가 매력적이고 선량한 인간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사람? 노력하면 누구나 선하고 행복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 끔찍하다. 지하 생활자는 바로 그런 사람, 그런 생각이 판치는 세상에 맞서는 외로운 반역자다. 그래서 독일 연구자 카우프만은 그의 스토리를 “세계 문학에서 가장 혁명적인 소설”이라 불렀다. 
 
주인공의 모든 혐오스러운 면면은 우리 대부분이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성질이다. 이 기질적인 공감대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그의 언변에 휘말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다가 주인공의 지하실이 무질서하고 누추하고 악취 풍기는 본성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불현듯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지하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는 우리가 의식 저편으로 팽개쳐버린 것,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안 가진 척하고 사는 것을 다 드러내 보였다. 지하실 문을 연 것이다.  
 
지하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마이너스 자존감’이다. “나는 내 얼굴을 싫어했다. 나는 내 얼굴이 소름끼치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얼굴에 비굴한 표정 같은 것이 있다고까지 의심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직장에 도착할 때마다 아무도 나한테서 노예 같은 표정을 감지할 수 없도록 가능한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며 최대한 고상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못생긴 대신에 고상하고 인상적이며 무엇보다도 대단히 지적인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격지심은 소외로 이어진다. “나는 하나고 그들은 전부다.” 그는 자기만의 방에 들어앉아 세상에 조소를 보낸다. “나는 내 모든 동료들을 싫어했다. 그들을 모두 경멸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경멸은 그들 세계에 소속되고 그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의 이면일 뿐이다. 그는 멋지고 당당한 “아웃사이더”가 결코 아니다. “그들을 경멸했건, 혹은 나보다 더 높이 평가했건 나는 내가 만났던 모든 이들 앞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오만과 비굴, 독립과 소속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의 자아 이미지는 더욱 더 추락한다. 그는 자신이 “더럽고 냄새 나는 지하에서 모욕당하고 얻어맞고 조롱당하는 한 마리 쥐”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분노한다.  
 
당신은 ‘살아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1866년 출간된 『지하에서 쓴 수기』단행본 표지

1866년 출간된 『지하에서 쓴 수기』단행본 표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내면의 지하실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그를 쥐가 아닌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는 당대 합리주의자들의 행복론에 거세게 반발한다. 그들은 “통계적인 숫자와 법칙들로부터 얻어낸 평균치에 근거하여 인간의 이익에 관한 전체 목록을 만들었고” “인간이 몇 가지 나쁜 습관을 치료받고 상식과 과학이 인성을 완전히 재교육시켜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어 놓기만 하면 전 인류의 이익이 보장될 것”이라 믿었다. 한마디로 지하실의 카오스를 간과한 것이다.  
 
지하 생활자는 상식적인 “이익”의 의미를 전복시킨다. “인간의 이익이 절대적인 정확성으로 계산되어 본 적이 있는가? 어느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왜 이 모든 통계학자들과 현자들과 박애주의자들이 인간의 이익을 나열하면서 한 가지는 생략하는가?”  
 
자유의지, 변덕, 멋대로 하고 싶은 욕구야말로 ‘지하실’에 존재하는 최고의 이익이다. 자유의지는 “이성, 명예, 평안, 행복에 반대되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얻기 위해 인간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익”이다. “자유로운 욕구, 마음대로 날뛰는 변덕, 심지어 광기에 달하는 당신의 몽상, 바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이익 중의 이익이며 이것 때문에 모든 체계들과 이론들은 끊임없이 와해되어 버린다.”  
 
알렉세예프가 『지하에서 쓴 수기』에 그린 일러스트(1967)

알렉세예프가 『지하에서 쓴 수기』에 그린 일러스트(1967)

개인의 자유의지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지하생활자는 “2x2=4”라 명명한다. 그것은 인간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고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법칙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진리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운명, 혹은 자연의 법칙을 의미할 수 있다. 생로병사일 수도 있고 생물학적 결정론일 수도 있다. 그것은 철옹성이다. 이 철옹성을 향해 지하생활자는 인간의 불합리한 욕망을 가지고 돌진한다. “모든 게 도표와 수학에 따라 진행되고 오직 ‘2x2=4’만이 주위에 있을 때 인간 자신의 의지라는 것은 어디 있는가?”  
 
인간은 때로 자유의지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는 일을 저지른다. 오로지 개미들만이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대사원, 즉 개미집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개미가 아니라 인간임을 입증하기 위해 멀쩡한 건물을 허물기도 한다. 자기가 톱니바퀴가 아니라 인간임을 보여주기 위해 “환상적인 꿈과 가장 뻔뻔스러운 어리석음을 유지하려 든다. 그에게 ‘2x2=4’는 이미 삶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자 한 것일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며, 인간은 이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다, 나는 운명과 싸워 이겼다, 미래는 내가 창조한다” 같은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인간의 의지대로 풀리지 않는다. 뜻밖의 사고와 파산, 재난과 질병과 천재지변은 인간의 의지와 별 관계가 없다. 자신이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지하 생활자의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그는 아무 것도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 “나는 사악했을 뿐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악한 자도, 선한 자도 비열한 자도, 정직한 자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의미는 주인공의 반항 그 자체에 있다. 그는 반역을 위해 반역한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반역한다. 그의 반역은 비장하고 처절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삶을 그냥 삶과 “살아 있는 삶”으로 나누어 보았다. 오로지 스스로를 인간으로 의식하는 인간만이 “살아 있는 삶”을 산다. 의식과 고통은 맞물려 있다. 매 순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나 의식을 중단할 때 “살아있는 삶”은 사라지고 인간은 행복한 숫자로 축소된다. “나는 인간이 고통을, 즉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의식의 유일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2x2=4보다 “무한하게 우월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으면 반역도 없다. 그 점에서 지하생활자의 삶은 “살아있는 삶”이다. 그래서 그는 주인공이고 위대하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우리 사회에 존재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인간”이라고 단언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들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조차 못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당신들은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했고 거짓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왔다. 그래서 당신들에 비하면 내가 더 살아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세히 봐라!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정확하게 이 ‘살아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지하에서 쓴 수기』를 읽고 나면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니체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 독자라면 공감할까. 헤세는 우리가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지경까지 고통 받을 때, 삶 전체가 타오르는 상처처럼 느껴질 때, “이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작가의 음악에 마음을 열게 된다”고 썼다. 『지하에서 쓴 수기』는 가장 시끄럽고 신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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