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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좇아가는 음악 이젠 그만 해야죠"

 뮤지션 정재일,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를 만나다
‘Ryuichi Sakamoto: Life, Life’전을 위해 내한한 세계적인 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와 뮤지션 정재일이 만났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Ryuichi Sakamoto: Life, Life’전을 위해 내한한 세계적인 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와 뮤지션 정재일이 만났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영화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66)는 전위적 오페라 ‘LIFE’를 만든 현대음악가이자 백남준·존 케이지 등과 교류했던 진보적 아티스트다. 환경 운동가·반전 활동가로도 활약하다 2014년 중인두암에 걸려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2015년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레버넌트’로 컴백, 지난해에는 8년만의 정규앨범 ‘Async’를 발표하고 한국영화 ‘남한산성’에 참여하는 등 병마를 털어내고 왕성히 활동중이다.  
 
그리고 이번에 한국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 그간 협업한 미디어 아트와 대규모 설치작품을 볼 수 있는 ‘Ryuichi Sakamoto: Life, Life’전(5월 26일~10월 14일, 서울 회현동 피크닉)은 그의 예술과 인생을 조망하는 장이다. 또 6월 중순에는 다큐멘터리 ‘Ryuichi Sakamoto: CODA’도 개봉한다.  
 
전시회 개막을 위해 내한한 그에게 뮤지션 정재일(36)이 만남을 청했다. 최근 남북정상회담 환송식 연주로 주목받은 정재일은 가수 박효신과의 협업을 비롯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 ‘기생충’ 음악감독 외에도 연극·뮤지컬·창극·판소리 콜라보 등 전방위에 걸쳐 활약하고 있다. 음악적 깊이와 대중적 인지도를 모두 가진 두 사람이 서로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함께 했다.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회현동에 새로 생긴 문화공간 ‘피크닉(Piknic)’은 전시 준비로 분주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오페라를 모티브 삼은 ‘LIFE-FLUID, INVISIBLE, INAUDIBLE’, 일본의 정원 미학을 재해석한 ‘워터 스테이트’ 등 유명 예술가들과 협업한 멀티미디어 설치 규모가 상당했다. ‘워터 스테이트’ 전시장을 채울 커다란 바위들을 이날 오전 이우환 화백의 단골 채석장에서 직접 골라 온 사카모토는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정재일이 도착하니 “남북정상회담 공연 영상을 봤다”고 말을 꺼낸 사카모토는 “피아노를 정말 잘 치더라. 나도 어릴 땐 잘 쳤는데 지금은 엄청 못치게 됐다”는 엉뚱한 고백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영화 ‘CODA’도 그가 다소 서툴게 피아노 연습을 하는 장면으로 수미일관되는데, 요즘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등을 매일 연습하고 있단다.  
 
“나는 왼손잡이거든요. 피아노곡들이 대부분 오른손이 멜로디고 왼손은 재미가 없는데, 바흐는 오른손 왼손이 평등하게 주고받는 구조예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좋아했죠. 작곡을 하고 음악의 구조를 알게 되면서 점점 더 바흐의 위대함을 깨닫게 됐어요. 지금도 다 아는 건 아니고 늘 새로운 발견을 합니다. 바흐 음악엔 끝없는 깊이가 있거든요.”(사카모토)  
 
“저도 왼손잡이고,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매일 아침 쳤던 적이 있어요. 바흐는 피아노가 없던 시절에 나온 음악이라 페달을 써서 웅장하게 만들 수 없거든요. 음 하나하나 길이를 맞춰 쳐야 해서 쇼팽의 곡처럼은 못치죠. 마음을 다잡는 연습이자 명상의 의미도 되요.”(정재일)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피아니스트들은 바흐 음악의 신성하고 숭고한 면을 동경하는 걸까. 영화 속 사카모토는 ‘나만의 코랄 전주곡’을 목표로 신곡 ‘Solari’를 만든다. “음악만 들으면 매우 숭고하지만 바흐에겐 아주 인간적인 면도 있어요. 예컨대 마태수난곡 가사 중 예수가 죽는 부분에는 민중의 외침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죠. 바흐 시대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서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보는듯한 생생함을 느꼈을 겁니다.”(사카모토)  
 
“마태수난곡은 저도 좋아합니다. 사실 사카모토 선생님의 빅팬이에요. ‘레버넌트’ OST는 천번 넘게 들었는데, 작업 당시 엄청 힘드셨다고 들었어요.”(정)
 
전시 포스터

전시 포스터

“병이 덜 나았을 때라 처음엔 거절하려 했죠. 그런데 이냐리투 감독 작품은 다 봤을 정도로 정말 좋아해서 이제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했어요. 그런데 살면서 처음으로 내맘대로 안 되는 걸 경험했죠. 전에는 된다고 생각한 건 다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 몸보다 정신이 고통스러웠는데, 되돌아보니 육십 넘어 그런 경험을 처음 한 게 오히려 럭키한 인생이었다 싶어요.”(사카모토)  
 
“‘레버넌트’ 음악은 마치 동양화 같아요. 아무것도 안 그려진 곳에 강이 흐르고 있는 느낌이랄까.”(정)
 
“이냐리투의 첫 요구가 음악보다 소리의 퇴적을 원한다는 거였죠. 그런데 나중엔 감정적인 것까지 요구하더군요. 여느 영화음악처럼 커다란 멜로디나 화음을 요구하지 않지만 감정도 강해야 하는, 음악과 소리의 아슬아슬한 경계랄까. 나도 사실은 그런 걸 좋아하지만, 어느 정도로 해야할지가 문제였죠.”(사카모토)  
 
“이냐리투의 영화 ‘바벨’에도 선생님의 곡 ‘미모의 창공’이 나오는데, 영화사에 남을 만한 선곡이었다고 생각해요.”(정)  
 
“그때 처음 전화해서 내 곡을 7분 정도 반복재생하겠다고 하더군요. ‘바벨’ 음악감독이 아르헨티나의 구스타보 산타올라야라서 내 곡까지 그가 작곡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죠. 그래서 이냐리투가 구스타보에게 아카데미상 절반은 사카모토에게 주라고 했다는데, 안 주더군요.(웃음)”(사카모토)  
 
민족이 손 잡을 때 내 음악이 필요하다면 하는 거죠  
반전 활동가인 사카모토는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며 이웃으로서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이제 됐구나 싶었죠. 아직 북미간 긴장이 남아있지만, 한발한발 나아갔으면 해요.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도 있겠지만 독일도 했으니까. 걱정되는 점은 긴장관계가 있어야 득을 보는 사람도 있다는 거죠. 긴장이 풀리면 장사가 안되니 반대를 하는데, 사실 환경문제도 경제적 요소가 커요. 돈을 벌기 위해 환경과 인권, 평화를 뒷전으로 돌리는 ‘머니 드리븐’ 사회가 문제죠.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너무 심한 자본주의는 좀 진정되어야 해요.”(사카모토)  
 
정재일의 환송공연 ‘하나의 봄’을 보면서는 식은땀을 흘렸단다. “만일 내게 같은 의뢰가 온다면 용기가 날까 싶었죠. 역사적인 엄청난 사건이잖아요. 짧은 시간에 그렇게 긴 곡을 만든다는 것도 그렇고, 회담도 결과를 모르는 거니까. 섭외 받고 100% 확신했나요, 아니면 땀이 났나요?(웃음)”(사카모토)
 
“땀이 좀 났죠.(웃음) 하지만 음악은 인간의 모든 것과 가장 밀접한 예술이잖아요. 역사적인 순간들도 음악을 필요로 하죠. 물론 어마어마한 곳이었지만, 거기서 민족이 손잡을 때 음악이 필요하다면 하는거지, 라는 마음이었어요.”(정)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환송식에서 ‘하나의 봄’을 연주하는 정재일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환송식에서 ‘하나의 봄’을 연주하는 정재일

“그 의미를 살려 한국음악을 활용했더군요. 나도 한국 전통음악을 좋아해서 유심히 보니 장구치는 분 움직임이 내 친구 김덕수씨 같았어요. 물어 보니 제자라더군요.”(사카모토)  
 
“사실 거기서도 선생님 생각을 했어요. 97년 대학로 뒷골목에서 우연히 김덕수 선생과 같이 계신 걸 보고 인사드린 적이 있거든요. ‘제로랜드마인’이라는, 지뢰퇴치를 위해 전세계 아티스트들이 모인 프로젝트였죠. 제가 연주한 곳도 지뢰로 가득한 곳이잖아요. 음악적으로도 그 프로젝트를 떠올리며 작업했어요. ‘아리랑’ 같은 민속음악을 조합하고 마지막을 평화기원 합창으로 맺은 것도 그래서죠.”(정)
 
“아리랑은 긴 역사와 민족 전체가 만든 음악이죠. 서양인도 감동받더군요. 5음계라는 게 아프리카부터 전세계로 퍼져나간 인류 보편의 음계라 그럴지도 모르겠어요.”(사카모토)  
 
“전통은 시간이 만들어주는 거라 작곡 개념보다 훨씬 더 높은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민요 ‘새야새야’도 썼는데, 그 곡도 가장 단순한 멜로디에 엄청난 감정이 들어있거든요. 펜데레츠키가 심포니에 쓰기도 했는데, 전통의 힘이 그런 거겠죠.”(정)
 
Jae Il Jung x Ryuichi Sakamoto

Jae Il Jung x Ryuichi Sakamoto

대지진 트라우마, 새 음반에 아직 다 반영 못해  
정재일이 ‘하나의 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사물놀이와 아리랑으로 한국적 아이덴티티를 드러냈다면, 1990년 뉴욕으로 이주한 ‘코스모폴리탄’ 사카모토는 일본음악과 서양음악을 모두 초월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 작가 무라카미 류에 의하면 그의 음악은 “일본적 이미지를 내세우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어딘가 일본적”이다.  
 
“어릴 때부터 왜 나는 일본인일까, 지구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대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패전이라는 두 차례 자기를 부정하는 사건이 있었기에 전통음악을 들을 기회도 없고, 서양음악만 배워 작곡을 했죠. 그런데 20년 전 큰 사건이 있었어요. 유럽 피아노 투어를 갔는데, 베를린 콘서트홀에서 내가 브람스에게 영향받아 만든 곡을 연주하다 문득 돌아보니, 독일인들 앞에서 19세기 독일음악인이 만들었을 법한 곡을 일본인이 치고 있더군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붕괴되는 쇼크를 받고 난 후, 나에게만 가능한 것을 찾게 된 것 같아요. 근대 아시아는 음악도 문학도 기술도 서구를 뒤쫓아 왔지만, 이제 그런 건 그만둬야죠.”(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Life, Life'전이 열리고 있는 회현동 복합문화공간 Piknic

'Ryuichi Sakamoto: Life, Life'전이 열리고 있는 회현동 복합문화공간 Piknic

자연의 소리들을 음악으로 융합한 ‘Async’ 앨범에도 그런 생각이 담겨 있다. “음악은 xy좌표 안에 평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수학같은 면도 있는데, 근대 유럽은 그런 사고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 왔죠. 나는 수학적 사고를 되도록 버리고 자연에 가까운 쪽으로 되돌리고 싶어요. 자연과 인공의 만남을 넘어 보다 자연적인 사고방식 자체로 만들려는 거에요.”(사카모토) 
 
정재일 (왼쪽)과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카모토의 작품 ‘LIFE-FLUID, INVISIBLE, INAUDIBLE’을 누워 감상하고 있다.

정재일 (왼쪽)과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카모토의 작품 ‘LIFE-FLUID, INVISIBLE, INAUDIBLE’을 누워 감상하고 있다.

“전에도 알바 노토와 소리 작업을 하셨지만 이번 앨범은 전혀 달랐어요. 음악에 심취하다보니 궁금해지더군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비극이 있었잖아요. 한국 예술가들도 세월호 참사 이후 작풍이 많이 바뀌었는데, 혹시 그런 트라우마가 작용한 걸까요?”(정)
‘ASYNC’관련 아카이브

‘ASYNC’관련 아카이브

 
“커다란 충격을 소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죠. 나도 몇 년 걸려서 대지진 이후의 감각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 것 같지만 아직 다 소화하지 못했어요. 간단히 답을 내기 어렵지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겠죠. 대지진이 현대 문명이란 걸 생각하는 큰 계기가 됐는데, 그렇다고 문명을 전부 부정하고 석기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런 ‘머니 드리븐’ 사회가 계속되도 좋은가 생각하며 조금씩 전진할 수밖에 없겠죠.”(사카모토)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GL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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