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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월드컵 8강에 자극 중앙정보부 ‘양지팀’ 창단 … 거기 끌려간 게 인생 최악

네이버·중앙일보 공동기획 [인생스토리] ③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목표를 정한 뒤 물러섬이 없는 도전정신으로 최고 골잡이 반열에 올랐다. 또한 북한 축구 영웅 박두익씨의 도움으로 1990년 평양에서 부친과 상봉하기도 했다. [우상조 기자]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목표를 정한 뒤 물러섬이 없는 도전정신으로 최고 골잡이 반열에 올랐다. 또한 북한 축구 영웅 박두익씨의 도움으로 1990년 평양에서 부친과 상봉하기도 했다. [우상조 기자]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의미로 ‘풍운아’. 볼을 잡으면 맹수처럼 날쌔서 ‘아시아의 표범’. 한 번 맺은 약속은 끝까지 지킨다고 ‘의리의 사나이’. 놀기도 일등이라는 뜻을 담은 ‘이춘풍(春風)’까지.
 
이회택(72)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별명이 많다. 여러가지 별명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에 수렴한다. 직진(直進). 축구인으로, 누군가의 친구 또는 선·후배·가족으로 살아오는 동안 이 전 부회장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심이 서면 실행했고,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기 전까진 멈춰서지 않았다. 축구계에 입문한 지 4년 만에 ‘아시아 축구 올스타’가 되고,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골잡이로 인정받고, 대한축구협회 선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빛나는 발자취는 모두가 ‘직진 본능’의 열매들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내달릴 때도, 뒤늦게나마 깨닫고 멈춰서면 언제나 그 나름의 교훈을 얻었다는 게 이 전 부회장의 회고다.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서울 효창운동장 내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생각이 많아 좀처럼 출발점을 떠나지 못하는 청춘들에게 “일단 최선을 다 해보라”고 충고했다.
 
 
북 축구영웅 박두익 통해 부친 생사 확인
 
양지팀 시절 이회택(아랫줄 왼쪽 셋째).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양지팀 시절 이회택(아랫줄 왼쪽 셋째).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게 고등학생 때부터라던데.
"김포의 초등학교 선배가 영등포공고 출신 축구선수였는데, 소개를 받아 (영등포공고에서) 처음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5~6개월 정도 다녔는데, 학교에서 (김포농고 1학년을 마친 나를) 다시 1학년으로 뛰게 하려고 축구협회 선수 명부에만 등록하고 학적부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부정선수 시비가 불거져 고민할 때 지금은 돌아가신 박병석 감독님께서 동북고에 데려가셨다. 당시 동북고는 최고의 축구 명문이었는데, 가장 공을 잘 차는 김기복(현 실업축구연맹 회장)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저걸 못 꺾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밤낮 없이 축구공만 붙들고 살았다.”
 
축구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아시아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급성장했는데.
"열심히 노력한 게 사실이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병석 감독님께서 경기 중에 활용할 수 있는 테크닉을 다양하게 가르쳐 주셨다. 지도자를 나는 한번도 ‘선생님’으로만 여긴 적이 없다. ‘신’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따랐다. 그분께서는 ‘거리를 걷다 돌멩이 하나를 발견해도 그냥 지나치지 말라’고, ‘차에 타서도 앉지 말고 발목을 돌리며 운동하라’고 가르치셨다. 후에 감독이 되고 나서 후배와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지도자를 하나님으로 봤는데, 너희들은 목사님까지만이라도 생각하라’고.”
 
전쟁 중에 이별한 아버지와 1990년 평양 방문때 만났는데.
"아버지를 만난지 20분 정도 되니까 북측에서 ‘오늘은 그만 만나고 내일 만나시라요’하며 떼어놓으려 했다. 기가 막혀서 ‘40년 만에 만난 부자지간을 20분 만나고 내일 만나라는 게 어느 나라 법이냐’고 벌컥 화를 냈다. 그랬더니 높은 분들끼리 이야기를 해서 그날부터 한 호텔방에서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양지팀 소속으로 1967년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출전한 이회택(왼쪽).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양지팀 소속으로 1967년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출전한 이회택(왼쪽).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북한의 축구영웅 박두익씨를 통해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했다고.
"박두익씨를 처음 만난 건 1974년도다. 아시안게임 기간 중이었는데, 나는 남한팀 선수, 박두익씨는 북한팀 감독이었다. 그때 처음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이후 1986년도에 내가 감독을 맡고 있던 포항제철이 태국 킹스컵에 출전했는데, 그 대회에 북한대표팀을 이끌고 온 박 감독과 재회했다.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는데, 198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탈리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다시 만난 박 감독이 아버님의 사진과 편지를 가져왔다.”
 
동북고를 졸업한 이후 ‘옆길’로 새기도 했다던데.
"고등학생 때는 ‘축구에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착실하게 했다. 1966년에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박병석 선생님이 성균관대 감독이 되면서 나를 성균관대로 데려가셨는데, 사실 내 목표는 연·고대 진학이었다. 그래서 결국 대학을 다시 가기로 하고 학교를 나왔다. 석탄공사 축구팀에 1년 있다가 연세대 시험을 보고 합격해 입학식을 기다리는데, 신체검사 통지문이 날아오더니 곧이어 입대 영장이 나왔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양지팀을 창단하면서 나를 데려간 거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팀에 끌려간 게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정상적으로 대학 생활을 마쳤다면 더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른 것에 자극 받은 중앙정보부는 이듬해 2월 육·해·공 3군 소속 선수를 대상으로 현재의 국가대표격인 양지팀을 창설했다. 당시 양지팀에 차출된 이회택 전 부회장은 선택 가능한 부대 중 복무기간이 가장 짧은 해병대를 선택해 군 생활과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병행했다. 양지팀은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고, 소속 선수들은 당시 실업축구팀 선수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연봉과 보너스 등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양지팀 시절 ‘이춘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던데.
"동료들이 대부분 7~10년 선배들이었는데, ‘국가대표는 술도 일등으로 잘 먹어야 한다’며 음주를 권하곤 했다. 내가 술이 받지 않는 체질이기에 망정이지, 술을 마셨다면 20대 초반에 선수 인생을 끝내지 않았을까. 양지팀에 간 이후 최고 권력기관 소속이 되고, 갑자기 큰 돈도 생기니 좋지 않은 데로 빠지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봄바람’이란 뜻의 ‘춘풍(春風)’은 당시 친구들이 부르던 별명인데, 푼수 같다는 뜻 아니었을까.”
 
당대 최고 공격수로서 올림픽이나 월드컵 본선을 밟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당시에 올림픽이나 월드컵 본선에 한 번 나가보는 게 축구계 전체의 희망이었다. 그걸 못 이뤘으니 축구인으로서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인 느낌이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 축구가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을 때다. 4─4─2나 3─5─2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다. 주먹구구식이었달까. 예전 1950년대에 하던 축구를 60년대 70년대 초까지 했으니까.”
 
 
70년대 초 조용필 발굴해 매니저로 활동
 
2008년 대한축구협회 창립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회택 부회장(오른쪽 셋째).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2008년 대한축구협회 창립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회택 부회장(오른쪽 셋째).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70년대 초에 가수 조용필씨를 발굴했다던데.
"조용필씨가 ‘25시’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참 잘했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 ‘형, 나를 25시에서 좀 빼달라’고 부탁했다. 그 밴드를 이끌던 분이 지인이었는데, 만나서 ‘지금부터 내가 이 친구를 데리고 있겠다. 이제 내가 매니저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조용필씨가 그 팀을 나와 만든 밴드가 ‘위대한 탄생’이다. 준비 과정을 거쳐서 음반을 냈는데,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뜨기 시작해서 꽤 바빠졌다. 내가 조금 인기가 있을 때니까 TBC, MBC 등등 직접 방송국 돌면서 PD도 찾아가고 그랬다. 현역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가수를 관리한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땐 그랬다.”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은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데.
"그런 건 매스컴에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스트라이커 중에서는 대선배님이신 최정민 감독님이 탁월했고, 내가 그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 이후로 여러 공격수들이 나왔지만 내가 버티고 있으니까 대표팀에서는 다른 포지션으로 옮겨갔다. 대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축구 하나 밖에 몰랐다. 하지만 이후에 연예인도 알게 되고, 이것 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아서 방탕한 생활이 너무 빨리 왔다. 그때 나를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해외 무대로 나갈 기회가 있었다면 더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지지 않는 수비 축구 일관하니 팬들 외면
 
“열 번의 우승보다 한 명의 대표선수를 키워내는 지도자가 되라”는 말의 의미는.
"지도자들이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에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다. 체력과 전술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가서 배워도 충분한데, 우리 지도자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백패스를 가르친다. 전술 대신 기술을 가르쳐서 내 선수를 한 명이라도 더 대표선수로 성장시킨다는 꿈을 가져야 하는데, 우승하지 못하면 쫓겨나는 상황이다 보니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최근에 축구 열기가 많이 가라앉았다는 우려가 나오는데.
"축구계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유럽이나 남미에서 하듯 기술축구가 자리잡으면 팬들이 오지 말래도 오게 되어 있다. 재미없는 축구, 지지 않는 수비 축구로 일관하다 우리 스스로 팬들을 놓쳐버린 것 같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성적도 중요하지만, 멋있는 경기를 해야 한다.”
 
이회택은
1946년  경기도 김포 출생
김포중-동북고-한양대-대한석탄공사-양지-대한중석-포항제철
1965~1966년 축구청소년대표
1966~1977년 축구국가대표(A매치 82경기 21골)
1967년 메르데카컵 최우수선수
1998~1990년 축구대표팀 감독, 이탈리아월드컵 참가
1998~2003년 프로축구 전남드래곤즈 감독
2004~2005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2005~2011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2005년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헌액
2010년 아시아축구연맹 공로상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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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