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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헌법은 구시대 유물 아니다

책 속으로
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의 이름으로
양건 지음, 사계절
 
“헌법 재판에 정답이 있느냐”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도그마(dogma)를 믿는 근거와 그 적용 기준을 찾아내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법학자나 법관에겐 금기와도 같은 질문이다. “정답이 없다”가 이 질문의 정답이라면 ‘공정한 재판’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유지되는 사법체계의 근간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양건(71) 전 감사원장은 1966년부터 법학도로, 법학 교수로, 또 법 집행기관의 수장으로 50여 년간 맺어온 법학과의 인연을 정리하며 이 질문을 자신과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50세가 넘으면서 ‘법학은 허학(虛學)이 아닌가’하는 회의가 밀려 왔지만 학생들 앞에선 말할 수 없었다. 무책임해 보일까 봐….” 최근 『헌법의 이름으로』라는 무거운 제목의 책을 낸 그를 지난 28일 만났다.
 
묵혀둔 화두를 던진 이유를 “때가 됐다는 생각 때문”이라 했다.
 
“헌법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을 무렵의 헌법과 지금의 헌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됐다. 유신과 5공 시절 헌법은 말 그대로 장식에 불과했다. 지금은 과도한 사법 통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정도로 활성화된 헌법 재판을 통해 헌법이 규범력을 발휘한다. 살아있는 헌법의 시대다. 헌법 재판의 알맹이를 까놓고 이야기할 때가 됐다.”
 
그는 특히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기각 결정이 헌법 재판의 위상과 영향력의 질적 수준을 달리하게 된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한다. 정권의 명운을 가르는 고도의 정치적 사안들이라도 판단을 미루지 않겠다는 헌법재판소의 의지가 분명해졌다.
 
양건 전 감사원장이 우리 헌법을 지탱하는 법논리의 구조를 분석한 책을 출간했다. [오종택 기자]

양건 전 감사원장이 우리 헌법을 지탱하는 법논리의 구조를 분석한 책을 출간했다. [오종택 기자]

도발적 질문은 ‘헌법 해석에 원칙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객관적 척도가 존재하기는 할까’라는 식으로 구체화된다. 어떤 법률과 공권력 행사의 위헌성은 결국 헌법재판관들이 충돌하는 집단주의(공익)와 개인주의(사익) 사이에서 저울질해 판단하는데 과연 그 저울의 눈금과 추는 얼마나 정밀한 것이냐는 의문이다. ‘결국 재판관의 직감에 의존하는 것 아닌가’.
 
화두를 좇는 여정은 19세기 서유럽의 혁명사를 산책하며 시작된다. 556쪽에 이르는 책의 절반 이상을 프랑스·독일·영국·미국의 혁명을 근대 헌법의 탄생과 작용이라는 앵글로 조망하는 데 썼다. 기준과 척도의 문제를 따지기 위해 헌법이 갖는 힘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이 필연적이었을 수 있다.
 
양 전 원장은 “87년 헌법의 규범력을 논하려다 보니 혁명을 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세계 헌법사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1987년 이전의 헌법이 권력자의 헌법이었다면 이후의 헌법은 시민의 헌법이다. 87년 6월 항쟁은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진정한 의미의 시민혁명이었다.”
 
87년 양 김(金)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것에 대한 실망감이나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뤘을 뿐 실질적 민주주의는 실현하지 못했다는 등의 시각 때문에 ‘6월 혁명’은 ‘항쟁’으로 평가 절하돼 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같은 기준에서 “2016년의 촛불은 혁명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집회·시위의 권리 행사→국회의 탄핵 소추→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87년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과 절차 내에서 전개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정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때 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저항권 행사도 아니었다.
 
개헌 논의가 물거품 돼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게 된 87년 헌법 체제는 어떤 의미일까. 양 전 원장은 “개헌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마치 87년 헌법을 구시대의 유물인 양 평가하는 시각에는 이의가 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것도 과장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제는 민주적이나 운용이 문제였다는 말이다.
 
그는 권력구조 개편의 필요성은 ‘제왕적 대통령제’보다는 장기적 국정 과제의 실종에서 찾아야 한다고 봤다. 양 전 원장은 “4년 중임제를 도입하면서 사법기관의 권력 견제 기능을 강화하는 등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추진해야 개헌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서고금을 훑은 뒤 그가 찾은 첫 질문에 대한 답은 불가지론에 가까웠다. “객관적 정답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법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정답이 있다는 믿음, 헌법에 내재하는 진정한 국민 의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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