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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영화 ‘버닝’의 슬픈 팬터마임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고 나오면서 갑자기 팬터마임을 배우고 싶었다. 영화 주인공 해미(전종서)가 오랜만에 만난 종수(유아인) 앞에서 두 손을 돌려가며 귤을 까먹는 장면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물론 실제로 귤은 나오지 않는다. 가상의 동작이다. 그런데 해미의 한마디가 허를 찔렀다. “나는 언제든지 귤을 먹을 수 있어. 진짜 귤이 있다고 생각하면 입에 침이 나와. 진짜 맛있어.” 가히 마법사 경지다. ‘금 나와라, 뚝딱’ 요술 방망이도 아닌데 말이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는 더더욱 아닐 터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상상으로나마 손에 쥐고 싶어하는 이 시대 청춘의 가난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종수와 해미는 고향 친구다. 택배회사 알바생 종수와 내레이터 모델 해미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다. 영화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말마저 나오는 요즘 청춘들의 힘겨운 일상을 훑어본다. 괴물 같은 세상에 분노가 치솟지만, 대체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무력하기만 한 젊은이들의 사랑인 듯 사랑 아닌 관계를 미스터리 스릴러로 풀어간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 영화에서 종수와 해미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팬터마임 못지않게 지명 ‘파주’가 머리에 박혔다. 왜 감독은 굳이 파주를 골랐을까.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오정미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서울에서 가까운데도 소외된 곳이 파주였습니다. 감독과 촬영감독이 나중에 그 일대를 둘러보았을 때 영화와 딱 맞는 곳을 찾아냈어요. 저녁놀이 지고, 자유로가 보이고, 대남방송도 들리고…. 원래 그곳에 있던 창고를 허물고 낡은 집 세트를 새로 지었습니다.”
 
이창동 감독도 언론 인터뷰에서 비슷하게 말했다. “파주는 서울에서 불과 40분 떨어져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남방송이 들렸어요. 도시에선 안 들린다고 착각할 뿐이지 무의식중에 들려오는 남북대립의 상징입니다. 또 종수에게는 벗어나고 싶었던 농촌이죠. 아버지(과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버닝’에서 파주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또 하나의 캐릭터로 작동한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포위된, 북한이라는 적대 체제와 마주한 저개발과 분단의 장소다.
 
지금은 대북·대남 방송 모두 끊어졌지만 영화에서 종수는 낮이고, 밤이고 윙윙거리는 스피커 소리를 피해갈 수 없다. 반면 ‘버닝’의 또 다른 주인공인 ‘강남 개츠비’ 벤(스티븐 연)은 종수네 집을 찾아와 이렇게 묻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죠. 재미있네요.” 평생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벤에게 대남방송은 그저 신기한 장식음일 뿐이다. 종수의 뿌리인 농촌 파주도 ‘반포 오빠’ 벤에겐 잠시 이국정취를 누리는 곳에 불과하다.  
 
‘버닝’의 파주는 이창동 감독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의 일산을 떠올리게 한다. 고층아파트가 빼곡한 일산 신도시의 후미진 동네에 사는 ‘초록물고기’의 막동이(한석규)와 곧 허물어질 듯한 집에 사는 ‘버닝’의 종수는 개발·경쟁 시대의 탈락자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21년이란 시간 차에도 두 영화의 파주나 일산은 어쩌면 지난 시대 우리 대다수의 얼굴, 시야를 좁히면 이 시대 막막한 청춘의 초상이 아닐까 싶다.
 
이번 주 파주는 분주했다.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미국 실무팀이 한강·임진강을 낀 자유로를 따라 판문점까지 다녀왔다.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연 문재인 대통령도 이곳을 거쳐 갔다. ‘버닝’의 잔상 때문인지 신문 사진에 찍힌 ‘통일을 준비하는 파주’ 문구가 확 들어왔다. 영화에는 최악의 청년실업률에 빠진 한국과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전하는 TV 뉴스도 잠깐 등장한다. 엎치락뒤치락 곡예를 거듭해온 남북, 북·미 대화가 ‘N포세대’ 청년들에게 어떤 비전을 줄 수 있을까. 없는 것도 단박에 있게 하는 팬터마임 기술이라도 부렸으면 하는 마음 한가득이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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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