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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궁 찬양 일색’에서 전체주의를 예언하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0> 런던: 디스토피아의 비전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가 열린 수정궁의 내부 풍경. 윌리엄 심슨의 동판화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가 열린 수정궁의 내부 풍경. 윌리엄 심슨의 동판화

도스토옙스키의 런던 체류가 문학사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것은 무엇보다 ‘수정궁’(Crystal Palace) 덕분이었다. ‘수정궁’은 유리와 주철로 건축된 런던 만국박람회장을 부르는 이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1862년 런던 방문 당시 근교의 시드넘에 재개장한 수정궁을 보고 와서 여행기에 그 감상을 남겼다. 1864년 발표한 소설 『지하에서 쓴 수기』에서는 디스토피아의 상징으로, 『죄와 벌』에서는 선술집 이름으로 수정궁을 사용했다. 20세기 작가 자먀틴은 도스토옙스키의 수정궁에서 영감을 얻어 SF 소설 『우리들』의 미래세계를 창조했다. 영국 작가들보다 러시아 작가들이 영국에서 열린 행사를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는 당초 장소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공모전에 200개가 넘는 설계안이 제출됐지만 당선작이 없었다. 벽돌 건물을 세우려던 애초의 계획은 접어야 했다. 교통 혼잡과 자연 훼손 등 문제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건축에 소요되는 1900만 장의 벽돌을 구울 시간이 없었다. 그때 데본셔 공작의 책임 정원사로 일하던 조경전문가 조셉 팩스턴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규격화된 판유리로 초대형 온실을 건축해 박람회를 유치한 후 해체하자는 제안이었다. 유리는 비용과 제작 시간 면에서 시쳇말로 ‘신의 한 수’였고 제안은 즉각 수용됐다.  
 
총 9만 2000㎡에 달하는 하이드파크 공원 부지에 길이 564m, 최고 높이 33m, 넓이 124m의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섰다. 4500t의 주철을 사용한 3300개의 기둥과 29만 3655장의 판유리로 조립된 건물은 눈부시게 찬란했다. 세인트폴 대성당이 35년 만에 완공되었다면 수정궁은 성당보다 3배나 컸지만 불과 7개월 만에 완공됐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가 열린 하이드파크의 수정궁 외관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가 열린 하이드파크의 수정궁 외관

1851년 5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수정궁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고, 6개월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전 세계에서 60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 박람회가 끝난 후 수정궁은 해체되었다가 1854년 런던 남쪽 시드넘에 다시 조립되어 세워졌다.  
 
그즈음 설립된 ‘수정궁 회사’는 수익을 내기 위해 엔터테인먼트를 도입했다. 온실·박물관·서커스·극장·공장 등 무엇이든 다 수용했고, 중산층 뿐 아니라 노동 계급도 끌어들여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소비하게 했다. 1936년 11월 30일 화재로 전소될 때까지 시드넘의 수정궁은 근대 상업주의의 산실이었다. 수정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크리스탈 팰리스 공원’이 조성되고 입구에는 팩스턴의 동상이 세워졌다.  
 
기술이 권력을 넘어 종교가 될 때  
논란과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만국박람회는 개장 순간부터 흥분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태양빛을 반사하며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초대형 유리 건물과 투명한 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 전시된 최첨단 발명품들 앞에서 방문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개막식에 등장한 빅토리아 여왕은 “동화처럼 믿을 수 없이 영광스러운 광경”이라 상찬했다. 디킨스는 “불가능한 건축을 가능케 한 과학 발전을 자축하자”고 썼다.  
 
러시아도 수정궁 찬양대에 합류했다. 1851년 8월 잡지 ‘현대인’에는 수정궁과 관련하여 “미와 조화의 꿈이 실현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진보적 지식인 체르니셰프스키는 1854년 ‘조국 통보’지에서 시드넘의 수정궁을 “예술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의 기적”이라며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런던을 방문했을 당시 수정궁의 명성은 이미 절정을 지나있었다. 1853년 발발한 크림 전쟁은 만국박람회에서 인류의 공동선과 평화를 읽어내려 했던 사람들의 성급함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수정궁의 ‘관념’은 여전히 막강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최고의 공학 교육기관인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에서 5년 동안 지리·물리·수학·토목공학·건축학을 공부한 ‘공학도’였다. 그런데 수정궁에 대한 그의 인상은 건축학이나 공학과는 별 관련이 없었다. 최첨단 공법도 신소재도 안중에 없었다. 대신 그는 수정궁과 만국박람회의 ‘관념’을 해석했고, 그 관념의 미래를 예측했다. 훗날 연구자들이 그를 ‘예언자’라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다.  
 
수정궁이 재조립돼 세워진 런던 남쪽 시드넘에는 크리스탈 팰리스 공원이 조성됐다.

수정궁이 재조립돼 세워진 런던 남쪽 시드넘에는 크리스탈 팰리스 공원이 조성됐다.

만국박람회 개막의 주역인 앨버트 공작은 박람회가 “전 인류의 화합이라고 하는 위대한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거기서 기이하게 불편한 ‘획일화’를 발견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목소리로 찬양한다는 사실에서 전체주의의 악몽을 미리 읽었다. “만국박람회…사실 이 박람회는 놀랄만하다. 당신들은 전세계에서 몰려온 이 무수한 사람들을 하나의 무리로 통일한 무서운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전역에서 단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온 수 십만 수 백만 사람들이 거대한 궁전에서 조용히 끈기 있게 입을 다물고 모여 있는 모습”은 그에게 “하나가 된 양떼”처럼 비춰졌다.  
 
마샬 버만은 도스토옙스키가 수정궁을 비판한 것은 “서구의 건설적인 업적에 대한 방어심리와 질투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설령 그런 면이 조금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보여준 것은 개인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예언적 성찰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거대한 장치를 만들어낸 “정신의 오만함”과 그것을 추종하는 무리들의 “맹목”에 경악했다. 수정궁은 과거의 신을 밟고 등장한 새로운 신이었다. 그런 위대한 힘에 복종하거나 감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수많은 저항과 부정의 정신”이 필요했다.  
 
의혹도, 부정도 불가능해지면 결국 인간도 종말  
실제로 만국박람회 개막식은 종교예식을 방불케 했다. 성직자들이 도열한 가운데 대규모 합창단은 오르간 반주에 맞춰 산업의 승리를 찬양하는 거룩한 송가를 불렀다. 사람들은 수정궁을 기점으로 ‘신예루살렘’이 도래할 것으로 예측했다. 기술 덕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번영과 평화를 누리는 낙원이 곧 실현될 것이라 기대했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수정궁의 이미지를 토대로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구상했다. “저런 건물은 어디에도 없어. 아니 저런 비슷한 건물이 하나 있어. 시드넘 언덕에 세워져 있다는 궁전 말이야. 철근과 유리로 지어졌다지.” 이 대형 건물 안에는 동일한 크기의 편리한 집들이 들어서 있고 남녀노소 거주민들은 모두 적절한 노동과 여가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기계가 많은 것을 대신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에서 쓴 수기』에서 수정궁을 기술이 권력을 넘어 종교가 되는 미래사회의 축소판으로 바라본다. 모든 것이 다 들여다보이는 유리, 그 완벽한 투명함과 절대적인 명료함은 모든 문제의 완벽한 해결과 모든 행동의 완전한 예측 가능성, 확고부동한 논리의 승리를 상징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런 법칙들에 따라 수학적으로 마치 로그표처럼 10만 8000까지 계산되어 달력에 기입될 것이다. (...) 모든 것들이 대단히 정확하게 계산되고 표시되어 행동도 모험도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수학적 정밀함으로 계산된 새로운 경제관계가 수립될 것이다. 그래서 순식간에 모든 가능한 문제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때는 수정궁이 완성될  것이다.”  
 
수정궁의 문제는 무엇인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다. 문제가 없으므로 고통도 없다는 게 문제다. “고통은 의혹이며 부정이다.” 그러므로 수정궁처럼 완벽한 낙원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필요가 충족되고 욕구가 합리적으로 조종되는 사회에서는 의혹도 부정도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의 불가능은 인간 자체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인류의 꿈이 최종적으로 실현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더 이상의 갈등도 도전도 없어질 때, 인간의 실존도 끝날 것이다. 인간은 결국 “피아노 건반 중의 하나이며 오르간의 작은 나사못 이상은 아닌”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수정궁 앞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무언가 최종적인 것이 성취되어 마무리되었다는 두려운 느낌”, 어딘지 모르게 “종말론적인”느낌은 여기에서 온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격렬하게 난공불락의 최종성과 완결성에 반항한다. “내가 아직 살아있고,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내가 만일 그런 종류의 건축 계획을 위해 벽돌 한 장이라도 운반한다면 내 팔들이여 차라리 불구가 되라.”  
 
지난 세기만 해도 도스토옙스키의 수정궁은 체르니셰프스키와의 이념 논쟁 측면에서 언급되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이념 논쟁보다 훨씬 거대한 사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지하에서 쓴 수기』가 출간되고 150년이 흐른 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기술종교(techno-religion)를 성찰하는 『호모데우스』를 썼다. 종교를 대신한 기술이 위대한 알고리즘과 유전자를 통해 행복과 번영, 그리고 심지어 영생까지도 약속할 때 이제까지 우리가 알아온 인간의 존속이 위협받게 된다는 취지를 함축한다. “시간이 갈수록 데이터베이스는 커질 것이고 통계는 더 정확해질 것이고 알고리즘은 더 개선될 것이다. 그 시스템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만 하면 그날로 자유주의는 붕괴될 것이다.”  
 
개인은 점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작은 칩”으로, 그런 다음에는 “데이터”로 전락할 것이고 결국 “데이터 급류에 휩쓸려 흩어질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오르간의 작은 나사 못”이 하라리의 “시스템의 칩”에 슬그머니 중첩됨을 인정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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