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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벚나무는 죄가 없다

며칠 전, 자전거를 타고 어두운 거리를 달리다가 깜짝 놀랐다. 낮에 나갈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벚꽃들이 활짝 핀 까닭에 밤거리가 환해졌기 때문이었다. 겨울 내내 추위가 싫어 봄을 기다렸으면서도 내 입에서는 "벌써 봄이로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늦게 온다고 해도 언제나 봄은 '벌써' 오는 것인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그처럼 느닷없이 피어나는 벚꽃 때문일 듯하다.



벚꽃을 보니 일본 작가 사카구치 안고의 '활짝 핀 벚나무 아래에서'가 생각났다. 소설은 "벚꽃이 피면 사람들은 그 아래서 술병을 들고 경단을 먹으며 절경이네, 봄이 흐드러졌네 하면서 마음이 들떠 흥분하지만"이라고 시작한다. 그러니까 활짝 핀 벚나무에도 끔찍한 사연이 숨어 있다는 얘기다. 벚나무 아래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서서히 미쳐가는 산적의 이야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악마라도 될 수 있다는, 이런 식의 미감은 역시 일본의 것이다.



오누키 에미코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어떻게 이 미감을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복잡한 세계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기 위해 군국주의 국가는 비유를 곧잘 사용한다. 나치정권은 유대인을 쥐나 전염병에 비유해 이후 유대인 학살에 나서게 될 사람들의 양심을 마비시켰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병사를 떨어지는 벚꽃에 비유함으로써 제국주의 일본은 개인의 죽음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죽어간 일본 병사들은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는데, 나는 이 '합사'라는 방식이 도무지 견딜 수 없다. '활짝 핀 벚나무 아래에서'에 나오는 문장처럼 인간은 모두가 "그 스스로 고독"인데, 합사라니. 한 인간의 죽음은 그가 아는 세계의 종말이다. 국민이라는 것은 한 인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 작은 부분 때문에 서로 다른 죽음이 한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느 정도 괜찮으니까, 이제 일본 정부는 그 죽음마저도 압수해버린 일본 청년들에게 사과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통석의 염이든 무엇이든, 가장 먼저 벚꽃들에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젊은 청년들의 목숨을 하찮게 다루는 일과, 봄이 되어 벚꽃이 피고 또 지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오히려 끔찍한 이야기를 떠올리는 건 소설가가 할 일이다. 모든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최대한의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인간성은 마침내 벚꽃들처럼 활짝 피어나야만 한다. 그런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가능성을 제한하는 국가는 사라지는 게 옳다.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이 인류의 희망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가끔 벚꽃은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고 인간은 국민이 되지만, 본디 벚꽃은 벚꽃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활짝 핀 벚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으면 너무나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그 벚꽃들을 보며 일제의 잔재이니 다 잘라내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일제의 잔재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인간을 국민으로 만들어 놓고 사유화하는 국가체제다.



이익이 얽혀 있으니 이런 일제의 잔재를 척결하는 일은 꽤 복잡하다. 그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인간을 사유화하려는 집단의 시도에 완강하게 맞서야만 하며, 민족과 국가가 아니라 인간을 더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이 모든 일을 대신해 '상징적'으로 윤중로의 벚나무를 자르는 건 좀 섬뜩하다. 벚나무를 자른다고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 이 다음에 또 우리는 뭘 자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활짝 핀 벚나무는 죄가 없다. 그저 봄이 온 것일 뿐이다. 공연한 벚나무 자르지 말고 일제 잔재나 청산하자.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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