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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읽기] 분노는 진보의 필수 요소인가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물론 장발장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장발장 이야기로 시작하진 않는다. 팡틴이나 코제트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첫 번째 장(章)은 전부 미리엘 주교에 대한 이야기다. 은촛대를 훔쳐간 장발장을 용서하고 감싸주는 바로 그 인물이다.
 
소설 도입부에서 이미 미리엘 주교는 성자나 다름없다. 자비와 박애를 신실하게 실천하고, 겸손한 데다 유머 감각까지 뛰어나다. 주교로 임명된 지 사흘 만에 자기 거처를 좁은 자선병원으로 옮기고, 넓고 호화로운 주교관은 가난한 환자들이 쓰게 한다. 포악한 산적조차 주교의 인품에 감화된다.
 
그런데 주교는 뜻밖에도 프랑스혁명에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대혁명에 참여했던 G라는 전 혁명의회 의원을 찾아가 날 선 논쟁을 벌인다. 주교는 말한다. “저는 노여움이 끼어든 파괴를 경계합니다. 단두대 앞에서 박수를 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혁명이 숭고했다고 믿는 G는 이렇게 대꾸한다.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입니다. 정당한 분노는 미래에 사면될 겁니다.”
 
G의 말처럼 진보는 분노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걸까? 세상에는 그렇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대혁명 이후 200여 년이 지난 2010년, 프랑스에서는 ‘분노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나치에 맞섰던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유엔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지낸 스테판 에셀이 펴낸 책 『분노하라』가 출간 7개월 만에 200만 부 넘게 팔리면서다. 에셀은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청년들에게 분노를 주문했다. 역사는 더 큰 정의와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가며, 분노해야 그 흐름에 합류할 수 있다고(단, 에셀은 비폭력주의자다).
 
우리말에는 의분(義憤)이라는 단어가 있다. 세상에는 ‘옳은 분노’가 있다, 의로움과 노여움이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그 말 아래 깔려 있다. 공분(公憤)이라는 표현도 있다. 의분과 공분은 둘 다 우리에게는 직관적으로 와 닿지만 영어로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정작 『레미제라블』은 의분을 북돋고 혁명을 찬미한다기보다는 ‘분노 없는 의로움’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소설이다. 아전인수식 해석일지 모르나 내게는 『레미제라블』의 줄거리 전체가 첫 장에서 가톨릭 주교와 혁명가가 벌인 토론을 극화한 사고실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정신적 후계자다. 개심한 장발장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온갖 모순 부조리를 맞닥뜨리지만 결코 분노에 휩쓸리지 않으며, 동시에 의로움도 잃지 않는다. 민중봉기의 한복판에서 시민군 편에서 총을 들고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지만, 정부군의 투구만을 절묘하게 겨냥해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한다.
 
반면 분노 섞인 의로움을 동력으로 삼아 행동하던 조연들은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범죄자를 증오하던 경감 자베르가 그렇고,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부군과 대치한 젊은 공화주의자들이 그렇다. 예외는 마리우스 정도인데, 그도 장발장이 구해내지 않았더라면 동료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전 혁명의원 G의 또 다른 말, ‘정당한 분노는 결국 사면된다’는 주장은 어떤가. G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혁명의원을 지냈는지 소설에서 정확한 시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1793년 루이 16세를 처형할 때 혁명의회에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된다.
 
그 직전인 1792년에는 ‘9월 학살’이 있었다. 혁명정부가 반혁명파를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혁명의 열성 지지자들이 감옥을 습격해 그 반혁명분자들을 살해했다. 파리에서만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엿새 동안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각지에서 학살극이 벌어졌고, 혁명과 아무런 관계없이 사소한 죄로 감옥에 수감돼 있던 소시민들이 엄청나게 희생됐다. G는 그런 참극조차 역사의 발전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이며, 결국 정당화되리라 주장하는 셈이다.
 
섬뜩하게도 G의 예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말할 때 고귀한 이상을 주로 이야기하지, 9월 학살을 입에 잘 올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G를 만나면 미리엘 주교를 대신해 따지고 싶어진다. 분노의 적자(嫡子)는 진보가 아니라 또 다른 분노 아니냐고. 그러니 분노에 의지하는 운동은 보복의 악순환에 갇히기 쉬운 것 아니냐고.  
 
의로움이 노여움과 한 몸이 되기 쉬울수록 우리는 그 사실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단두대에 오른 정적을 보고 박수를 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우리의 본성이라 받아들일 게 아니라 단속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의로움을 의롭게 추구할 수는 없느냐고. 왜 그런 높은 이상을 품지는 못하느냐고. 그 많은 피를 꼭 다 흘려야 했느냐고.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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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