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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리! 많이! 재미있게! 신문을 읽고 잡지를 만들고 소설을 쓰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18> 상트페테르부르크: 저널리즘의 시대
도스토옙스키가 창간한 잡지 ‘시간’에서 기고를 담당한 문학평론가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도스토옙스키가 창간한 잡지 ‘시간’에서 기고를 담당한 문학평론가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마침내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를 떠났다. 간질로 인해 군 복무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소견서가 인정되어 상부에서 전역을  허가한 것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 있는 트베리가 거주지로 정해졌다.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1859년 7월 2일 4륜 마차를 타고 세미팔라틴스크를 떠나 한 달 반의 여행 끝에 트베리에 도착했다. 우랄산맥을 넘을 때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성호를 그으며 “신이여, 당신은 약속의 땅을 보게 해주셨나이다!”라고 외쳤다.  
 
시베리아에서 벗어난 것은 좋았지만, 지방 소도시 트베리는 세미팔라틴스크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하여 넉 달 만에 수도 거주권을 따냈다. 1859년 12월 20일, 그는 만 10년 만에 수도의 땅을 다시 밟았다. 니콜라옙스키 역에서 초초하게 기다리던 형 미하일의 품안으로 뛰어든 그 순간 대문호의 삶은 새 챕터로 넘어갔다.  
 
소설가들의 새 활로, 신문과 잡지의 비약적 성장
잡지사 ‘시간’을 경영할 당시 세들어 살던 건물. 2009년 8월 1일 ‘도스토옙스키의 집’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잡지사 ‘시간’을 경영할 당시 세들어 살던 건물. 2009년 8월 1일 ‘도스토옙스키의 집’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페테르부르크는 10년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사람들은 1855년 제위에 오른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Great Reform)’ 무드에 취해 있었다. 농노 해방, 사법 개혁, 지방자치 기구의 창설이 코앞에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사회 모든 부문을 달구고 있는 변화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니콜라이 1세 시대에 형을 선고 받았던 정치범들이 속속 시베리아에서 수도로 귀환했다. 연일 뜨거운 악수와 눈물과 포옹과 환영 만찬이 이어졌다. 돌아온 지식인들은 남아 있던 지식인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지적 서클을 만들어냈다. 도스토옙스키는 형이 마련해준 작은 셋집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 유배 전에 알았던 문우들과 만나고 새로운 사람들과 알음알이를 텄다. 옛 친구 밀류코프는 그가 “생각보다 멀쩡했으며 오히려 유배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고 회상했다.  
 
개혁 분위기와 맞물려 저널리즘의 봇물이 터졌다. 정치·경제·문학 등 모든 것을 다 다루는 러시아 특유의 이른바 ‘두꺼운 잡지’는 초유의 활황기를 맞이했다. 1856년부터 64년 사이에 정부가 발표한 출판 허가는 10배로 늘어났고 발행부수도 10배나 증가했다. 증가세는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신문을 포함하는 정기간행물 수는 1880년에 485종으로 늘어났다. 발행 부수가 증가했을 뿐 아니라 출간 속도도 빨라졌다. 독자들은 불평 아닌 불평을 해댔다. “너무 많아서 다 읽을 시간이 없어.” 어떤 비평가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역사는 전체가 다 저널리즘의 역사였다”라고 단언했다.  
 
무엇보다 신문의 약진이 놀라웠다. 1864년을 기점으로 사회적 파급 효과 면에서 신문이 잡지를 앞서기 시작했다. 주요 일간지 ‘모스크바 뉴스’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뉴스’의 발행부수는 잡지의 두 배였다. 사람들은 신문을 통해 사회생활을 영위했고 신문 기사를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식층의 전유물인 두꺼운 잡지보다 신문은 훨씬 다양한 계층의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었고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에도 걸맞았다. 1863년 크라옙스키가 창간한 일간지 ‘목소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 8시 전에 배달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덕분에 가게 주인들은 영업 시작 전에 여유롭게 조간 신문을 즐길 수 있었다.  
 
저널리즘의 확산으로 문학 시장의 판도도 바뀌었다. ‘푀이통’이라 통칭되는 가벼운 읽을거리가 점점 더 독자의 흥미를 자극했고, 신문이나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연재의 장점은 독자가 스토리를 ‘진행형’으로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설이 뉴스처럼 실시간으로 독자를 찾아왔다.  
 
‘시간’지 창간호 표지

‘시간’지 창간호 표지

가벼운 소설, 연재소설의 확산은 작가가 ‘전업’으로 창작을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학의 상업화가 불가피해졌다.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처럼 부유한 작가는 예외겠지만, 가난한 작가들에게 상업화는 호재로 작용했다. 잘 쓰고 많이 쓰면 물려받은 재산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신문 잡지의 발행부수와 구독자 수, 원고료, 직원의 급료 등이 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서열도 드러났다. 내용이나 문체가 아닌,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빨리, 얼마나 재미있게’ 쓰느냐가 척도였다.  
 
‘퍼나르기’ 식의 글이 다반사가 된 것도 상업화와 관련된다. 저술가들과 저널리스트들은 이미 출간된 텍스트에서 광범위하게 아이디어와 문구를 차용했다. 잡지와 신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상황에서 일단 ‘빨리’, 그리고 ‘많이’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편집자는 이른바 ‘재탕’을 권장하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잘라낸 글들이 마구 섞였고 그러는 와중에 적지 않은  ‘가짜 뉴스’가 탄생했다. 익명의 어느 저널리스트는 “거짓말이 판을 친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파렴치한 왜곡이 판을 친다. 거짓이 체계적으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며 개탄했다.  
 
인간의 통속성을 고도의 문학성으로 풀다
저널리즘의 호황을 가장 철저하게 이용한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였다. 그는 거의 동물적인 ‘촉각’으로 시대의 조류를 읽었고 재빨리 저널리즘의 등에 올라탔다. 잡지사를 열었고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잡지에 칼럼과 소설을 연재했다. 그는 또한 열광적인 신문 구독자였다. 신문은 그에게 세상을 읽고 인간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창구였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신문을 읽었고 신문과 호흡을 맞춰가며, 신문 구독자의 입맛을 고려하여, 소설을 썼다. 러시아 사회의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모조리 소설의 재료가 되었다.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저널리즘의 소비자였다.  
 
저널리즘은 10년 동안 러시아 역사의 흐름에서 소외되어있던 그에게 모든 면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영역이었다. 귀환 당시 그는 빈털터리에 부양해야할 가족이 둘이나 딸려 있었다. 언제까지나 형에게 신세를 질 수만도 없는 상황에서 생존 본능은 그의 눈을 잡지로 향하게 했다. 잡지는 한 마디로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형과 힘을 합쳐 잡지 ‘시간’을 창간했다. 미하일은 그동안 해왔던 담배 사업을 접고 빚까지 얻어 뛰어들었다. 1861년 1월에 창간호가 나왔다. 잡지는 ‘4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미하일은 재정부분을, 젊은 사상가 스트라호프와 유능한 문학 평론가 그리고리예프가 기고를 담당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것을 총괄했다. 스트라호프와 그리고리예프는 기꺼이 도스토옙스키의 멘토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도스토옙스키를 보좌하면서 작가의 지적 공백을 철학과 문학으로 메워주고 10년이나 뒤떨어진 ‘감’을 ‘업데이트’시켜주었다.  
 
‘시간’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잡지에 연재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상처받은 사람들』과 『죽음의 집의 기록』은 잡지의 평판을 단박에 상위권에 올려놓았다. 구독자 수 2500이 손익 분기점인데 ‘시간’의 구독자 수는 4000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2년 4개월 만에 폐간됐다. 1863년 일어난 폴란드 봉기에 관해 스트라호프가 쓴 사설이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뜻하지 않은 악재에도 굴하지 않고 ‘시대’라는 제목의 두 번째 잡지를 창간했다. 1864년 1월 창간호가 발행됐다. 그동안 다른 데로 가버린 구독자를 되찾기 위해 과거의 ‘시간’ 구독자에게는 할인 혜택을 주는 등 ‘마케팅’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시대’지 1864년 12월호 표지

‘시대’지 1864년 12월호 표지

 
그러나 허사였다. 1864년은 도스토옙스키에게 가장 잔인한 해였다. 4월에 부인 마리야가 눈을 감았다. 7월에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동업자인 형이 간질환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9월에는 잡지사의 문학적 기둥이었던 그리고리예프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연이은 상실로 도스토옙스키는 얼이 빠졌지만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형은 무려 2만5000 루블의 빚과 부양해야 할 가족을 동생에게 남기고 갔다. 형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그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잡지사 회생에 전력투구했다. “저는 돈과 건강과 활력 모두를 아낌없이 잡지에 쏟아 부었어요. 제가 유일한 편집자였어요. 저 혼자서 교정을 보고 저자를 섭외하고 검열관의 요구에 대응하고 모금을 했어요. 하루에 다섯 시간만 자며 새벽 6시까지 일했어요.” 그러나 1300명의 구독자로는 잡지사를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1865년 2월에 문을 닫았다.  
 
잡지사 경영이 도스토옙스키의 성장에 끼친 영향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다. 예술적 안목이 탁월했던 그리고리예프의 눈에 ‘시간’에 연재된 도스토옙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은 너무 통속적이었다. 그는 “미하일이 장삿속에서 동생의 재능을 썩게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리예프의 지적은 절반만 옳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통속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통속성이 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썩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천재는 통속성과 융합하여 지극히 멜로드라마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심오한, 극도로 독창적인 소설을 만들어냈다. 그의 목적은 인간을 그리는 것이었지 고결한 인간을 그리는 게 아니었다. 인간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통속적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그 통속적인 부분을 고도의 문학성으로 공략한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매 순간 ‘소식’을 만들어내는 신문의 역동성은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과 ‘화학적으로’결합했다. 덕분에 무상한 현실은 불변의 문학으로 응축되었다. 시사적인 모든 것은 초시간적인 것이 되었다. 저널리즘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유명한 예술론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이다.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해 본 적도 없고 존재할 수조차 없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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