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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인간을 위한 모닥불이죠"

‘달의 저편’ 연출한 세계적인 무대 예술가 로베르 르빠주
로베르 르빠주 ⓒJocelyn Michel

로베르 르빠주 ⓒJocelyn Michel

내한공연 포스터들

내한공연 포스터들

빨래방의 동그란 세탁기 창이 무한한 우주로 연결된다. 우주선의 문은 금붕어 한 마리가 노니는 어항이 되었다가 어느새 비행기 창문이 되고, 아이가 태어나는 자궁문이 되었다가 보름달로 변하기도 한다. 바닥에 드러누운 배우를 거울 하나만으로 우주로 보내버리는 무대언어의 마법사, 로베르 르빠주(Robert Lepage·61)의 대표작 ‘달의 저편’(5월 16~19일 LG아트센터)이 1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2000년 초연 이래 19년간 세계 50여개 도시를 돌며 공연되고 있는 세기의 걸작이다.  

 
캐나다 태생의 르빠주는 연극에 영상 테크놀로지를 결합해 연극의 개념을 뒤흔든 공연연출가이자 영화감독, 배우이자 극작가다. 2002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07년 공연예술계 최고 영예인 유럽연극상 등을 수상하며 캐나다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인 그는 로버트 윌슨에 비견되는 ‘이미지 연극의 대가’로 꼽히지만, 차가운 테크놀로지로 만들어내는 따뜻한 시와 같은 이미지들은 다른 차원의 감동을 준다. 중앙SUNDAY S매거진이 그를 e메일로 만나 그 마법의 비밀을 물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하기 전, 달은 지구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로베르 르빠주의 달도 ‘거울로서의 달’이다.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1957년부터 1975년 아폴로-소유즈 랑데부까지, 냉전시대 미·소 우주경쟁의 역사가 1999년 우주에 낭만을 품은 캐나다 문화철학자 필립과 냉철한 기상캐스터인 동생 앙드레의 갈등과 화해라는 개인사를 거울처럼 비춘다. 냉전시대와 세기말을 배경삼은 18년전 작품은 흥미롭게도 매우 현재적이다. 남북한 화해모드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지금, 한반도 상황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태어난 세대와 얘기해 보면 그들은 과거를 모르더군요. 사람들은 과거 자체를 잊거나 과거가 의미하는 바를 잊고, 체제 간 경쟁에 대한 의식 없이 살고 있어요. 물론 사회·경제 시스템이 변했고 미국과 러시아, 서양과 동양의 관계는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죠. 하지만 이 세계가 과거에 어떻게 분열되어 있었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는 것도 평화에 주어진 역할 아닐까요.”  
 
인간을 끌어안는 테크놀로지
세계적인 공연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의 대표작 ‘달의 저편’이 15년만에 내한 무대를 펼친다 ⓒDavid Leclerc

세계적인 공연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의 대표작 ‘달의 저편’이 15년만에 내한 무대를 펼친다 ⓒDavid Leclerc

르빠주는 흔히 멀티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이미지 연극의 대가로 불린다. 이런 스타일은 그의 출신에서 비롯됐다.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이 교차하는 캐나다 퀘벡 출신 예술가들은 문화적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변방이라는 자의식 탓에 늘 정체성이 화두였고, 르빠주의 선택은 미국과 프랑스의 텍스트를 배제한 멀티미디어 이미지 연극이었다.  
 
하지만 ‘멀티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키워드 삼는 그의 무대는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배우와 결합된 기술은 배우의 역할을 확장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무대 장치도 컴퓨터를 활용한 첨단 디지털 효과보다 움직이는 스크린, 거울 등을 영상과 결합한 아날로그 효과가 대부분이다. ‘달의 저편’의 마법같은 장면전환도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거울 달린 미닫이식 세트로 구현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기술에 문외한이에요. 단지 기술이 작품 안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게 할 뿐이죠.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어휘와 표현을 돕는 도구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늘 새 기술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죠. 애초부터 연극은 기술의 발전 덕에 존재했고, 기술은 항상 연극적 표현의 중심에 있습니다. 인간이 불을 이용하면서 그림자극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늦은 밤에도 모닥불을 피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잖아요. 새로운 기술이란 연극을 하기 위한 또 다른 모닥불일 뿐이에요.”
 
영화적 몽타주, 몽환적 미장센
기술은 르빠주의 연극에 영화적 미장센을 구현한다. 비스듬히 놓인 거대한 거울에 조명과 영상을 투영해 배우가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 공간에 둥둥 떠있는 듯한 놀라운 미장센을 창조한 ‘달의 저편’ 엔딩이 대표적이다. “‘연극(theatre)’이 아니라 ‘연극성(theatricality)’에 관심이 있다”는 그는 자신의 작업을 ‘연극성을 지닌 영화적 퍼포먼스’라고 규정했고, 실제로 ‘달의 저편’은 영화화(2003)되기도 했다.  
 
그런데 무대 위 영화적 몽타주가 빚어내는 몽환적 분위기에 젖다 보면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른다. 공연 내내 어딘가에서 다양한 시공간의 이미지를 하나로 엮어내는 원의 존재는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다. 동그란 세탁기 문을 통해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리면, 관객도 배우를 따라 환영 속을 유영한다. 르빠주에게 “당신의 무대는 내면을 거울처럼 비추는 환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하루키의 판타지 월드처럼 보인다”고 하니 “사실 나는 하루키 문학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긍정했다.  
달의 저편 ⓒDavid Leclerc

달의 저편 ⓒDavid Leclerc

 
흥미롭게도 이런 시적인 아름다움은 과학자의 실험실 같은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과학과 시라는 상반된 두 가지가 어떻게 만나는 걸까. “과학에 이미 아름다운 시가 있다”는 게 그의 답이다. “사람들은 위대한 과학자나 발명가가 사실 매우 예술적인 범주 안의 사람들이란 걸 잊곤 하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공동 연구자들에게 보여줬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그 가설의 증명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 가설 자체로 아름다웠으니까. 나는 수학이나 과학적 공식에 미적인 것이 있고, 예술가도 과학적 발견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학적 발견이란 어떤 의미를 이해하는 행위이고, 예술가는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하니까. 과학자와 예술가가 다른 점은 예술은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뿐이죠.”  
바늘과 아편 ⓒNicola-Frank Vachon

바늘과 아편 ⓒNicola-Frank Vachon

 
텍스트와 이미지의 대등한 관계
전통적 연극의 텍스트 재현에서 벗어나 퍼포먼스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르빠주 스타일은 1970년대 이미지 연극을 창시한 로버트 윌슨과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그만의 특별함은 내러티브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바탕에 깔린 서사를 멀티미디어 기술로 이미지화시켜 텍스트와 이미지가 대등한 관계를 이룬다. 파편화된 시청각적 이미지들을 콜라주하는 윌슨의 포스트드라마에 비해 그의 작품은 따라갈 이야기가 있으니 보다 관객 친화적인 셈이다.  
바늘과 아편 ⓒNicola-Frank Vachon

바늘과 아편 ⓒNicola-Frank Vachon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고독한 모노드라마다. “공동 창작을 많이 하다보니 때로 개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느낀다”는 그는 “일인극에선 공동 창작에서 드러나지 않던 아이디어가 번쩍 하는 순간이 있다. 공동 창작과 혼자 일하는 것 사이의 균형잡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항상 자전적이고,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과 시공을 초월해 소통한다. ‘바늘과 아편’(2015년 내한)에선 1989년의 캐나다 배우 로베르가 1949년의 프랑스 영화감독 장 콕토와 미국 재즈 뮤지션 마일즈 데이비스와 교신한다. ‘안데르센 프로젝트’(2007년 내한)도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은 퀘백의 록음악 작사가와 안데르센의 외로운 내면을 조우시킨다. ‘달의 저편’과 최신작 ‘887’도 유년의 기억이라는 소우주를 냉전시대나 캐나다 지역·계층간 갈등의 역사라는 대우주와 교차시킨다. 커다란 역사와 평범한 개인의 일상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것이다.  
 
안데르센 프로젝트 ⓒEm valette

안데르센 프로젝트 ⓒEm valette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 같은 큰 주제로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감동을 주려면 일상이라는 문을 통하거나 직접 관계가 있는 매개체를 사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달의 저편’에서도 문제적 일상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겪는 일들은 매우 사소하지만 사람들은 곧 이것이 상징하는 바를 깨닫게 됩니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그림을 보게 되는 거죠.”  
 
갈등과 대립에서 화해와 성장으로
그래서 그의 무대엔 독특한 차원의 감동이 있다. 고독한 자아는 홀로 있음으로 관객과 교감의 통로를 확보한다. 르빠주의 말대로 관객들은 이 작고 평범한 소우주를 매개로 대우주를 만난다. 내적 갈등을 품고 있던 개인이 스스로와 화해하고 성장하는 서사는 하루키 소설처럼 다른 차원의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유년시절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의 경계인 퀘백에서 문화적 혼란을 경험한 르빠주는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과 경계의 해체에 관심이 많고, 그런 열린 태도가 특유의 연극적 스타일로 나타난 것이다.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면서 드러나는 여백의 미와 정갈하고 절제된 무대미학은 다른 문화에 대한 포용력을 보여준다. ‘달의 저편’이 장면 전환에 미닫이식 장치를 이용하거나 사실적인 세트 없이 상징적 오브제만 사용해 무대를 사유의 공간으로 만든 것도 매우 동양적인 접근이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안데르센 프로젝트 ⓒEm valette

안데르센 프로젝트 ⓒEm valette

 
“나는 하루키도 좋아하지만 그보다 일본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간접적으로 중국과 한국에도 영향을 받았죠. 90년대 초 처음 일본에 갔을 때 가장 놀란 건 연극에 대해 매우 전통적인 접근을 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방식으로 기존의 엄격한 규칙들을 재창조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강력한 전통적 규율들이 새로움을 갈망하며 스스로 거듭나고 있는 것 같았죠. 전통을 지키면서 미래적 비전을 품는다는 모순되면서도 자유로운 창작 방향은 나같은 서양 예술가들이 아직 풀지 못한 미스터리입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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