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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실수였다" 히틀러에 온 유럽 전전긍긍한 사정

기자
남도현 사진 남도현
Focus 인사이드 
 
재군비를 선언하고 본격적인 대외 팽창을 준비하던 히틀러는 독일의 영토지만 제1차 대전 후 비무장지대로 설정 된 라인란트에 군대를 주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독일에게 패전국의 멍에를 씌우는데 앞장 선 연합국에 대한 복수심이 누구보다도 컸던 군부가 정작 반대하고 나섰다. 재무장한 지 1년 밖에 안 된 독일이 영국, 프랑스 연합국과 일전을 벌인다면 승산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라인란트에 진주하기 위해 강을 건너는 독일군. 당시 연합국은 응징할 힘이 있었으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독일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결국 이는 제2차 대전의 씨앗이 되었다. [사진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Berlin]

라인란트에 진주하기 위해 강을 건너는 독일군. 당시 연합국은 응징할 힘이 있었으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독일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결국 이는 제2차 대전의 씨앗이 되었다. [사진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Berlin]

 
결국 당시까지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히틀러는 만일 프랑스가 반격에 나선다면 즉각 후퇴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군부의 수장인 전쟁성(국방부)장관 블룸베르크의 동의를 얻어냈다. 1936년 3월 7일, 마침내 작전이 개시되었지만 뜬 눈으로 밤을 샜을 만큼 히틀러도 몹시 몸을 사렸다. 유사시 퇴각이 가능하도록 동원된 3만 7000여 명 중 강을 건너 라인란트로 진군한 병력은 1만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연합국은 군사적으로 독일을 응징할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해협 건너에 있던 영국은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니 프랑스 보고 알아서 하라며 일찌감치 발을 뺐다. 지난 전쟁에서 엄청난 참화를 겪었던 프랑스는 굴욕적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는 염전사상에 빠져 그냥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는 ‘어차피 그곳은 독일 땅이다’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들의 소심함을 에둘러 변호했다.
 
뮌헵협정 조인 직후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왼쪽부터) [사진 중앙포토]

뮌헵협정 조인 직후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왼쪽부터) [사진 중앙포토]

 
당대 최강의 육군 강국이던 프랑스와 역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영국이 보여준 이러한 유약함은 히틀러의 자신감을 증폭시켜 주었다. 만일 이때 연합국이 군을 동원하는 시늉만이라도 했으면 독일은 즉각 후퇴했을 것이고, 인류사 최대의 비극인 제2차 대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는 몇 번 더 있었지만 연합국은 계속 같은 식으로 실기했다.
 
라인란트 점령으로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를 강제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외견상으로는 정치 외교적으로 평화롭게 양국이 통합한 것 같지만 독일군이 신속히 진군했던 사실에서 보듯이 침략과 다름없었다. 바로 그때 프랑스와 영국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행위이므로 우리가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뮌헨 회담에서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는데 동의하고 귀국한 네빌 챔벌레인. 그는 평화를 지켰다고 자신만만해 했지만 불과 1년 후에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사진 wikipedia.org]

뮌헨 회담에서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는데 동의하고 귀국한 네빌 챔벌레인. 그는 평화를 지켰다고 자신만만해 했지만 불과 1년 후에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사진 wikipedia.org]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소멸을 지켜 본 세계는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그해 9월, 게르만족 보호를 명분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요구한 독일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었다.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에서 남의 땅을 히틀러에게 떼어주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귀국한 영국 수상 챔벌레인은 협정문을 들고 세계를 향해 외쳤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다”
 
시내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파리 시민.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하다가 결국 프랑스는 패망했다. [사진 US National Archives]

시내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파리 시민.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하다가 결국 프랑스는 패망했다. [사진 US National Archives]

 
1년 후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그때서야 영국과 프랑스는 동원령을 내리고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는 국경에 배치 된 11개 사단을 독일의 자르로 진격시켰고 영국은 원정군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하지만 전쟁을 할 생각은 전혀 없던 연합국은 9월 17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즉시 병력을 자르에서 철수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는 망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침략당한 것은 아니니까’
 
폴란드가 사라진 후에도 독일이 평화 공세를 계속하자 연합국은 착각했다. 국경지대에서 훈련 중 오발 사고가 나면 엄연히 전쟁을 선포한 상대에게 ‘미안하다. 방금 전의 포탄은 실수였다.라고 사과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940년 6월이 되었을 때 독일의 침략에 일방적으로 밀린 프랑스는 파리를 무방비 도시로 선포하고 항복했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핑계를 대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아름다운 파리의 파괴를 막지 않았나’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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