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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곡기 끊고 홀가분하게 떠난 아버지의 소중한 유산

기자
송미옥 사진 송미옥
[더,오래] 송미옥 살다보면(7)
아버지는 늘 양복 차림으로 다니셨는데 언젠가 한복을 입고 있으셔서 "할아버지 같으니 그 옷 입지 말아라"며 울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가 60세 전후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송미옥]

아버지는 늘 양복 차림으로 다니셨는데 언젠가 한복을 입고 있으셔서 "할아버지 같으니 그 옷 입지 말아라"며 울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가 60세 전후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송미옥]

 
아버지, 어느새 5월이 되어 봄꽃이 흐드러지게 폈습니다. 내일이면 어버이날입니다. 가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다니시는 아버지를 닮은 어르신들 모습을 보겠네요.
 
5월이 되면 작은집 옥상에 온갖 식물을 심어 놓고 물을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랑만 있으면 반은 살아갈 힘이 된다고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
 
아침에 나가서 여기저기 밭을 들러보며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무술년 개띠인 저는 올해 61세로 회갑 년이 됐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며 ‘내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며 아버지를 불러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동생과 내가 중학생 시절이었을 무렵 엄마 기일을 맞아 산소에 가는 중이었지요. 길 한쪽은 공사 중이었는데, 할아버지(지금 생각하면 50~60대) 한 분이 큰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비 오는 듯한 땀을 연신 훔치고 있었지요. 몇 분이 그 일을 하면서 모두 헉헉거려 숨소리조차 안타까울 정도로 불쌍해 보였습니다. 우리 자매는 “아버지~ 저분들 너무 불쌍해요” 하며 엉엉 울면서 걸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우습네요.


“사람이 가장 불쌍할 때는 할 일이 없는 것”
요즘엔 회갑잔치를 안 하지만 1989년 아버지 회갑 날 식당을 빌려 큰 잔치를 했다. 집에서 이모님 내외와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송미옥]

요즘엔 회갑잔치를 안 하지만 1989년 아버지 회갑 날 식당을 빌려 큰 잔치를 했다. 집에서 이모님 내외와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송미옥]

 
아버지는 우리 자매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잠시 그늘진 곳에서 쉬게 되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사람이 가장 불쌍할 때는 일할 수 있는데 할 일이 없는 것이란다. 땀을 흘린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가 있다는 증거야.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단다. 살아가기 위해선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든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고 신이 주신 선물이야. 
 
물론 부자 부모 밑에 태어난 사람은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노동이 없이는 삶의 보람이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인조인간이 되는 거야. 사람의 감성이나 지성, 이성이 모두 어우러져 사람 꼴을 하려면 그중에 노동이 한몫한단다.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일이 주어졌을 때 최고의 장인이 되도록 노력하다 보면 삶을 순조롭게 잘 살 수 있단다. 
 
아버지가 가난해 너희를 대학까지 공부시킬 능력이 안 돼 미안하지만 대학공부란 스스로 꼭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것이니 하고 싶은 일을 마음에 담아 뒀다가 시간을 쪼개 야간 대학이라도 입학해 깊이 배우고 성취하면 좋겠구나.”
 
60평생을 살면서 참 많은 일이 파도같이 밀려오고 밀려가곤 했지만 힘들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제게는 큰 힘이 돼 닥치는 대로 주어진 대로 열심히 일하고 살아왔네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이런저런 일을 넘기며 저는 이제 할머니가 됐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고 든든해 하던 사위도 간암으로 몇 년 전 아버지 곁으로 갔는데 만났으리라 믿습니다. 죽기 전에 “장인어른이 손을 내밀어 데려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거든요.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 두 분이 여행가신 사진이다. 지금 생각하면 시집와서 애 셋을 키우신 울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어 목이 멘다. [사진 송미옥]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 두 분이 여행가신 사진이다. 지금 생각하면 시집와서 애 셋을 키우신 울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어 목이 멘다. [사진 송미옥]

 
아버지한테 감동을 받은 두 번째 일화는 죽음입니다. 아버지는 노후에 성당에서 연령회 회장을 지내시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 상을 당했을 때 몸소 가서 염을 해드리고 제상을 차려주셨지요. 아버지를 아는 모든 분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고마워했습니다. 그의 자식이란 이유로 사랑으로 대해 주던 많은 분이 생각납니다.
 
부모는 모름지기 부모다워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시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바른 생활을 묵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할 때도 내 부모에게 욕이 되지 않을까 하며 조심하게 되고 화가 나도 숨을 고른 후 마음을 진정시키는 훈련도 된 것 같습니다.
 
새엄마가 위암으로 먼저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남동생 부부랑 10년을 더 사셨지요. 무엇보다 고마운 동생의 처는 어린 시절 조부모와 함께 살아온 생활이 몸에 배어 아버지 모시기를 큰 불평 없이 해와, 이에 존경을 보냅니다.
 
어느 날 제가 친정에 가니 아버지가 누워 계셨습니다. 생전에 아버지가 누워 계신 것을 본 적이 없는 제가 놀라서 물으니 감기 기운이 있어서 쉬는 중이라고 하셨지요. 동생이 몇 번이나 병원을 가보라고 했지만 귀찮아하신다기에 일으켜 세워 부축해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졸도하셨지요. 너무 놀라 의사를 만나니 급성 심근경색이 왔고 병원에 도착해 긴장을 풀어 쓰러진 거라며 응급치료가 시작됐습니다. 너무너무 속이 상해 동생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동안 잘 모신 보람도 없이 이렇게 되니 동생네도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마는 그땐 그랬답니다.
 
그날 저녁 정신이 드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식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이제껏 잘 살아왔고 많이 산 것 같다. 이제 때가 됐으니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내고 떠날 테니 그리 알아라. 종부 성사를 신청해 마지막 고해성사를 보게 해다오” 하셨습니다. 자식 하나하나 손을 잡고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씀과 앞으로 잘 살라는 격려를 일일이 해주셨지요.
 
여동생이 6년 만인 1990년 첫딸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손녀와 찍은 사진은 이 한장뿐이다. 기다리면 선물이 올 거라며 동생을 위로해 주시던 아버지. 첫 손녀를 안고 얼마나 기쁘셨을까. [사진 송미옥]

여동생이 6년 만인 1990년 첫딸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손녀와 찍은 사진은 이 한장뿐이다. 기다리면 선물이 올 거라며 동생을 위로해 주시던 아버지. 첫 손녀를 안고 얼마나 기쁘셨을까. [사진 송미옥]

 
그리고 마지막 말씀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행여나 이웃을 돌보다 혼자 사는 노인이 아파 누웠거든 병원에 가보라는 말 대신 모시고 가주면 좋을 거 같구나”라고요. 우리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습니다. 나이 들면 어른은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아파도 참곤 합니다. ‘죽는 것이 아픈 것보다 덜 힘들다’는 표현이 살아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날 우리는 애써 웃으며 “아버지 아픈 와중에 그런 농담이 나오시나요? 제발 장난치지 마세요. 무섭단 말이에요”라고 했지만 울면서 아버지를 꼭 안으며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답니다.


병원 처방 거부하고 일주일 만에 하늘나라로
아버지는 당신의 힘으로 대소변을 못 가리고 기저귀를 차야 하는 모멸감과 며느리에게 그 모든 것을 부담 지우는 남은 생이 용납되지 않으셨지요. 늘 사람 모습으로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라며 성실하게 살았으니 수호 천사가 때가 되면 데리러 올 것이라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당신은 스스로 곡기를 끊고 모든 병원 처방을 거부하고 일주일 만에 7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서 그러더군요. 삶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스스로 갈 때를 알아 몸과 마음을 정리하고 평안한 모습으로 떠나는 삶이라고요. 자식도 부인도 긴 병치레에 지쳐 외면하고 간병인의 보살핌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주렁주렁 호스를 달고 혼수상태로 살아있는 앞 침대의 어르신보다 어쩌면 아버지가 더 행복하게 가셨을 거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수많은 조문객을 보며 ‘사람은 살아있을 때 정말 잘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누고 홀가분하게 떠나신 아버지. 아버지가 남긴 많은 책은 유언대로 보육원의 도서관으로 보냈고 옷과 각종 물건은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는 엄마와 아버지의 반지와 목걸이 한 개씩, 그리고 아버지가 친히 써놓은 성경 구절 공책을 하나씩 나눠 유산으로 간직했답니다.


아버지처럼 봉사하는 삶 살 터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든 삶의 과정에서도 늘 희망과 용기로 기운 나게 해주셨던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 [일러스트=김회룡]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든 삶의 과정에서도 늘 희망과 용기로 기운 나게 해주셨던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 [일러스트=김회룡]

 
아버지, 저도 이제 60이 넘어 아버지와 같이 손자 손녀가 많이 생겼습니다. 저도 서서히 제 주변의 부질없는 욕심을 정리하며 최대한 가볍게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더 나이 들어서는 많은 만남과 친교보다는 나보다 환경이 안 좋은 사람과 홀로 사는 외로운 어르신을 만나며 아버지처럼 조용히 봉사하는 삶을 우선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저도 낯선 저쪽 세상에 가게 될 때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제게도 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평안하게 데려가 달라고 기도합니다.
 
명예와 부, 재산 아무것 하나 남겨 주신 것이 없지만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든 삶의 과정에서도 늘 희망과 용기로 기운 나게 해주셨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우리 형제가 모두 성실하게 사회에서 한몫하며 잘살게 된 것을 이번 기회에 더욱더 감사드리며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아버지를 떠올리며 ‘엄지 척’ 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2018년 5월에 큰딸 송미옥 올림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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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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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