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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증구포라고? 한 번 덖고 말린 차와 겨뤄보자”

 이택희의 맛따라기 - 초의 다맥 5세 법손 박동춘 이사장의 ‘동춘차’
4월 28일 전남 순천 대광차밭의 맏물 찻잎. 처음 따낸 찻잎이란 뜻이다. 대부분은 1창(槍) 2기(旗) (왼쪽 두 번째) 혹은 1창 1기(왼쪽 세 번째) 모양이다. 신인섭 기자

4월 28일 전남 순천 대광차밭의 맏물 찻잎. 처음 따낸 찻잎이란 뜻이다. 대부분은 1창(槍) 2기(旗) (왼쪽 두 번째) 혹은 1창 1기(왼쪽 세 번째) 모양이다. 신인섭 기자

첫 모금을 머금자 아찔했다. 향은 싱그럽고, 맛은 시원하면서 맑았다. 목으로 넘기고 나니 차를 설명하려 덤비는 속인의 분별심을 꾸짖는 듯했다. 아침에 따다가 오후에 고르고, 덖고(살청), 비비고(유념), 식혀, 말린(再乾) 올해 대광차밭 맏물 ‘동춘차(東春茶)’다. 동춘차는 초의차의 맥을 잇는다.
전남 순천의 대광차밭이 올해 맏물 차를 수확한 4월 28일 아랫동네 할머니들이 소정골 대숲 아래 차나무에서 새 순을 따고 있다. 신인섭 기자

전남 순천의 대광차밭이 올해 맏물 차를 수확한 4월 28일 아랫동네 할머니들이 소정골 대숲 아래 차나무에서 새 순을 따고 있다. 신인섭 기자

대광차밭은 전남 순천 주암호 서쪽 모후산 산록, 대광사 터 주변에 흩어져 있다. 계류를 따라 대숲 비탈 바위 틈에 야생 차나무들이 자란다. 박동춘(65) 사단법인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이사장이 32년 전부터 관리하면서 차를 연구하는 현장이다.  
 
박 이사장은 차를 만들 때 덖음과 재건은 한 번도 남에게 맡긴 적이 없다. 그래서 만든 사람 이름을 따 ‘동춘차’라 했다. 한 해 30g짜리 700여 통을 생산하지만 판매는 하지 않는다. 연구소를 후원하는 독지가들과 나누기만 한다.
 
맏물 차를 따던 지난달 27~28일 대광차밭에 머물며 제다(製茶)과정을 관찰하고 차를 시음했다. 찻잎으로 음식도 해 먹고 박 이사장과 두서없는 다담을 나누며 의견을 들었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38년 동안 몸으로 익히고 옛 기록을 뒤지면서 다진 자신감이 가득했다.
 
“일반에 보급된 제다 방법이나 탕법(우리는 방법)에 문제가 많다. 특히 구증구포(九蒸九曝: 아홉 번씩 찌고 말림)가 좋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차는 솥에 들어가는 횟수를 최소화하는 게 좋다. 나는 덖음-비비기-말리기 과정을 각각 한 번에 끝낸다. 더 나은 차가 있다면 현품을 내놓고 공개적으로 비교 검증할 것을 제안한다.”
박동춘 소장이 동춘차를 내리고 있다. 동춘차는 한 번 덖고 말려 차가 맑다. 신인섭 기자

박동춘 소장이 동춘차를 내리고 있다. 동춘차는 한 번 덖고 말려 차가 맑다. 신인섭 기자

차 만드는 과정
우선 찻잎을 고른다. 묵은 잎이나 티를 골라내고 줄기는 잘라 버린다. 덖을 때 잎만 익히면 줄기가 설익고, 줄기까지 익히면 잎은 타버리기 때문이다. 생찻잎에서는 화한 허브 향과 갓 찧은 쌀의 구수한 향이 올라왔다. 이렇게 역동적인 향은 야생 차에만 있다고 한다.
 
제다의 핵심 과정인 초벌덖음. 가마솥에서 맨손으로 한다. 신인섭 기자

제다의 핵심 과정인 초벌덖음. 가마솥에서 맨손으로 한다. 신인섭 기자

다음은 초벌덖음. 가장 어려운 과정이다. 새잎이 자기를 지키려고 품은 독성(독한 성질)을 중화해 사람이 먹어도 탈이 없게 다스린다. 차의 자질이 여기서 확립되고, 제다 성패의 70~80%가 판가름난다. 찻잎이 설익으면 마신 뒤 속이 냉하거나 쓰리고, 너무 익으면 차의 기세가 꺾인다.
 
가마솥 온도를 300도 안팎으로 높여 찻잎의 자체 수분으로 익힌다. 타지 않고 고르게 익는 게 중요하다. 솥 바닥 열기로 손이 아릴 정도면 온도가 맞다. 피부로 감지해야 하니 장갑을 안 낀다. 대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솔로 찻잎을 뒤젓는다. 한 번에 덖는 양은 600~620g, 시간은 4분 30초~5분이었다.
 
찻잎을 가마솥에 넣고 솥뚜껑을 15~20초씩 1~3회 여닫았다. 솥 안의 온도를 높이고 열이 고르게 퍼지도록 하는 조치다. 이후엔 솔로 찻잎을 저으면서 불 조절을 계속 지시한다. 찻잎 덖음이 고비를 넘기자 박 이사장 얼굴에 언뜻 법열 같은 화색이 지나갔다.  
 
가마솥 앞에 앉으니 오묘한 향기가 올라왔다. 생찻잎의 야성적인 향이 수굿해진 느낌이다. 박 이사장은 “초벌덖음의 중심작용은 거친 맛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덖은 차를 돗자리에 놓고 비비는 유념 과정. 찻잎 표면이 부서지면서 향과 맛이 우러난다. 신인섭 기자

덖은 차를 돗자리에 놓고 비비는 유념 과정. 찻잎 표면이 부서지면서 향과 맛이 우러난다. 신인섭 기자

덖은 찻잎을 비비는 과정은 유념(揉捻)이다. ‘동춘차’는 깊은 유념을 한다. 찻잎에서 거품이 나와 손가락 사이에 진액이 엉기도록 7~8분을 왕골 돗자리에 힘차게 비빈다. 수분 함량을 고르게 하고, 진액을 짜내 잎 표면에 도포되도록 하면서 잎의 조직을 적당히 파괴해 차 성분이 잘 우러나게 하는 작업이다. 깊은 유념을 하는 이유는 초의 다맥(茶脈)에서는 일탕법(한 번만 우림)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고온의 물에 빨리 우려 마신다. 진액이 찻잎 표면에 묻어 있어야 빠르게 우려도 오미(五味)가 잘 우러난다.
 
유념을 마치면 갈대 발에 한지를 깔고 뭉친 찻잎을 풀어헤친 다음 한지를 덮어 두어 시간 바람을 쐰다. 잎 밖으로 나온 차의 진액이 살짝 마르면서 표면에 엉기는 시간이다. 향을 맡아봤다. 누구나 금방 구별할 정도로 발마다 향이 달랐다. 찻잎은 딴 지역에 따라 나눠서 제다 과정을 진행한다. 한 골짜기 차나무라도 자란 위치에 따라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차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생육환경이라고 한다.
 
바람을 쐰 찻잎은 다시 가마솥에 넣고 말린다(再乾). 수분을 날리면서 향과 맛이 잎에 수렴하도록 갈무리하는 과정이다. 너무 뜨거우면 잎에 코팅된 진액이 타기 때문에 80~100도에서 대나무 솔로 저어주면서 25~30분 서서히 말린다.
차는 말리기를 마치면 따뜻한 온돌방에서 하룻밤을 재운다. 이 과정까지 거친 올해 첫 차를 박동춘 이사장이 갈무리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차는 말리기를 마치면 따뜻한 온돌방에서 하룻밤을 재운다. 이 과정까지 거친 올해 첫 차를 박동춘 이사장이 갈무리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15분쯤 지나자 솥에서 화한 향이 피어올랐다. 올라오는 향의 변화를 보고 온도가 맞는지 알아낸다. 향은 피어오르다가 가라앉기를 세 차례 반복했다. 연두색이던 찻잎은 시간이 흐를수록 짙푸르다가 검푸르게 되고, 나중엔 검은색에 가까워졌다. 재건이 끝난 차는 불 땐 온돌방에 한지를 깔고 고르게 펴서 하룻밤을 재우고 5~7일(길면 15일) 화기를 안정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한국 차의 문제점
생찻잎에서 티를 고르면서 제다 원리를 설명하는 박동춘 이사장. 신인섭 기자

생찻잎에서 티를 고르면서 제다 원리를 설명하는 박동춘 이사장. 신인섭 기자

박 이사장은 초의∼범해∼원응∼응송 스님으로 이어진 대흥사 초의 다맥의 5세손으로 꼽힌다. 선대는 모두 스님이지만 본인은 한학에 기반을 둔 차 학자다. 1979년 8월 응송 스님이 소장한 불교자료 정리 임무를 맡으며 인연을 맺어 스님이 입적한 1990년까지 다각(茶角; 절에서 차 달이는 사람) 겸 유발상좌로 스님을 모셨다. 그때 다도전게(茶道傳偈)를 받음으로써 초의차의 맥을 독보적으로 승계했다. 그는 “우리 차의 문제가 뭔가, 우리 차는 왜 대중에게 외면당했는가”라는 물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다법과 탕법 모두 문제다. 제다의 정론이 확립되지 않아 방법론이 혼란스럽다. 초의 선사 제다의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확신한다. 제다를 잘못해 마시면 속이 냉하거나 배가 아픈데, 이게 차의 일반 특성으로 잘못 알려졌다. 여러 번 덖는다고 좋은 제다가 아니다. 오히려 차를 탁하고 저급하게 만든다. 점물성(點物性; 점염되는 성질) 강한 차를 화기에 자꾸 노출하면 좋을 리 없다. 구증구포 논란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9를 횟수로 해석하면 안 된다. 정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봐야 한다.”
 
유념할 때 멍석에 대고 비비는 것도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짚 냄새가 스며 차가 변질한다는 것이다. “차는 주변 냄새를 모두 빨아들이고, 한 번 오염되면 모든 효능이 상실된다. 영향이 가장 적은 소재가 왕골이다. 멍석에 비비는 건 차의 기본 이치를 모른다는 얘기다. 제다 현장에 멍석만 사라져도 한숨 돌리겠다.”
 
70~80도의 물에 1분~1분 30초 우리는 요즘 탕법도 옳지 않다고 했다. 초의 다류에서는 90도 이상으로 15~20초(25초 이내) 한 번만 우려 마신다.
 
박 이사장이 차를 말할 때 자주 쓰는 단어는 담결(淡潔)∙담박(淡泊)∙소쇄(瀟灑)∙기운(氣運)이다. 맛과 향은 맑으면서 시원하고, 힘이 있어야 좋은 차라는 말이다. 경쾌하고 고결한 향, 이뿌리에서 단 침이 나면서 길게 이어지는 맛, 마시면 배와 등이 따뜻해지는 기운이라는 설명도 한다. 그는 “차의 가장 중요한 효능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운이다. 맛과 향은 외형일 뿐”이라고 강조하며 말을 맺었다.
 
 찻입으로 만드는 파스타∙부침개∙나물
 찻잎은 고급 나물이다. 귀하고 비싸 나물로 쓰지 못할 뿐이다. 차밭에 온 김에 찻잎으로 음식 사치를 부려봤다. 먼저 차운동모임 ‘청년청담’ 김용재(33) 대표가 준비한 찻잎 아라비아타 파스타.
 
찻잎 아라비아타 파스타. 신인섭 기자

찻잎 아라비아타 파스타. 신인섭 기자

①파스타 면을 삶는다(13분). ②올리브오일에 양파를 볶다가 느타리, 데친 토마토를 다져 넣고 소금으로 밑간한다. ③아라비아타 소스와 데친 두릅 순을 넣은 뒤 유념한 찻잎을 넣고 볶다가 차 향이 올라오면 팬에 면을 넣고 버무린다. ④접시에 담고 생찻잎 몇 개를 고명으로 올린다.
 
갓 딴 찻잎으로 만든 찻잎전.찻잎이 씹히는 식감과 차 향기가 함께 쌉싸름한 맛이 살짝 돈다. 신인섭 기자

갓 딴 찻잎으로 만든 찻잎전.찻잎이 씹히는 식감과 차 향기가 함께 쌉싸름한 맛이 살짝 돈다. 신인섭 기자

시식한 9명은 모두 맛있다고 했다. 찻잎 향이 아라비아타 소스의 강한 맛에 밀리지 않았다. 내년에는 차 수확 철에 요리사 두어 명을 초치해 찻잎 음식을 시험해보려 한다. 찻잎 부침개, 소금∙참기름으로 무친 우린 찻잎 나물도 맛있었다. 우린 찻잎을 말렸다가 멸치볶음이나 생선조림에 넣으면 비린내는 없애면서 향이 배고, 장떡을 지져도 맛있다고 차밭 일하는 분들이 알려줬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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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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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