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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자본 휘젓고 다녀도 속수무책 국내 기업

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은 2일 투자자와 언론사를 상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과 투자자들이) 손해를 입었으므로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피해 배상을 받아내겠다”는 발표문을 냈다. 합병 부당성의 근거로는 “대한민국 법원이 (합병을 추진한) 삼성그룹 고위 임원, (국민연금을 통해 합병에 찬성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고 적시했다.
 
업계에서는 삼성·현대차 등 대한민국 1·2위 기업을 휘저으면서 자신감이 붙은 엘리엇이 정부로까지 전선을 확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엘리엇이 손해를 본 게 인정되면 한국 정부가 물어줘야 할 돈은 최대 3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엘리엇이 전방위로 공세를 강화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딱히 방어할 수단이 없어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헤지펀드는 기업의 장기적 가치나 미래 성장보다 단기적으로 주가를 띄운 뒤 차액을 챙겨 나가는 걸 목적으로 한다”며 “이들의 전략에 기업과 일반 투자자들까지 말려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특히 오너 중심 회사로 출발해 순환출자로 사업을 확대해 온 국내 대기업들은 지배구조 개선을 마무리 짓지 못한 곳이 많다. 엘리엇은 대기업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된 안이 나올 때마다 뛰어들어 반대급부를 요구하며 이윤을 챙겨가고 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갖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했는가 하면, 삼성전자에는 지주사 체제로 전환할 것과 30조원을 배당금으로 쓸 것을 주문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자사주를 9조원어치 소각했다. 엘리엇은 최근엔 현대차그룹에도 포문을 열고 지주사로 전환할 것과 순이익 50% 배당을 요구하고 나섰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가 각각 9600억원과 6000억원 어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한 것도 엘리엇의 공격과 무관치 않다.
 
경영계에서는 행동주의 헤지펀드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으로 기업을 키울 방어 수단으로 차등의결권 제도에 주목한다. 현행 상법은 주주평등의 원칙에 따라 1주당 1개의 의결권만 부여한다. 이를 고쳐 오너나 경영자에게는 주당 의결권을 많이 주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얘기다.
 
소액주주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기업이 많다. 구글이 창업주에게 1주당 10배의 의결권을 부여한 게 대표적이다. 페이스북의 래리 페이지는 지난 2004년 차등의결권을 도입하면서 주주들에게 “우리는 구글의 혁신 능력을 지킬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를 선택했다. 외부에서는 단기적 성과를 위해 장기적 성과를 희생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기적 성과를 희생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주주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우리는 그 길로 나아갈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구글·페이스북과 달리 차등의결권을 도입하지 않은 애플은 지난 2013년 헤지펀드 그린라이트캐피털로부터 “현금을 쌓아 놓고 배당을 적게 한다”는 이유로 130조원에 달하는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산업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내놓는다. 지배구조 개선에 쓸 돈이 있으면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는 데 써야 하는데 ‘재벌 개혁=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하는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성장에 집중해야 할 역량이 분산된다는 얘기다. 법무법인 테크앤로 구태언 변호사는 “지배구조 개선은 날짜를 정해놓고 ‘언제까지 완료하라’고 다그칠 일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해소할 과제”라며 “경영 기반이 취약한 국내 기업들이 외국 자본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할 규제와 풀어야 할 규제를 따지는 데서 산업정책이 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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