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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주목 '리비아 모델' 핵심은? '後보상'보다 '속도전'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선(先) 핵 폐기, 후(後) 보상’으로 불리는 리비아 방식이 다시 조명을 받으며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2003~2004년 리비아 모델에 대해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리비아의 프로그램은 (북한보다) 훨씬 더 작았다”면서도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는 걸 증명함으로써 그들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리비아의 사례가 이걸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미 그 논쟁은 지나간 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앞서 3월 30일에는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가 “리비아식 비핵화는 지금 북한에 적용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볼턴 보좌관이 자꾸 리비아를 얘기하는 것은 리비아 모델이 잘 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리비아와 핵 포기를 순조롭게 합의한 다음 밀고 당기는 것 없이 신속하게 사찰이 진행됐다.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한 톨의 의심 없이 확인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3~2004년 리비아 핵 사찰·검증 어떻게 
 
2004년 3월 10일 당시 엘라바데이 IAEA 사무총장(오른쪽)이 리비아와 NPT 부속 의정서에 서명한 내용을 설명하는 IAEA 웹사이트. 부속의정서를 통해 IAEA 사찰관에게 더 넓은 지역에 대한 접근과 더 큰 검증 권한이 부여됐다. [IAEA 웹사이트 캡처]

2004년 3월 10일 당시 엘라바데이 IAEA 사무총장(오른쪽)이 리비아와 NPT 부속 의정서에 서명한 내용을 설명하는 IAEA 웹사이트. 부속의정서를 통해 IAEA 사찰관에게 더 넓은 지역에 대한 접근과 더 큰 검증 권한이 부여됐다. [IAEA 웹사이트 캡처]

 
볼턴 보좌관이 강조하고 있는 2003~2004년 리비아 상황을 되짚어 보면 리비아의 완전한 핵 포기 선언 후 절차가 최종 완료될 때까지 1년 10개월(22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핵 협상의 일괄 타결과 빠른 사찰·검증이 핵심이었다. 
  
2003년 12월 19일 무하마드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는 현명한 결정과 용기 있는 조치를 취했다”며 “향후 이를 입증하기 위한 국제 사찰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리비아는 미국이 주도한 국제사회의 제재·압박에 따른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의 아프간 침공에 이은 이라크 전쟁 감행에 큰 위협을 느껴 WMD 포기를 선택했다. 
 
협상은 9개월간 극도의 보안 속에서 진행됐다. 2003년 3월 리비아는 영국 비밀정보국(MI6)을 통해 미국에 핵 포기 의사를 전달했고, 4월부터 미국과 리비아의 비밀 협상이 시작됐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그래픽=박경민 기자

 
카다피는 12월 핵 포기 선언 이후 2004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에 가입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도 받았다. 1단계 조치로 핵ㆍ미사일 프로그램 관련 주요 장비와 문서, 설계정보 등을 미국으로 보냈다. 2단계는 핵무기에 대한 IAEA 사찰과 폐기, WMD 관련 장비의 해체와 반출이 이뤄졌다. 3단계는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폐기였다. 
 
리비아의 단계적 조치에 맞춰 미국의 보상도 이어졌다. 1단계 조치 후 2004년 4월에는 경제 제재의 일부를 해제했고, 6월에는 리비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미국과의 외교관계 회복은 24년 만이었다. 9월에는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가 공식 해제됐다. 2005년 10월에는 리비아 내 핵 프로그램이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공식 발표했다. 2006년 5월에는 리비아 내 연락사무소가 대사관으로 승격했고, 다음 달에는 25년 만에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됐다. 
 
리비아 반군 대표인 과도국가위원회(NTC) 구성원들이 2011년 8월 수도 트리폴리에서 회의를 마친 뒤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 이날 반군은 무아마르 카다피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카다피 진영의 핵심 거점인 트리폴리의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를 장악했다.[AP=연합뉴스]

리비아 반군 대표인 과도국가위원회(NTC) 구성원들이 2011년 8월 수도 트리폴리에서 회의를 마친 뒤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 이날 반군은 무아마르 카다피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카다피 진영의 핵심 거점인 트리폴리의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를 장악했다.[AP=연합뉴스]

 
카다피는 2005년 1월 26일(한국시간) 반기문 당시 외교장관이 예방한 자리에서도 “북핵 문제는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라며 “북한과 이란도 리비아가 취한 핵 포기 조치를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핵 포기 선언 후 8년 만인 2011년 10월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미국이 지원한 반군에 의해 살해됐다. 이 때문에 북한에 리비아 모델은 ‘선 핵 폐기 후 정권 교체’ 모델로 각인돼, 리비아 모델 수용을 거부해왔다.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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