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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이 푼다]30년 중동전쟁 끝낸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1978년 9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중동평화 협상을 하고 있다.[지미 카터 도서관]

1978년 9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중동평화 협상을 하고 있다.[지미 카터 도서관]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북서쪽 약 100㎞, 해발 580m의 메릴랜드주 커톡틴산 정상 인근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샹그릴라라고 불렀던 대통령 별장이 있다. 오크ㆍ포플러ㆍ히커리ㆍ물푸레나무 숲이 울창한 캠프 데이비드다. 현재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손자 이름을 따 개명한 것. 
 
30년 전인 1978년 9월 이곳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당시 54세)은 30년간 네 번의 전쟁을 치른 중동의 숙적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60)과 이스라엘 메나헴 베긴 총리와 13일간 중동평화 협상을 했다. 결국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수천년 역사·종교 전쟁을 종식하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끌어냈다.
 
미국 숲속 별장에 30년 중동 숙적 '무기한' 초대  
1978년 9월 5일 지미 카터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지미 카터 도서관]

1978년 9월 5일 지미 카터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지미 카터 도서관]

치밀하게 준비한 회담이었지만 출발선의 두 나라는 서로를 향한 증오가 너무 컸다. 증오의 시작은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팔레스타인은 1300여년 동안 아랍인의 땅이었다. 이곳에 독일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탈출한 60만명의 유대인이 정착했다. 
이스라엘 건국 영웅 다비드 벤구리온이 영국 식민 정부를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하자 이웃 아랍 3국 이집트ㆍ요르단ㆍ시리아가 침공했다. 이스라엘은 1차 중동전쟁(독립전쟁) 승리로 독립을 확정지었지만, 팔레스타인의 분리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1952년 이집트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가말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이번엔 이스라엘이 영국ㆍ프랑스와 함께 침공했다(2차 중동전). 1967년 6월엔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이집트ㆍ요르단ㆍ시리아를 선제공격해 3국 공군을 궤멸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3차 중동전). 6일 만에 시리아 골란고원, 요르단의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포함한 시나이반도를 점령한 것이다.
 
충격에 빠진 나세르가 1970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권력은 사관학교부터 친구이자 부통령인 사다트에게 넘어갔다. 그는 소련의 지원으로 범아랍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밀어붙인 나세르와 달랐다. 민족주의자였지만 유연한 현실주의자였고 자유분방했다. 청년 장교 시절 배우가 되려 군을 뛰쳐나오기도 했고 영화를 보느라 나세르의 쿠데타에 참여기회를 놓칠 뻔하기도 했다. 
 
당시 이집트는 수에즈운하 수입이 끊기며 국가 재정도 붕괴 직전이었다. 미국 원조를 노리고 소련 군사고문단을 추방하는 등 친미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스라엘에 점령지 반환을 제안했다가 거부당하자 73년 10월 6일 유대교 최대 명절 속죄일(욤키푸르)에 수에즈운하 탈환을 감행했다.(4차 중동전) 
자칫 미ㆍ소 핵전쟁으로 비화할까 우려한 미국의 중재로 수에즈운하를 돌려받는 데 성공한 사다트는 77년 아랍연맹의 반대에도 독자적으로 대이스라엘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간 양자 회담 모습. 카터 대통령은 사다트 대통령을 재임 기간 가장 친한 외국 정상으로 꼽았다.[지미 카터 도서관]

캠프 데이비드에서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간 양자 회담 모습. 카터 대통령은 사다트 대통령을 재임 기간 가장 친한 외국 정상으로 꼽았다.[지미 카터 도서관]

 
청년시절 대영 저항운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베긴은 사다트와 성격이 정반대였다. 폴란드 유대인으로 바르샤바대학 법대를 졸업한 베긴은 급진파 시온주의(유대국가 건설)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2차대전 중 부모ㆍ형제, 조카들을 학살에 잃자 급진 군사조직을 이끌며 유대인국가를 위협하는 모든 대상에 비타협적 투쟁을 벌였다. 1946년 영국 식민지 청사인 예루살렘 킹데이비드 호텔에 폭탄을 테러해 91명을 숨지게 했다. 벤구리온마저 “베긴은 이스라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파시스트 운동 지도자”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베긴은 현실정치를 알았다. 건국이후 극우정당 지도자였던 아리엘 샤론과 힘을 합쳐 중도우파 리쿠드당을 만들며 집권을 도모했다. 베긴은 77년 총선 압승으로 노동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총리에 올랐다. 서안과 가자지구를 고대 성지로 불러온 베긴은 사다트의 평화공세에 점령지를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카터가 중동 문제에 뛰어든 건 이상주의자일 뿐 아니라 독실한 침례교도였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에게 이스라엘은 모국과 같은 성지였다. 73년 조지아 주지사로 현지를 방문한 그는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흑인 민권운동을 보는 듯한 감동도 받았다. 
 
카터는 77년 1월 취임 직후 중동 평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다트가 같은 해 11월 텔아비브를 전격 방문해 시나이반도 철수와 팔레스타인 독립을 통한 영구 평화를 제안하면서 기회가 왔다. 사다트(77년 4월)-베긴(〃7월)-사다트(78년 2월)-베긴(〃3월)과 네 차례 연쇄 회담을 한 후 3자 평화회담 구상을 굳혔다. 포연 자욱한 사막을 벗어나 고요한 숲속에서 평화를 이루길 바라며 캠프 데이비드로 '무기한' 초청장을 전달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처럼 중간선거를 앞두고 70%대 지지율이 38%로 떨어진 카터에겐 미국의 위신과 영향력을 총동원한 정치적 도박이었다.
 
사다트-베긴 극단 충돌로 카터 중재안 협상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왼쪽 두번째)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각료들과 함께 양자 회담을 하는 모습.[지미 카터 도서관]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왼쪽 두번째)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각료들과 함께 양자 회담을 하는 모습.[지미 카터 도서관]

성공의 관건은 회담장에서 서로를 불신하는 두 정상의 성격차를 활용해 타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은 두꺼운 협상시나리오와 함께 심리 분석 보고서를 마련했다.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스타일의 정치적 권모술수의 달인이다. 베긴은 비밀스럽고, 급격한 변화를 경계하며 전술과 디테일에 집착하는 반면 사다트는 때때로 극적인 제스처를 보이며 매스컴의 관심에 민감하며 큰 전략을 추구한다. 베긴과는 단어 정의 같은 논쟁은 피해야 하며 사다트에겐 논의 방향과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
 
실제 9월 5일 캠프 데이비드에 나타난 베긴은 카터가 사다트와 짜고 자신을 압박할 것이라고 의심하며 처음부터 방어적이었다. 베긴의 목표는 시나이반도의 단계적 철수로 양자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반면 사다트는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포함한 원대한 그림을 그렸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8년 9월 10일 회담이 난관에 부딪히자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게티스버그 남북전쟁 유적지로 이끌었다. [지미 카터 도서관]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8년 9월 10일 회담이 난관에 부딪히자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게티스버그 남북전쟁 유적지로 이끌었다. [지미 카터 도서관]

협상 초반 난관을 만든 건 사다트였다. 둘째 날인 6일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포함 3차 중동전 점령지 전면 철수와 정착촌 철거,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과 전쟁 피해 보상까지 요구하면서였다. 
 
베긴이 “패전국이 어떻게 승전국처럼 이런 요구를 하느냐”며 일축하자 사다트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점령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두 사람이 서로 고함을 치며 결렬 상황으로 치닫자 카터가 “중재안을 내겠다”고 나서야 했다. 
 
카터는 8일부터 서로 말도 않는 베긴과 사다트를 따로 만나 중재안을 다듬는 ‘셔틀외교’에 들어갔다. 협상이 정체되자 숲속 별장을 두고 “영국 감옥같다 ”(사다트), “독일 강제수용소”(이스라엘)란 불평들이 터져 나왔다. 10일 두 정상과 대표단을 이끌고 게티즈버그 남북전쟁 유적지를 방문해 당시 남부군이 겪었던 참상을 직접 설명했다. 무장투쟁을 이끈 두 정상의 공감을 끌어내려고 의도된 이벤트였다. 카터는 67년 전쟁에 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242호)대로 점령지역을 반환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대신 베긴이 성지로 여기는 예루살렘과 서안ㆍ가자지구는 뺐다.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도중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 국가안보보좌관과 체스를 두는 모습.[지미 카터 도서관]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도중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 국가안보보좌관과 체스를 두는 모습.[지미 카터 도서관]

끝까지 서명 거부한 베긴의 승리 
하지만 이번엔 베긴이 걸림돌이었다. “안보리 결의안은 아예 중재안에서 삭제하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브레진스키 보좌관에게 “(점령지역 내) 이스라엘 정착촌을 하나라도 없애는 건 내 수족을 자르는 것”이라며 완강했다. 카터는 유엔 결의안마저 거부하는 베긴을 뒤에서 “사이코”라고 불렀다. 사다트 쪽도 “동예루살렘과 서안ㆍ가자지구 해결 없이 아랍은 수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중재안이 무산되자 카터는 세부 분야별 실무급 협상을 시도했다. 이스라엘 대표단 중베긴 총리가 가장 강경파였기 때문에 보다 온건한 각료로 협상 상대를 바꾸는 전략이었다. 또 시나이반도 중심의 양국 평화조약과 중동평화 구상을 분리해 합의를 쉽게 만들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열흘째 14일 미국이 중재하고 아론 바라크 이스라엘 법무장관과 우사마 엘 바즈 이집트 차관이 실무 협상을 벌인 끝에 두 개 합의문 초안을 만들어냈다.  
 
베긴은 이번에도 시나이반도의 정착촌 철거는 안 된다며 버텼다. 사다트도 “이스라엘은 어떤 합의도 할 생각이 없다”며 떠나려 하자 “당신이 떠나면 내 대통령직도 끝나겠지만, 미국과 이집트 관계도 끝장”이라며 배수진을 쳤다. 카터 역시 국내 일정상 협상을 끌 수 없는 처지에 몰려 "17일 끝내자"는 최후 통첩과 함께 베긴을 상대로 우회 설득 전략을 썼다. 리쿠드당 실력자 아리엘 샤론을 압박하고 시나이반도 철수 대가로 미국이 30억 달러를 들여 비행장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17일 일요일 밤 10시에야 세 정상은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역사적인 협정에 서명할 수 있었다. 
 
미완의 협정, 절반의 이행
1978년 9월 17일 13일간 협상끝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중동평화 협정에 서명했다.[지미카터 도서관]

1978년 9월 17일 13일간 협상끝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중동평화 협정에 서명했다.[지미카터 도서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중동 평화를 위한 기본 합의’와 ‘이집트ㆍ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위한 기본 합의’ 2개 부속 합의로 나뉘었다. 각각 “서안 및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5년 내 완전한 자치를 보장한다”와 “이스라엘군 및 4500명 정착민의 시나이반도 철수와 관계 정상화”가 골자였다. 평화조약 조건으로 이스라엘은 매년 30억 달러, 이집트는 매년 15억 달러의 미국의 군사지원 등 원조까지 챙겼다. 사다트와 베긴은 한 달 후 노벨평화상을 나란히 받기도 했다. 캠프 데이비드는 한 번의 정상회담에서 역사적인 분쟁을 종식한 유례없는 사례였다. 평화조약 체결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전쟁은 더 이상 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테러조직으로 적대시하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자치정부 참여 보장이나 팔레스타인의 완전 독립과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ㆍ가자지구 영토 반환이 아예 누락된 점이었다. 또 시리아의 골란고원 반환 등 시나이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3차 중동전 이스라엘 점령지 원상회복도 빠져 아랍권 전체 반발을 샀다. 그나마 베긴은 카터의 종용 끝에 이듬해 3월 이집트와 평화조약은 공식 체결하고 두 달 뒤 시나이반도 철수를 이행했지만, 나머지 절반인 중동 평화 협정은 지키지 않았다. 자치정부 수립은 별도의 오슬로협정(93년)을 거쳐 베긴이 사망한 2년 후 94년에야 이뤄졌다. 
 
사다트 2년 후 급진파에 암살    
더 큰 비극은 회담의 주역인 사다트가 2년 뒤 81년 10월 6일 자신이 주도한 4차 중동전 승전 8주년 기념식 도중 암살당한 것이었다. 아랍이 국가로 인정 않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데 반발한 과격테러조직 ‘이슬람 지하드 ’소속 군인들의 소행이었다. 협상의 승자였던 베긴은 이듬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제거를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가 660여명의 사망자(레바논 1만 9000여명)를 내고 비난 여론끝에 사임했다. 이후 사망할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카터 역시 협정이행에 매달리던 사이 79년 1월 이란 혁명으로 같은해 444일간의 테헤란 미대사관 인질 사태가 벌어지며 재선에 참패했다. 
 
캠프 데이비드는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 카터가 아니었다면 회담 자체가 불가능했던 정상회담이었다. 선행한 실무 협상과 합의없이 현장에서 정상끼리 합의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결과적으로 너무 순진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처음 사다트와 베긴이 주도하는 협상의 조력자역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양쪽과 개별 협상을 통해 조문을 만들고 최종 사인을 받는 것까지 카터의 몫이 됐다. 악역을 한 베긴도 조인식에선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지미 카터 회담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며 “카터는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칭찬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부인인 로잘린과 베긴 총리 부인 엘리자.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 아이디어를 처음 낸 건 로잘린이었다.[지미 카터 도서관]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부인인 로잘린과 베긴 총리 부인 엘리자.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 아이디어를 처음 낸 건 로잘린이었다.[지미 카터 도서관]

 
중재자 카터 입장에선 캠프 데이비드의 격리된 협상이 협상 고비마다 창조적이고 다양한 대안을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서로 적대적인 두 정상에게도 장기간 고립은 합의 없인 빠져나갈 수 없다고 믿게 하는 강한 유인이 됐다. 다만 무기한 협상은 마지막 순간 카터를 쫓기게 만들었다. 애초 중동 평화 합의에 부정적이던 베긴이 끊임없이 시간을 끌 구실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사다트 역시 협상 실패의 책임을 온전히 이스라엘 탓으로 돌려야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밑질 게 없었다. 시한을 정한 뒤에야 카터의 압박도 효과를 발휘했다.
 
대니얼 드럭맨 조지메이슨대 명예교수(외교사)는 "미 정상회담사를 통틀어 캠프 데이비드처럼 분쟁을 종식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의 경우 비밀 접촉과 비공식 만남이 이어져야 효과적일 수 있고 막후 한국·중국·북한간 협의가 더해질 경우 긴장완화는 물론 핵전쟁의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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