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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살얼음판은 빨리 건너는 게 아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판문점을 배경으로 방영된 세기의 ‘평화 드라마’ 연출자는 임종석이었다. 그는 대통령비서실장과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라는 겸직 권한을 십분 활용했다. 4·27 무대를 물 흐르듯 끌고 가면서도 더블 주연인 두 정상으로 하여금 실제 이상으로 꽉 찬 존재감을 드러내게 했다. 가위 한반도 봄의 1등 공신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시 허를 찌르는 파격과 자연스러움, 유머와 비유로 세계인을 흥분과 감동에 몰아넣었다.
 
판문점 선언을 드라마가 아닌 적대 진영의 두 지도자가 만나 힘겨운 밀당 끝에 나온 협상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평가가 좀 달라진다. 필자가 보기에 2018년의 4·27 판문점 선언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서의 저 아래 쪽에 배치된 ‘완전한 비핵화’라는 용어. 선언은 완전한 비핵화에 그 범위와 일정, 방법 등 어떤 구체적인 설명도 달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 나온 2005년의 9·19 공동성명은 “북한은 모든 핵무기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와 현존하는 핵 계획 포기를 공약했다”고 적시했다. 구체성과 행동성, 주체성 면에서 판문점 선언은 13년 전 9·19 성명에 비해 한참 못 미친다. 그러니 비핵화 과거사에 밝은 일부 전문가 사이에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청와대는 비핵화 문제를 북·미 회담에 넘겼다는 식으로 손을 털고 있는데, 글쎄 자국의 운명을 그렇게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넘겨도 되는 일인가.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핵 담판 때 한국인의 안전을 미국과 같은 수준으로 다뤄줄지 회의적이다.
 
둘째, 판문점 선언은 “올해 종전 선언,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3자 혹은 4자회담(한·미·북·중)을 추진한다”고 했는데 노무현-김정일 회담 결과인 2007년의 10·4 공동선언을 거의 그대로 베꼈다. 김정은이 김정일보다 더 위험한 짓(핵무기 완성 선언)을 저질렀는데도 제시된 해법은 11년 전 과거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갔다. 창의성 부재다.
 
셋째, 판문점 선언은 “비무장지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중지하겠다”고 했는데 아군이 압도하는 심리전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겠다는 말이다. 비무장 지대의 남북 대치 현실은 김광석의 노래가 흐르는 영화 속 JSA(공동경비구역)가 아니다. 자해적인 일방 양보는 우리 젊은 군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디테일의 악마가 될 것이다.
 
임종석은 남북 두 정상과 트럼프 대통령의 3자 연쇄회동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칠 인물이다. 문재인-김정은의 판문점 대화록에서 그는 양측 배석자 4명 가운데 유일하게 발언 기록이 나올 만큼 상황을 기획하고 주도해 왔다. 임 실장은 우리 대통령 옆에 앉아 “살얼음판을 깨지 않고 건너려면 빨리 가는 수밖에 없다”고 속도를 강조했다. 기적처럼 찾아온 남북관계 발전의 여정에서 국내외 극우 세력에 방해할 시간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충정은 이해하지만 남북관계가 아무리 발전해도 북한 비핵화 문제가 불가역적으로 해소되지 않으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속도감에 쫓겨 비핵화를 어정쩡하게 내버려둔 채 남북관계에만 골몰하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보수·중도 세력이 등을 돌리면 그동안 쌓은 문 대통령의 통치력도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다. 혼자 모험심을 즐길 요량이 아니라면 원래 살얼음판은 빨리 건너는 게 아니다. 속도를 내려다 집단 희생을 당할 수 있다. 현명한 지도자는 살얼음판 앞에서 잠시 멈춘다. 널빤지라도 주워 모으면서 때를 기다린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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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