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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퍼스펙티브] 역사는 지리적 조건보다 인간이 바꾼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저술가인 로버트 캐플런은 『지리의 복수』(Revenge of Geography)라는 책에 판문점 취재 때의 인상을 이런 말로 남겼다.
 
“남북한의 경계선을 폭력이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분단국가들의 시나리오를 보면 20세기에는 분단이 아무리 오래 지속하였어도 궁극에 가서는 통합이 갑작스럽게, 때로는 폭력적으로, 빠르게 승리하는 것이 분명하다…비무장지대는 베를린 장벽처럼 지리적 타당성이 없는 자의적인 경계선이다.”
 
원론적으로 옳은 진단으로 들린다. 한반도 분단이 자의적임을 생각하면 캐플런의 말에 더욱 수긍이 간다. 그러나 영국 지리학자로 지정학의 아버지라는 해퍼드 매킨더(1861~1947)의 지리 결정론과 키신저의 역사 결정론 신봉자인 캐플런은 통합이 분단을 이기는 데 있어 분단국가가 처한 지리적 조건 못지않게 인간(human agency)의 능동적 작용이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세 지도자가 역사적 사건 만들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뉴욕타임스의 표현대로 지난주 판문점에서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이미 무엇이 가능한가에 관한 통념적인 생각(conventional wisdom)을 배격했다.”(4월 28일자) 김정은과 트럼프는 ‘상자 밖’ 생각을 한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들이 충동적인 성격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충동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생각의 담대·과감함에서는 김정은과 트럼프와 어깨를 나란히 겨룬다.
 
지난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는 화기에 넘치고, 형식은 파격적이며, 내용은 기대 이상으로 풍성했다. 남북관계 개선, 군사적 긴장 완화, 한반도 항구적 평화 구축의 3대 의제 모두에서 더러는 구체적이고 더러는 원칙적인 합의를 이루어 냈다.
 
개성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데 합의한 것은 상상과 기대를 훨씬 앞서간 성과다. 궁극적으로는 개성공단의 재개를 염두에 둔 조치지만 북한 땅에 한국의 연락사무소가 서는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인, 북한식 표현으로 ‘력사적인 사변’이다. 남북한 정부 관리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게 될 공동연락사무소는 24시간 쉬지 않고 순환하는 남북한의 신경망이다. 한국에는 사실상 주북한 총영사관이나 대사관 역할도 할 것이다. 8·15 이산가족 상봉은 목마르게 기다리던, 당장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성과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관 속에 넣어 뒀던 2007년 10·4 합의를 되살려 동해선과 경의선을 연결하고 나란히 도로를 닦는 것은 남북한 일체화와 경제적 공동 번영의 가장 큰 걸음이 될 것이다. 동해선의 제진~강릉 구간 110㎞만 연결하면 강릉에서 북한을 종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로를 달려 유럽의 파리와 런던으로 가는 환상적인 철의 실크로드가 된다. 물류의 이동은 말할 것도 없고 금강산·백두산·묘향산의 관광지를 둘러보고 남한으로 몰려들 유럽의 관광객들을 생각하면 김정은의 말대로 잃어버린 11년이 억울하다.
 
적대 행위 전면 중지와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 철폐는 남북한의 ‘작은 종전 선언’이다. 북방 한계선 평화수역 조성은 10·4 선언의 다른 프로젝트들과 마찬가지로 후임 정권들에 의한 합의 파기의 쓰디쓴 기억을 되살린다. 그래서 시간이 말한다. 다행히 이번 합의는 문재인 정권 1년 차에 성사되어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를 백지화할 수 없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국회 비준이 그중의 하나다.
 
문 대통령, 평화 정착 위해 야당 설득해야  
 
그러나 지금의 청와대·여당과 자유한국당의 대치 구도로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39개국에서 온 3000명의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명하게 진행된 12시간의 한반도 역사 전환의 이벤트를 위장 평화 쇼로 보는 정당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김정은과 트럼프 설득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다. 판문점 만찬에 그 많은 사람 중에 국회의장과 야당 인사가 빠진 것은 어느 쪽의 선택이든 현명한 결정이 아니다.
 
올해 안에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회담을 열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고 합의한 것은 한반도 평화 정착의 오메가다. 알파는 말할 것도 없이 북·미가 받아들이는 완전한 비핵화다. 판문점 선언에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 없는 한반도의 실현이라는 목표 확인이 포함되었다. ‘완전한’ 비핵화는 한국 입장에서는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으로 넘기기에 충분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의 확인이다.
 
그러나 미국이 바라는 것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다. 판문점의 완전한 비핵화가 트럼프의 보기에도 CVID가 동일한 것인가는 북·미 회담을 기다려 봐야 안다. 세부로 들어가면 충돌의 소지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구분했다.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가 되면 북한이 미국의 핵우산 제거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에서는 두 정상이 스스럼없이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했다. 그때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이다.
 
북·미 회담 종착역은 완전한 비핵화
 
3월 말 또는 4월 초 당시 국무장관 내정자 신분의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나 북·미 정상회담 의제를 조율했다. 그 때 이후 김정은 개인과 남북정상회담을 보는 트럼프의 시선이 180도 달라졌다. 트럼프의 트위터에서 꼬마 로켓맨 김정은이 존경할만한 훌륭한 사람이 되고 판문점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김정은·폼페이오 회담에서 비핵화에 관한 입장이 80% 이상 조율되었을 것이다. 가장 까다로운 남은 문제로, 트럼프와 김정은이 담판 지을 문제는 비핵화 프로세스 종료의 시점과 단계화, 매 단계의 행동 대 행동의 주고받기일 것이다. 종착역은 CVID다. 김정은 위원장이 거기까지 갈 의향이 있는지, 간다면 종착역 직전의 역에서 북한과 미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거의 동시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판문점 선언의 운명을 포함한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3자 또는 4회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절차를 마친다면 북·미 정상회담의 부담은 한층 가벼워진다. 그러나 중국이 참가하는 시점이 중요하다. 중국이 너무 일찍 뛰어들면 남·북·미 간에 조율·합의된 비핵화의 절차가 중국의 이해에 따라 흔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CVID까지 갈 의지가 있는가는 작년 말까지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던 그가 왜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돌연 대화로 돌아섰는가와 직결되는 물음이다. 세 갈래의 정리가 가능하다.
 
문 대통령, 결정적 중재 역할
 
첫째, 작년 11월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사거리 1만3000㎞의 화성-15 발사로 미국의 공격에 대한 충분한 억지력을 갖췄다는 자신감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을 꼭 찍어(single out) 공격하는 미국의 외과적 공격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북한이 한국과 일본과 미국을 보복 공격하는 마지막 한 발까지는 파괴하지는 못한다. 공포의 균형이다.
 
둘째, 김정은이 중국을 통해 미국의 선제공격 옵션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았다. 북한이 한국과 일본과 미국에 보복공격을 가하면 세 나라에 가공할 피해는 입히지만,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살아남지 못한다.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에 북한 방공망은 거의 무력하다는 게 미국 정보당국의 판단이다.
 
셋째, 대미 억지력을 갖춘 이상 주민들에게 약속한 생활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3월 27일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정책에서 핵을 내리고 경제 건설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은 혁명적인 조치다. 김정은은 이제 주민들의 생활 개선에서 정통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완전 비핵화를 받아들이고 한·미·일·중을 포함한 국제사회로부터 체제의 안전 보장과 경제 지원을 받아야 한다. 10년 이상 지속해서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 성장을 실현해야 한다.
 
트럼프는 2020년 끝나는 임기 중에 북핵의 CVID를 끝내고 싶어한다. 김정은도 거래를 빨리 끝내고 총액 500억~1000억 달러의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 급해진다. 여기가 문재인·김정은·트럼프의 이해가 만나는 지점이요 한반도 역사의 변곡점이다.
 
판문점 정상회담 최대 성과의 하나는 화학작용(chemistry)이라고 불릴만한 문재인·김정은 간의 신뢰 조성이다. 도보다리 산책과 벤치 위의 단독 대화는 남북관계 발전뿐 아니라 문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김정은과 트럼프 사이의 중재 역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올가을 문 대통령의 평양 답방 때도 그런 장면이 연출된다면 판문점 합의사항 이행과 우발적인 사건의 확대 방지에 최고의 방어막이 될 것이다.
 
김정은은 정상국가의 정상적인 지도자의 인상을 남기고 갔다. 그가 싱가포르나 다른 도시에서 트럼프를 만날 때도 같은 이미지를 발산한다면 북·미 간 불신도 크게 해소되고 대북 제재의 조기 완화나 철폐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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