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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이여, 바둑판의 헛수되지 말고 스스로 체면 세워라

기자
정수현 사진 정수현
[더,오래] 정수현의 세상사 바둑 한판(1)
바둑에 올바른 길이 있듯이 인생에도 길이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격동의 시기에 중년과 노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람들은 정수가 아닌 꼼수와 속임수에 유혹을 느끼기 쉽다. 인생의 축소판으로 통하는 바둑에서 삶의 길을 물어보기로 한다. <편집자>
 
100세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장수의 기쁨 뒤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도사리고 있다. [중앙포토]

100세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장수의 기쁨 뒤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도사리고 있다. [중앙포토]

 
100세 시대가 되었다. 98세까지 산 고구려의 장수왕처럼 앞으로 100세 가까이 사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단명하던 옛날에 비하면 큰 축복이다. 하지만 장수의 기쁨 뒤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도사리고 있다. 오래 살려면 먼저 경제와 건강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를 갖고 노년을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간단치 않다.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다. 젊은 세대에게 짐 덩어리로 인식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 나라의 세금을 축내고 청년층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면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눈총을 받으며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백 세 시대가 되면서 미래에 대해 이런 걱정을 하는 시니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바둑돌에도 사람처럼 체면 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묘수는 없을까? 국가에서 복지를 늘려야겠지만 세금으로 해결하기는 역부족이다.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 인생의 축소판으로 통하는 바둑에서 아이디어를 하나 빌려보자.
 
바둑에는 ‘돌의 체면’이라는 특별한 관념이 있다. 이것은 바둑돌에도 사람처럼 체면이 있다는 뜻이다. 바둑을 둘 때 프로기사는 자기편 돌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애를 쓴다. 돌의 체면을 살리려고 하다가 대판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얼핏 생각하면 좀 의아할 것이다. 무생물인 바둑돌에 무슨 체면의식이 있을까. 하지만 돌의 체면은 좋은 바둑을 두기 위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사람들이 체면을 세워주면 좋아하듯이 바둑돌도 체면을 세워주는 것을 좋아한다.
 
바둑에는 '돌의 체면'이라는 특별한 관념이 있다. 이는 바둑돌에도 사람처럼 체면이 있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바둑에는 '돌의 체면'이라는 특별한 관념이 있다. 이는 바둑돌에도 사람처럼 체면이 있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바둑돌의 체면을 세워준다는 것은 듣기 좋은 말로 추켜세워 준다는 뜻은 아니다. 그 돌이 바둑판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도록 만들어준다는 의미다. 어떤 돌이 바둑판 위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며 전체적 목적에 기여할 때 그 돌은 유의미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체면을 세우는 길이다. 반대로 어떤 돌이 공배나 헛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면 그 돌은 체면을 상하게 된다. 공배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수를 말한다. 
 
바둑고수가 돌의 체면을 부르짖으며 자기 돌을 헛수나 무의미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없는 돌이나 헛수를 많이 둔다면 바둑돌의 능률이 떨어져 질이 낮은 바둑이 된다.
 
'바둑돌에도 체면이 있다'는 개념을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시니어에게도 체면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시니어도 사회에서 헛수가 아닌 유의미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선에서 은퇴했다고 해서 퇴물처럼 행세하고 복지에만 기대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둑판 위의 헛수나 악수와 같다. 따라서 시니어는 프로기사가 돌의 체면을 세우려고 하듯 스스로 체면을 세울 필요가 있다.
 
힘도 달리고 사회에서 받아주지도 않는데 뭘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니어는 직장생활이나 인생 경험을 통해 체득한 귀중한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의 오랜 경륜과 노하우를 살려 사회에 일조하는 길은 많이 있다.


시니어 경륜과 노하우 살리는 이스라엘의 황혼 창업
이스라엘 실버들은 70대에도 아이디어를 내어 창업한다. 정부도 벤처가 성공하면 3배로 받고 실패하면 받지 않는 등의 적극적 지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스라엘 실버들은 70대에도 아이디어를 내어 창업한다. 정부도 벤처가 성공하면 3배로 받고 실패하면 받지 않는 등의 적극적 지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널리 알려진 케이스로 이스라엘의 황혼 창업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실버들은 70대에도 아이디어를 내어 창업한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벤처가 성공하면 3배로 받고 실패하면 받지 않는다. 청년층보다 경험 많은 실버계층의 창업 성공 가능성이 절대 낮지 않을 것이다. 이런 활동은 이스라엘처럼 정부의 지원정책이 있어야 하겠지만 노년층이 창업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창업이 아니더라도 시니어가 활동하는 길은 많이 있다. 한 예로 일본의 바둑 복지협회를 보자. 이 협회의 회원은 모두 시니어다. 이들은 바둑을 애호하는 사람들인데 거동이 불편한 다른 노인이나 장애인을 찾아다니며 바둑으로 봉사한다. 헬스케어 등 사회적 보호를 받아야 할 노년층이 타인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들의 생활을 조사해 보니 이런 봉사활동에서 존재감과 보람을 느끼고 건강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사는 시니어는 젊은 세대에 떳떳할 것이다. 사회라는 바둑판에서 헛수나 악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정책도 노년층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체면을 세우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shjeong@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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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