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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애 딸린 미망인과 결혼하겠다고?”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16> 노보쿠즈네츠크: 미친 사랑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의혹이 생긴다. 러시아 사람들은 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하나? 히스테리와 변덕과 오열과 발작, 중세 기사 뺨치는 헌신과 희생과 자기비하,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바닥에 몸을 던져 상대방의 발에 입맞춤하기. 다들 조금씩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건 러시아식이라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굳이 스토리를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자기 얘기를 그냥 쓰면 그게 소설이었다.  
 
대문호가 남긴 첫사랑의 흔적을 찾아 모스크바에서 밤 10시 반 비행기를 타고 서시베리아의 공업도시 노보쿠즈네츠크로 갔다. 19세기 이름은 쿠즈네츠크. 모스크바에서 3000km, 세미팔라틴스크에서 530km 떨어진 작은 도시다. 공항은 좁고 허름했다. 날씨는 맑고 쌀쌀한데 공장이 많아서 그런지 공기는 탁하게 느껴졌다.  
 
기념관은 도심에서 벗어난 한적한 마을에 있었다. 인적이 끊긴 거리와 구식 목조 가옥이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어울려 기묘하게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념관은 두 채의 통나무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집은 별관으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침침한 카운터 뒤에 그린 듯이 앉아있던 노부인이 반색을 한다. 집 안에는 전시실과 행사장이, 마당에는 흉상이 있다. 길 건너편 통나무집 기념관은 도스토옙스키의 연인이 2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두 사람의 연애를 환기시키는 소품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살림살이가 전시돼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복무하는 동안 이곳에 세 번 다녀갔고 머문 시간은 다 합쳐 22일 정도다.  
도스토옙스키의 첫 부인 마리야 이사예바

도스토옙스키의 첫 부인 마리야 이사예바

 
“저를 비난하지 마세요, 저도 압니다,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요…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저는 불쌍한 미친놈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질병입니다.” 그가 브란겔 남작에게 보낸 편지다. 도대체 누구인가, 이 대단한 작가를 “불쌍한 미친놈”으로 만들어버린 여인은.  
 
잘 생긴 스물네 살짜리 연적의 등장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 이사예바(1824~1864)를 처음 만난 것은 1854년 상관인 벨리호프 중령 집에서였다. 사람 좋은 중령의 집에는 늘 동네 주민들이 드나들었는데, 그 중에는 전직 교사 이사예프 부부도 있었다. 이사예프는 재산도 직장도 없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부부 사이에는 파벨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사예프의 부인 마리야는 중키에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웠으며, 세미팔라틴스크에서는 보기 드물게 교육 수준이 높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그토록 교양 있는 부인이 빈곤에 시달리는 모습에 도스토옙스키는 울컥했다. 기사도 정신이 발현했고, 가난한 술꾼의 아내는 월터 스콧의 소설에 나오는 ‘비탄에 잠긴 아가씨’로 변신했다. 그는 박봉을 털어 부부를 돕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이런 사랑은 생전 처음이었다. 유배 전 수도에서 몇몇 여성에게 느꼈던 연정과는 차원이 달랐다. 연구자들은 어째서 속된말로 ‘애 딸린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는지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옴스크 유형지에서 누적된 외로움이 폭발했다, 가정을 이루고 싶은 나이가 되어서 그랬다 등등 여러 의견이 있지만, 별 의미가 없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어느 날 사랑에 빠진다. 이 무렵 그가 형이나 브란겔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 보면 사랑의 위대한 힘 앞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그토록 강인한 정치범 소설가가 하루아침에 스무 살 청년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음 착한 브란겔 남작은 ‘늙수그레한 로미오’의 ‘연애 수발’을 들어주느라 동분서주했다. 돈도 많이 썼다.  
 
그런데 1855년 5월, 이사예프가 쿠즈네츠크에 직장을 얻어 떠나갈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절망은 끝을 몰랐다. 생의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울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결혼식을 올렸던 호데게트리아성모 성당의 20세기 초 사진

도스토옙스키가 결혼식을 올렸던 호데게트리아성모 성당의 20세기 초 사진

 
브란겔이 마련해준 송별 술자리가 끝나자 도스토옙스키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부부의 마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전송 후 우리는 새벽에 돌아왔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죽은 듯 누워있었다. 줄담배만 피워댔다.” 살이 빠졌고 시도 때도 없이 신경질을 냈다. “사랑의 기쁨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 또한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대합니다.”  
 
그해 8월, 오랜 세월 술에 찌들어 살던 이사예프가 사망했다. 이제 도스토옙스키는 합법적인 구혼자의 위치에 올랐다. 마리야 역시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후줄근한 모습이 불쌍해 보여서 측은지심으로 가까이 대했던 것 같다. 가난한 사병의 물질적 도움에 조금쯤은 감동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시큰둥한 태도에 인내심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결혼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결혼을 뜨악해 하는 형에게는 이렇게 선언했다. “형,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긴다면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마리야에게는 “당신을 잃느니 차라리 이르티시 강에 가서 빠져 죽겠다”는 유치한 협박성 편지를 보냈다(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열정과 고통으로 가득했으리라 짐작되지만 훗날 질투에 사로잡힌 두 번째 부인이 훼손시켜 고증할 길이 없다. 중요한 대목들은 검은 잉크로 쫙쫙 지워지고 미적지근한 대목만 남아있다). 여기에 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베스트셀러 소설을 써서 돈과 명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 하루 빨리 수도로 귀환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적까지 등장했다. 베르구노프라는 이름의 스물네 살짜리 잘생긴 교사, ‘진짜 로미오’가 그녀에게 구애를 시작한 것이다. 억장이 무너진 그는 부대를 무단이탈해 한달음에 쿠즈네츠크로 달려갔다. 연하남과의 결혼이 가져올 온갖 ‘부작용’을 소상하게 나열하며 둘을 갈라놓으려 했고, 당연히 두 사람으로부터 분노와 욕설 세례를 받았다. 3류 소설 급의 3자 대면이 이루어지고 히스테리와 눈물, 그리고 바닥에 몸 던지기가 뒤따랐다.  
 
도스토옙스키 입장에서 보면 마리야가 변심한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거기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신파조의 편지를 브란겔에게 보냈다. “얼마나 천사 같은 여인인가요, 얼마나 고결한 여인인가요! 그녀는 울었어요, 제 손에 입맞추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마리야 이사예바의 집

마리야 이사예바의 집

여성과 관련, 도스토옙스키가 도달한 해탈의 경지에 대해 브란겔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여성이 우리에게 베푸는 몇 시간, 혹은 며칠간의 행복과 다정함에 대해 고마워 해야 해요. 여성에게 평생 나만을 위해 살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거에요.”  
 
기사도 정신도 다시 발동됐다. 설령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그녀를 도와주어야 했다. “마리야가 고생하면 안 돼요. 그 애송이와 결혼하더라도, 최소한 돈이 좀 있어야 해요.” 그는 연인과 연적의 행복을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일은 브란겔 남작이 다 했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는 베르구노프의 승진이 급선무였다. “가스포르트 장군에게 녀석 칭찬을 많이 해 주세요. 그래야 승진할 수 있어요. 이게 다 마리야를 위한 거에요. 그녀가 비참하게 되지 않도록 도와야 해요.”  
 
그는 브란겔에게 인맥을 활용하여 마리야의 아들 파벨을 옴스크 기숙학교에 입학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또 마리야가 죽은 남편의 연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도록 여기저기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를 돕는 것은 일종의 의리였던 것도 같다. “그녀는 제 인생의 가장 슬픈 순간에 등장했어요. 그리고 제 영혼을 소생시켜주었어요.”  
 
늙은 장교,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다
그런데 1856년 10월 1일, 도스토옙스키는 장교로 진급했다. 곧 상부에서 출판 허가도 떨어질 것 같았다. 이것을 기회 삼아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부딪혀 보기로 작정했다. 11월에 장교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쿠즈네츠크로 갔다. 미래의 원대한 계획을 풀어놓는 장교는 가난한 젊은 교사보다 듬직해 보였다. 그동안 남자가 베풀어준 헌신적인 도움도 여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리야는 마침내 도스토옙스키에게로 돌아섰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듬해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는 백방으로 결혼자금을 구했다. 형과 여동생들, 브란겔 남작, 그리고 모스크바의 부자 친척 쿠마니나 이모까지 돈을 보태주었다.  
 
마침내 1857년 2월 6일, 쿠즈네츠크 호데게트리아 성모 성당에서 조촐한 식을 올렸다. 놀랍게도 베르구노프가(!) 신랑 들러리를 섰다. 신혼부부는 세미팔란스크로 돌아와 현재 기념관이 된 그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미친 사랑’은 결혼과 더불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토록 시끄럽게 주변 사람들을 들들 볶으며 감행한 결혼이건만, 결혼생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마리야가 죽을 때까지 그는 편지나 일기에서 그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토록 목메어 부르던 “천사 같은 그녀”는 갑자기 투명인간이 됐다. 결혼 1년 뒤 형에게 쓴 편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케 한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한 마디도 쓸 수가 없어.”  
 
도대체 이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결혼식을 마치고 세미팔라틴스크로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사건은 다음 호에서 얘기하겠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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