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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연극 ‘낫심’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란 명제도 옛말이 된 걸까.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뿌리째 뒤흔드는 독특한 작품이 나왔다. 무대엔 내러티브도 이미지도 없다. 그저 배우가 소화하기 이전의 방대한 텍스트만 있을 뿐이다. 작가와 배우 간 무언의 소통이랄까. 작가의 이름을 제목 삼은 즉흥 1인극 ‘낫심’은 일견 제목 그대로 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무대로 보인다.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Nassim Soleimanpiur·38)는 요즘 유럽쪽에서 핫한 작가다. 국내에도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출품작 ‘하얀 토끼 빨간 토끼’(2010)로 화제를 모았다. 병역 의무 국가인 이란에서 입대 거부로 자국 내 억류된 상황에서 전세계에 우편으로 보낸 작품 ‘하얀 토끼…’는 에딘버러 프린지, 더블린 프린지 페스티벌 등에서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자국에서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기에 작품만 세계로 ‘발신’한다는 개인적 처지와, 유명 배우가 연출도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서 처음 대본을 받고 즉흥극을 펼쳐야 한다는 컨셉트 또한 호기심을 자극해 20여개국 언어로 번역돼 공연됐다.  
 
억류가 풀린 지금은 자의반 타의반 ‘디아스포라’가 됐다. 자국에서 모국어로 공연을 할 수 없기에 세계를 돌며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에딘버러에서 초연한 ‘낫심’에선 아예 대놓고 주인공으로 나섰다. 매회 다른 배우가 즉흥 1인극을 하는 구조는 ‘하얀 토끼…’와 같지만, 공연을 위해 해당 국가를 찾은 낫심이 초반엔 영상 출연을 통해 배우를 제어하다 후반엔 직접 무대로 나오는 것이다.  
 
낫심 스타일의 미덕은 자신의 개인적 상황을 참신한 연극적 형식으로 승화시킨 아이디어의 기발함이다. ‘하얀 토끼…’ 집필 당시 억류 상태였기에 오직 대본으로 만날 수 있는 처지를 즉흥극이라는 형식으로 확장시켜 원격으로 이국의 배우를 제어하는 작가의 존개감을 각인시켰다면, ‘낫심’은 전세계를 도는 스타 작가가 됐지만 정작 엄마에게 모국어로 공연을 보여줄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축으로 한다. 그래서 세계에서 만나는 배우·관객들과 서로의 언어를 익히며 친구가 된 후, 합심해서 엄마에게 공연의 일부를 들려준다는 미션을 수행하며 모종의 감동까지 생산하는 것이다.  
 
그의 테마는 ‘소통’이다. 작가와 배우와 관객이 모두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지만 점점 마음의 문을 열고 친구가 되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 초반 영상을 통해 지시를 하는 건 벽을 강조하는 장치다. 그러다 무대 뒤로 배우를 불러 차를 대접하며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알게 하고, 무대 위로 관객을 불러 이란어 배우기 게임을 하거나 선물까지 챙겨주며 벽을 허물어 간다. 대본 그대로 따를 뿐이지만, 엔딩에 가선 자연스럽게 친구가 돼 있다. ‘친구 만들기 매뉴얼’이라 해도 좋겠다.  
 
그런데 배우는 없다. 배우로 유명한 자연인 아무개가 있을 뿐이다. 권해효·고수희·문소리·진선규·이자람·박해수·한예리·오만석·이석준 등 쟁쟁한 배우 21명이 차례로 무대에 서지만, 흔히 ‘모노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불꽃연기’는 없다. 걸출한 배우들이 당황하거나 쩔쩔매는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노출하며 똑같은 미션을 수행하는데, 각자의 개성과 배경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나름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정도다.  
 
“애초에 배우의 역할이 거기까지”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작가가 지배하는 무대에서 오브제가 된 기분이 어떨까 싶지만, 배우들은 한결같이 뜻깊은 경험에 고마워한다는 후문이다. 아무 준비도 정보도 없기에 바로 다음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배우와 자연인, 연기와 실제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오가는 것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라는 것이다.  
 
생경한 건 관객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가 꾸민 작은 해프닝의 일부가 되어 배우와 연출 뒤에 가려져 있던 작가를 배우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적으로 만나는 것. 이것은 과연 연극일까. ‘낫심’은 이란어로 ‘산들바람’이란 뜻이란다. 연출 거장 피터 브룩은 연극을 ‘바람이 새긴 문자’라고 했다. 바람이 속삭이고 지나가듯 은근하게 마음을 흔드는 게 연극이라면, 국경을 넘고 무대와 객석·백스테이지의 경계까지 넘어온 ‘산들바람’은 우리 마음에 어떤 문자를 새겼을까. ●
 
기간: 4월 29일까지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문의: 1544-1555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두산아트센터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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