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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킹 같은 가짜 넘치는 시대, 자기 삶을 돌아보라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요즘같이 사건과 뉴스가 빨리 돌아가는 때에 이미 묵은 이야기가 된 느낌이 들지만, 최근에 있었던 흥미로운 뉴스 하나는 폴 라이언 미국 하원 의장이 11월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발표한 것이었다. 정치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빼앗겨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것이 그의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살기로 했다는 것이 불출마 선언 이유였다. 그는 더 일반적으로 정치는 그의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고 말했다.
 
라이언은 2012년 미 대선 공화당 후보 미트 롬니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였다. 미국의 정치체제에서 하원 의장은 제 3위의 권력 승계자다. 이렇게 정치에 깊이 간여해 온 사람으로서, 정치로부터 은퇴하겠다는 선언은 매우 특이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자기가 맡게된 공직을 개인적인 삶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공적이고 사회적인 자리를 내놓겠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삶의 큰 의미는 당연히 진충보국(盡忠報國) 또는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시 볼 때, 출세를 지향하는 경우는 물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경우에도 궁극적인 판단은 자기의 마음에서 나온다. 이기적인 이해 관계의 계산도 그렇지만, 공공의 일에 헌신할 것을 결심한 경우에도 내면에 이어지는 동기가 없이는 그러한 판단이 반드시 진정한 것이 되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동기의 깊이에 그러한 연계가 없는 인간은 공적 차원에서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라이언 의장의 결정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바르게 가늠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민주당계의 미국 언론들도 그의 공직 사퇴를 정치적 전략으로 보는 견해들을 내놓은 바 있다. 유명한 경제학자이고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그를 “속임수의 인간”이라고까지 비판하였다.
 
 
많은 일들은 자신의 삶과의 관계에서 의미
 
그러나 그러한 비판 또는 정치적 성향의 차이를 떠나서 라이언 의장의 결정과 발언이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는 데에 하나의 반성적 계기가 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고 할 것이다. 많은 일들은 우리 자신의 삶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관계를 깊이 있게 인식할 때 비로소 많은 것은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공인에서 사인(私人)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기적 결정일 수 있다. 정치는 공사(公事)에 치중하는 삶의 영역이기는 하다. 동시에, 정상적인 조건하에서는, 가족도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삶을 전제로 하는 것이 정치의 내연(內延)이 되어 마땅하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에 순응하는 일일 수도 있고,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 나름의 보람과 영광이 있는 공직의 기회를 버리고 개인적 삶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실상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수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고양된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그 나름의 고유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기는 것일 수 있다. 그리하여, 공적인 관점을 잃지는 아니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의 삶의 고유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존적이면서 보편적인 삶에 대한 인식은 깊은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 된다.
 
 
사인에게도 자신에 충실한 삶 중요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삶은 공인이 아니라 사인에게도 삶의 중요한 주축이 될 수 있다. 특히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접하고 수용해야 하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사람이 뉴스 그리고 수없이 늘어나는 정보에 민감한 것은 자기의 삶을 살면서도 그 삶이 세계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은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정한 둘레 안에 싸여 있다. 그러나 주변은 중심과의 관계에서 수용되어야 한다. 자기와 가족의 삶 그리고 그것을 넘어 주변의 사정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가깝고 먼 동네와 다른 동네의 사정을 듣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이 단편이나 장편 소설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과 나라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사정이다. 그런데다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도 직접적으로 나의 삶의 조건을 바꾸게 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외 무역관계를 재조정하고 한국의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관세를 높인다는 결정을 발표하더니 다시 이것을 수정하였다. 이것은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최근의 국제 관계에서 남북, 북·미의 접촉이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모습을 변형시키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뉴스로 전해지는, 현실적인 연계를 갖지 않은 사항들까지도 관심사가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사건들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폭력, 가령 이슬람국가(IS)의 테러리즘과 같은 것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캐나다의 토론토에서는 한 젊은이가 트럭을 보도로 몰아 행인 10여 명을 죽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주의를 끄는 것은 한국계 3명이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여기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그런 사건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 특성을 말하여 준다. 최근의 뉴스에, 세계에서 가장 키가 작은 사람-81㎝의 키를 가지고 영화에도 출연하던 미국인 그리고 또 세계에서 가장 나아가 많다는 117세의 일본 여성이 작고하였다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뉴스는 단순한 흥미거리가 되지만, 인간 생존이 우발적이면서도 일정한 한계 속에 있다는 인생론적 인식에 보조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것들은 물론 보다 구체적으로 나의 삶을 위한 모범 또는 반면 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 다른 나라의 사회 또는 정치 정책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모범이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핀란드 정부가 실업자 2000명을 선정하여 기초소득 560유로를 지급하던 사회적 실험을 내년으로 끝내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대신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다른 정책들을 실험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선망하는 것의 하나가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사회체제다. 그 외에도 우리 나라의 정책들 중에는 외국의 사례를 참고한 것이 많다.)
 
정치와 관련된 언론 그리고 정치 선전 활동에 아지프로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실, 사실에 대한 해석, 문학적 설화를 정치 활동을 추동하는 데 이용하는 것-과도한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 목적이 사실의 부분적인 왜곡이나 과장을 정당화한다는 전제하에 집단적 폭력을 유발하는 일을 상관하지 않는 선전 활동이다. 반드시 그러한 범주에 드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리랑카에서는 지난 2월부터 4월 사이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하여 전국이 폭동과 방화의 난동에 휩싸였던 일이 있었다. 어느 식당의 음식에서 밀가루덩이가 나왔는데, 그것이 불임제(不姙劑)를 투입한 것으로 왜곡되어 전파됐기 때문이었다. 스리랑카는 오랫동안 무슬림 타밀인들과 불교도 싱할라족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곳인데, 그 불임제가 타밀인들이 싱할라족을 멸종시키려는 음모로 해석된 것이다. 이 음모론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분노와 증오를 자극하여 집단적 정치 행동을 불러일으키려는 정치 집단의 의도가 작용한 때문이다.
 
거짓 뉴스가 쉽게 전파된 것은, 영국에서 전해 오는 뉴스에 의하면, 통제 없는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 매체의 확산에도 관계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고 있는 ‘드루킹’ 사건도 뉴스와 그 해석에 대한 정치적 왜곡-자기 나름으로 대국적 정당성을 자신하는 정치에 의한 매체의 왜곡에 관계되는 일로 볼 수 있다.
  
 
자기 돌보기로 무의식적 충동 제어
 
‘자기 삶 돌보기’가 이러한 뉴스의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깊은 의미에서 자기의 삶을 돌본다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뉴스들을 자신의 삶과 관련해서 살핀다는 것이고,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단 그 사실성이고, 나의 삶 그리고 사회적 삶 전체와의 관련해서의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뉴스 수용의 바탕으로서 구체적 삶을 잊지 않으면서 넓은 고려와 숙고의 습관을 만드는 일에 관계된다. 그리고 이 고려와 습관은 사회적 관습과 제도에도 반영된다.
 
자신의 삶을 돌보는 일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과 맥락이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바로 조금 전에 언급한 사회적 관습과 제도도 언제나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요즘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특활비의 개인적 전용이라든가 또는, 따지고 보면, 성 희롱과 같은 일도 사회적 관행으로 돌려 말할 수 있다. 관행과 제도도 한편으로는 당대의 현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의미의 관점에서 반성되고 수정되어 가는 것이라야 한다. 나의 삶을 깊이 있게 볼 때, 거기에서 나는 나의 삶이 가리키는 삶의 정신적 의미를 볼 수도 있다.
 
자기를 돌본다는 것은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삶의 정신적 완성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그 원리는 더러는 무의식에 잠재해 있던 충동처럼 출현하여 우리가 저지르려는 행동을 제어한다. 관행에 따라 하는 행동에 홀연 금기령이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 이어지는 일이다. 머리에 말하였던 폴 라이언의 정치적 결정이 이러한 데에 이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나치게 존재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기 삶의 대한 깊은 의식과 그에 따르는 반성의 중요성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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