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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문재인-김정은, 비핵화 대장정 문을 열다

한반도가 완전한 비핵화를 향한 중요한 첫발을 뗐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어제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고 “북측이 취하고 있는 조치가 비핵화를 위해 중대한 조치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이 같은 합의를 ‘판문점 선언’에 명시했다. 역대 세 번째이자 11년 만에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문제가 핵심 의제로 논의된 건 처음이며, 이를 합의문에 명시한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다.
 
정부가 내세운 ‘평화, 새로운 시작’의 구호와 김 위원장이 방명록에 서명한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라는 말과 같이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게 됐다. 지난해까지 ‘한반도 전쟁설’이 흘러나오고 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누구의 핵 단추가 더 큰가”와 같은 험악한 말폭탄이 오가던 것과는 엄청난 변화다. 그러나 비핵화를 위해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사실 또한 드러났다. 김 위원장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어떤 의미고, 어떤 방법으로 언제까지 비핵화를 이룰 것인지 등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번 합의가 비핵화 대장정의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다.
 
우리 정부는 당초 남북 정상회담 의제로 세 가지를 꼽았다.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이었다. 하지만 회담의 성패를 가를 의제는 단연 비핵화였다. 비핵화에 진전이 없으면 유엔의 대북제재를 피해갈 수 없어 평화 정착이나 남북관계 개선은 난망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번 합의문에서 3대 의제는 남북관계 개선, 군사적 긴장상태 완화, 평화체제 구축으로 정리되고, 비핵화는 평화체제 구축의 하위 항목에 포함시켜 그 비중이 약해졌다.
 
일각에선 이런 점을 지적하며 미흡한 회담이라고 비판한다. 비핵화의 방식과 대상, 시한 등 구체적 로드맵이 속 시원하고 통 크게 합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선 앞으로 이어질 북·미 정상회담의 비핵화 담판을 의식해 어느 정도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 위원장이 "이제 시작에, 빙산의 일각”이라고  언급한 게 그런 상황을 가늠케 한다. 미국에 양보할 사안과 남북 합의의 성과 사이에서 고민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어제 회담에선 비핵화 이외에 적지 않은 합의가 도출됐다. 우선 군사적 긴장 완화 부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많다. 남과 북이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며 "5월 1일부터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비롯한 적대 행위들을 중지해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 또 논란이 많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 대책을 세워나가기로” 합의했다.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선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이 되는 올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인 평화체제 정착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메시지도 전 세계에 천명했다. 문 대통령 역시 올가을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
 
두 정상은 유엔 제재를 의식해 경협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북 교류를 확대해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쌍방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 지역에 설치하기로” 합의한 게 그 예다. 또 "남북 적십자회담을 통해 8·15를 계기로 이산가족·친척 상봉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무엇보다 이번 회담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북한이 정상 국가의 이미지를 얻게 됐다는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잔인한 독재자, 미치광이 로켓맨에서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유머까지 구사하는 합리적 이미지를 얻게 됐다. 양측 영부인까지 동반하는 만찬으로 북한은 정상 국가에 한발 더 다가섰다. 또한 이번 회담에서 남북 정상은 수행원이나 통역 없이 30분간 단둘만의 ‘도보다리 밀담’을 나누었다. 양쪽 실무진이 ‘판문점 선언’의 구체적 표현을 가다듬는 시간에 이뤄진 가장 중요한 대화로 꼽히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공개되지 않았지만 양측 정상 간의 신뢰 구축, 북 비핵화에 대한 내밀한 합의 등 판문점 선언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번 회담은 이런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구심을 말끔히 풀어주기엔 여전히 미흡한 게 사실이다. 김 위원장으로부터 비핵화 시기 등 보다 진전된 비핵화 발언을 이끌어낼 수 없었는지 아쉽다. 물론 한겨울 얼음 석 자가 하루아침에 언 게 아닌 것처럼 오랜 냉전의 대치 구조를 바탕으로 한 북핵 문제를 한칼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듯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 일괄타결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건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고도화돼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핵화 문제를 외면하고선 사실 그 어떤 남북 간의 논의도 무의미한 게 현실이다.
 
비핵화 문제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 배처럼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한다.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북핵 고도화의 시간만 벌어주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한 대북 제재의 틀을 굳건히 견지하면서 미국과 찰떡같은 공조체제를 유지해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 회담 결과를 미국과 정확하게 공유하며 비핵화 완성의 시나리오를 짜야 할 것이다. 백 리를 가려는 자는 구십 리가 반이란 말처럼 정부는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완전 비핵화에 매진해야 한다. 완전 비핵화 말고는 다른 해법을 찾을 수 없고, 이번이 비핵화의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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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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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