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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정은의 유머 코드 … 핵실험·연평도 도발도 슬쩍 넘겨

[2018 남북정상회담] 김 위원장 ‘판문점 12시간’ 관찰기
김정은(34) 북한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체류 12시간(오전 9시28분~오후 9시27분)은 한국과 국제사회에 그의 모습과 통치 스타일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場)이었다. 생중계 화면 속의 김 위원장은 호탕하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지난 3월 말 전격적인 중국 방문에 이은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회담으로 외교 무대에 데뷔했지만 당시는 ‘라이브(live)’가 아니었다. 조선중앙TV가 정교한 편집으로 이미지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변신과 파격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김정은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이례적으로 얼굴 분장까지 하고 나온 점은 그와 북한 선전선동 담당자들이 27일 판문점 행차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 준다. 방명록에 서명할 펜 하나까지 여동생인 김여정(29)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직접 챙겨 올 정도로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핵과 미사일을 거머쥔 ‘도발자’로 각인돼 온 그를 ‘평화와 번영을 향해 주동적 조치를 취해 나가는’ 인물로 바꿔 보려는 데 초점이 맞춰진 분위기다. 라종일 한양대 석좌교수는 “개방적이고 호탕한 이면에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연출한 게 드러나 보였다”고 말했다.
 

눈길을 끈 건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는 점이다. 군사분계선(MDL)상 첫 대면에서 그는 문 대통령을 10초에 불과했지만 콘크리트 경계선 너머 북한 땅으로 인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 장면을 두고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문 대통령을 국경을 넘도록 권유한 놀라운 순간”이라며 “신중하게 연출된 외교적 댄스에 놀라운 또 하나의 스텝이 추가됐다”고 했다.
 
악수와 의장대 사열, 기념촬영 등의 공개일정에선 시종일관 문 대통령을 리드하려는 장면이 드러났다. 평화의집에서 열린 환담에선 마침표 없는 특유의 만연체 발언으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지난 시기처럼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제대로 이행 못 하면 오히려 낙심을 준다”고 해 과거 합의가 이행되지 못한 책임을 떠넘기려는 의도도 드러냈다. 북한엔 낯선 표현인 ‘잃어버린 11년’이란 구절까지 두 차례나 써 가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보수정권 때 남북관계가 파탄난 듯한 인상을 주려 했다.
 
유머는 그를 호방하고 부드러운 지도자로 새롭게 각인시키려는 시도로 보였다. 사진 촬영이 끝난 뒤에는 “잘 연출됐습니까”라고 농을 건넸다. 만찬 음식으로 북측이 평양냉면을 공수해 온 점을 화제로 꺼내면서 “멀리서 온 평양냉면”이라고 운을 뗐다가 곧바로 “평양을 멀다 말하면 안 되갔구나”라고 고쳐 말해 좌중에 웃음을 자아냈다.
 
이런 모습은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당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정일은 “구라파(유럽) 사람들이 나를 두고 자꾸 은둔한다고 하는데, 대통령께서 은둔에서 나를 해방시켰다”고 말했다. 유머러스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이 은둔의 지도자가 아님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번 김정은의 시도는 아버지 시절의 차용이라 볼 수 있다.
 
 
#유머 속에 숨겨진 도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하지만 단순한 우스개를 넘어 우리로선 수용하기 힘든 언급도 있었다. 김정은은 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대통령께서 우리 때문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시느라 새벽잠을 많이 설쳤다는데.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셨겠다”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과 핵실험 등으로 긴급 NSC가 소집됐던 상황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김정은은 오전 회담 전 모두발언에서 2010년 11월 북한군에 의한 연평도 포격 도발로 우리 장병과 주민이 숨진 사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지만 사과나 유감 표명이 아니었다. 그는 “실향민들과 탈북자, 연평도 주민 등 언제 우리 군의 포격이 날아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분들도 오늘 우리 만남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봤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태의 본말이나 맥락 없이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만을 부각한 것이다. 연평도 사태가 북한군에 의한 명백한 도발로 우리 국민이 숨졌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과 참모들이 어떤 대응을 했는지 궁금하다. 김정은은 천안함 폭침 도발 문제는 피해갔다.
 
그 때문에 일부에선 청와대와 정부가 천안함 폭침으로 숨진 46명의 젊은 장병과 연평도 포격 도발 희생자를 생각했다면 사전 실무회담 등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과와 재발 방지, 책임자 처벌 같은 깐깐한 조건을 요구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는 얘기다. 김정은은 지난 22일 황해북도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32명의 중국 관광객이 숨지자 시진핑 주석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말과 위로나 보상으로도 가실 수 없는 아픔을 준 데 대해 깊이 속죄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유머뿐 아니라 듣는 이가 놀라울 수 있는 솔직함도 드러냈다. 그는 평화의집 사전환담장에서 문 대통령이 “북측을 통해 꼭 백두산을 가고 싶다”고 하자 “솔직히 걱정스러운 것이 우리 교통이 불비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습니다. 평창올림픽에 갔다 온 분들이 말하는데 평창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했습니다. 남측의 이런 환경에 있다가 북에 오면 참으로 민망스러울 수 있겠습니다”고 답했다.
 
 
#건강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판문점발 HD급 라이브 화면은 그의 표정과 숨소리 하나까지 잡아냈다. 그러다 보니 숨기고 싶은 민감한 대목까지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기밀로 간주되는 김정은의 건강 문제도 그중 하나다. 분계선을 넘어온 그는 불과 200m 정도의 거리를 도보로 이동하면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군 의장대를 앞에 두고 몇 계단을 올라 사열대에 선 김정은은 어깨가 들썩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공개 모두발언에서 문 대통령에게 “군사분계선에서 200m”라는 언급을 두 차례나 한 것도 이런 점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도보다리’ 산책과 즉석 단독 회담에서도 이런 모습이 드러났다. 야트막한 동산 하나를 넘는 산책 코스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버거워 보였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2016년 6월 김정은의 체중이 13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한 바 있다. 문 대통령(172㎝)과 나란히 선 영상을 토대로 보면 김정은의 키는 170㎝ 정도로 보인다. 체질량지수(BMI·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눈 값)는 45에 해당한다. 오상우 동국대 가정의학과 교수는 “고도비만(30 이상)을 넘어 초고도비만(35 이상)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북한에서 김정은은 소위 ‘최고존엄’으로 간주된다. 수령독재 체제의 경전이라 할 ‘당의 유일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은 김일성·김정일 등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을 “절대로 융화묵과하지 말고 비상사건화하여 비타협적 투쟁을 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판문점 정상회담장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오전 9시28분 북측 판문각 문을 밀치고 등장한 김정은 위원장의 주변에는 짧은 머리에 강인한 체격의 경호원 10여 명이 에워쌌다. 방탄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는 그의 옆으로 12명의 경호원 대열이 질주하는 장면도 펼쳐졌다. 회담 관계자는 “문 대통령과 참모들이 근접경호 없이 도보로 오가는 상황에서 북한이 좀 과도한 연출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측의 정성스럽고 깨알 같은 준비에 김정은 위원장은 만족을 표시했다. 평화의집에 걸린 미술작품 ‘훈민정음’에 문재인 대통령을 상징하는 ‘ㅁ’자와 김정은 위원장을 의미하는 ‘ㄱ’자가 붉게 표시된 대목을 문 대통령이 설명하자 탄복하기도 했다. 만찬 요리와 기념식수, 회담장 인테리어와 그림 하나에도 디테일한 의미를 담았다.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가 “제가 (정상회담 준비에) 한 일이 없어 부끄럽다”고 얘기할 정도다.
 
 
#아쉬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안경을 벗었다가 착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일각에선 진정한 인권 변화를 상징할 사안을 챙기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에 장기 억류 중인 6명의 우리 국민을 송환하는 깜짝선물이나 분단 현장에서 숨져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행사는 그중 하나일 수 있다. 김정은이 남한으로 넘어온 경로인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T2와 T3 건물) 사이 통로는 분단의 아픔이 그대로 스며 있는 장소다. 북한 체제에 이끌려 밀입북을 했다 영어의 몸이 됐던 사람들, 낡은 목선에 의지해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남한 쪽으로 표류해 천신만고 끝에 송환되던 북한 주민들이 오간 곳이다.
 
김정은은 11년 만에 정상회담이 다시 열린 것을 언급하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나, 왜 이렇게 오기 힘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집권 이후 지난 6년 동안 네 차례의 핵실험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무시로 쏘아 올려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몰아넣었던 그가 그 답은 가장 잘 알고 있을 듯하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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