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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한 장의 괘서에서 영조도 당했다 … 조선시대 ‘드루킹’ 사건

유성운의 역사정치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괘서사건은 토역경과사건과 맞물리면서 탕평책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주 체제를 만들었다. [사진 한국화가 우승우]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괘서사건은 토역경과사건과 맞물리면서 탕평책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주 체제를 만들었다. [사진 한국화가 우승우]

1755년(영조 31년) 1월 전라도 나주. 밤사이 누군가 붙여 놓은 한장의 괘서(掛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수군거립니다. 얼마 후 하얗게 질린 포졸들이 달려와 수거해 갔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읽은 뒤였습니다. 이 한장의 괘서가 결국 정국을 뒤흔들기 시작하며 걷잡을 수 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훗날 역사에서는 조선 후기 소론계를 몰살 직전까지 끌고 갔던 이 사건을 ‘나주 괘서사건’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로 알려진 영ㆍ정조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온한’ 움직임이 많았습니다. 이인좌의 난(1728), 남원 괘서사건(1733), 나주 괘서사건(1755), 홍상범 역모 사건(1777), 문인방 역모 사건(1783),교영계 역모 사건(1787) 등 각종 반체제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시작점은 대개 유언비어였습니다. 지금처럼 온라인 댓글을 이용할 수는 없었지만 거짓 소문을 만들어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가장 널리 쓰인 것은 익명으로 글을 쓴 뒤 시장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붙여 방방곡곡에 퍼지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것을 ‘괘서(掛書)’라고 불렀습니다.  
 
영조 31년 나주 괘서의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괘서엔 정치적으로 과격한 내용이 담겼는데, 주로 고위 관료나 임금이 타깃이었습니다. 특히 임금에 대한 내용은 차마 그대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괘서에 대해선 ‘4자 흉언’ ‘6자 흉언’이라는 식으로 대체됐습니다. 괘서가 발견되면 불태운 뒤 내용만 상부에 보고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영조실록』을 보면 나주 괘서에 담긴 내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임금이 진노하여 주장(朱杖)으로 때리게 하였으나 윤혜(尹惠)는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역적 윤혜가 복주(伏誅ㆍ고문 중 사망)되었다. 영부사가 간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 때문에 자세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게 해도 오히려 실토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느슨하게 해야 하겠는가?’”(『영조실록』 31년 5월 6일 )
 
국왕인 영조가 직접 국문에 참여한 데다, 주변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로 냉정함을 잃고 격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주 괘서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록을 따라가 보면 대략 유추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신치운이 말하기를, ‘신(臣)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영조실록』 31년 5월 20일)
 
신치운이 언급한 ‘게장’이 괘서에 접근하는 코드입니다.  
 
영조의 배다른 형이자 선대왕이었던 경종은 와병 중에 게장과 생감을 먹고 복통과 설사를 일으키며 36세에 급사했습니다. 왕위는 자연스럽게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에게 돌아갔습니다.
 
한의학에서는 단백질이 풍부한 게장과 탄닌이 들어있는 생감은 상극(相剋)이라고 설명합니다. 때문에 누군가 경종을 시해할 목적으로 이를 올렸다는 풍문이 나돌았고,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은 배후로 연잉군(영조)을 지목했습니다. 물론 영조는 펄쩍 뛰었지만 왕위 정통성은 생채기를 입게 됐습니다. “갑진년(경종이 급사한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라는 말은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죠. 괘서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영조가 직접 국문에 참여하고 조선의 모든 수사역량이 총동원되어 4개월간 조사를 벌였음에도 수감 중이던 주요 용의자가 독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범인은 수사에 참여했던 포도청 관리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사본부에 파견된 경찰관이 체포된 용의자를 독살해 ‘진상 은폐’를 시도한 셈이니 조정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영조를 지지하지 않던 소론계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수사가 종결되면서 대대적인 숙청으로 이어졌습니다. 소론의 주요 인사 500명이 사형된 것은 물론 이들 집안의 가족들은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사망한 소론 주요 리더들도 관직이 삭탈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론과 가깝다는 혐의를 받은 종친들까지 사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괘서의 파급력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4월에 마침 문의 노곡에 갔었는데 보를 쌓던 역군들이 흩어져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거쳐 문의 무릉정에 갔었는데, 이신이란 자의 집 앞산과 뒷산에 피란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았습니다.”(『영조실록』 24년 5월 24일)
 
1748년(영조 24년) 충청도 문의에서 발생한 괘서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문의 고을 백성들이 내달 15일에 의당 어육(魚肉)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리들이 나서도 진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근대사회에서 괘서의 위력은 지금의 댓글조작 못지않게 파급력이 컸습니다.
 
이런 이유로 역모 세력은 괘서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곤 했습니다.
 
1728년 3월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대표적입니다. 1727년 12월부터 1월까지 전주 → 남원 →서울로 괘서가 연이어 붙었는데 학계에서는 일련의 시나리오에 의해 추진됐을 것으로 봅니다. 이 같은 사전 여론작업 덕인지 이인좌 세력은 순식간에 경기 안성ㆍ죽산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조정을 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예언서 『정감록(鄭鑑錄)』. [중앙포토]

조선 후기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예언서 『정감록(鄭鑑錄)』. [중앙포토]

괘서에 한층 힘을 실어준 것은 예언서였습니다. “이씨 왕조가 없어지고 정씨가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정감록(鄭鑑錄)』 『요람(要覽)』 등이 영ㆍ정조 시대부터 급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또 역모 세력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예언서의 공통분모는 이씨(李氏)가 망하고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정씨(鄭氏)의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또 정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바다의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해도기병설(海島起兵說)’도 많이 거론됐습니다.  
 
“임자년 2월에 정가가 먼저 해도에서 기병하고, 유가와 김가가 이를 따라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정조실록(正祖實錄)』 9년 3월 1일)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

또한 예언서를 이용한 세력들은 불평등한 사회ㆍ경제적 구조의 해소를 주장했습니다. 『정감록』의 원전으로 불리는 『감결』엔 “부자는 돈과 재물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가는 것 같고… 가난한 자는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 등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겼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안전을 보전할 장소를 제시하는 것도 공통된 특징입니다. 일신을 보전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를 언급하며, 이상적인 공동사회 건설을 지향했습니다.
 
18세기 영ㆍ정조는 여론을 왜곡 선동하는 세력을 엄벌하려 애썼습니다. 이 같은 여론 왜곡이 질서의 근간을 흔들 것으로 염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배후까지 발본색원하지는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민심을 바르게 교화하면 사술이 통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반드시 당여들을 찾아내어 숨겨진 내막을 적발하여 기어코 없애려고 한다는 것은 내가 듣고 싶은 바가 아니다…오염된 풍속을 변화하도록 하라.”(『정조실록』 6년 12월 27일)  
 
하지만 자정에 대한 기대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당원 김동원(필명 ‘드루킹’)씨의 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으로 난처해진 김경수 민주당 의원, 김씨,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 [중앙포토ㆍ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당원 김동원(필명 ‘드루킹’)씨의 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으로 난처해진 김경수 민주당 의원, 김씨,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 [중앙포토ㆍ연합뉴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드루킹을 보면, 조선 후기 예언서를 이용한 모의세력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당시 모의 세력이 성벽이나 시장에 붙이는 궤서로 여론을 조종했듯, 이들은 ‘현대판 궤서’ 댓글을 이용했습니다. 또한 세력화 과정에서 『격암유록(格菴遺錄)』이라는 예언서를 이용해 자신의 카리스마를 확립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끌던 ‘경제적공진화모임’ 회원들에게는 파주 ‘두루미타운’이라는 곳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했다는데, ‘십승지’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경제민주화를 통해 재벌을 해체하고 부를 균등분배할 것이라는 이상을 꿈꾸었다는 점도 공통점입니다.  
 
드루킹 논란을 두고 여야의 공방도 뜨겁습니다. 야권이 특검을 강력히 요구하자, 여권은 “우리도 피해자”라면서도 “특검은 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는 새 여권 핵심 실세인 김경수 의원 측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드루킹 사건의 핵심은 여권 정치인의 연관 여부 못지않게, 소수가 다수의 여론을 왜곡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을 뒤흔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검ㆍ경 수사든 특검이든, 이번 사건의 실체를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선조 시기에 동·서인으로 시작된 붕당은 동인은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각각 나뉘었다. 숙종 시기 남인과 소론은 희빈장씨와 세자(경종)를, 노론은 숙빈최씨와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며 갈등을 빚었다. 숙종이 사망하자 남인과 소론이 지지했던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노론 측은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연잉군을 왕위 계승자인 왕세제로 삼으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 과정에서 소론은 노론 측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공격해 1721년(신축년)부터 1722년(임인년)까지 노론계에 대한 숙청이 이어졌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는 신임의리(辛壬義理)로 인정돼 노론이 중용됐다. 이후 나주괘서사건으로 소론이 위축되면서 조선 정계는 노론 일당체제로 재편됐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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