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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남북정상회담장으로 초대합니다 - 그곳, 판문점 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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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남ㆍ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은 6ㆍ25전쟁의 산물이자 65년 정전체제의 상징이다. 우리에겐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휴전회담은 1951년 7월 개성 북쪽 내봉장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북한군이 무력시위를 하며 방해를 해, 회담장을 조금 더 남쪽인 널문리로 옮겼다. 10월 25일 이곳 작은 주막 앞 콩밭에 친 군용 천막에서 첫 회담이 열렸다. 초가집 네 채만 남아있던 이름 없던 촌마을은 이때부터 세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다.  
 
휴전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총 765회 열렸다. 판문점(板門店)이란 이름은 회담에 참여한 중공군이 널문리 주막을 한자로 표기하며 탄생했다. 공식 명칭은 ‘공동경비구역(JSAㆍJoint Security Area)’이다. 판문점은 직선거리로 개성에서 10㎞, 서울과 평양에선 각각 52㎞, 147㎞ 떨어져 있다. 이곳의 군사분계선은 눈에 보이지 않게 그어져 있을 뿐 철조망은 없다.
 
1953년 | 총성이 멈추다
 
판문점의 상징은 푸른색 단층 건물 회담장이다. 군사분계선 위에 들어선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회의실(T1)과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 본 회의실(T2), 군정위 소회의실(T3)이다. 건물명에 붙은 ‘T’는 ‘Temporary’의 약자로, 임시 건물이라는 의미다. 당시 누구도 정전이 65년 넘게 계속될지 몰랐다는 흔적이다. 정전은 종전이 아닌 잠시 전쟁을 멈췄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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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 정전협정은 이곳이 아닌, 북쪽으로 800m 떨어진 북측 비무장지대에 급조한 목조건물 ‘평화의 전당’에서 체결됐다. 이번에 판문점을 찾을 것으로 보이는 북한 이용호 외무상의 부친 이명제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서명 때 조인식을 촬영한 북측 사진기자였다.  
 
지금의 회담장은 협정 체결 직후인 10월 판문점 구역 중심에 새로 만든 건물이다. 회담장 책상 위에는 마이크와 연결 케이블이 있는데, 이 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구분된다. 다만 회담 중이거나 어느 한쪽이 회담장을 사용할 때면 건물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이곳에선 군정위 회담이 총 460회 열렸다. 남북 당국도 총 156회 만났다. 남측 지역인 자유의 집(11회)ㆍ평화의 집(94회), 북측 판문각(12회)ㆍ통일각(87회)을 앞선다.
 
1968년 | 푸에블로호 미군 송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납북된지 335일만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중앙포토]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납북된지 335일만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중앙포토]

북한에 억류된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 함(AGER-2) 승조원 82명이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돌아왔다. 푸에블로호는 11개월 전인 1월 23일 동해상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나포됐고, 이때 승조원 1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미국은 항공모함 3척 등을 동해로 급파하는 한편, 2월 2일부터 판문점에서는 북한과 30회 비밀협상을 벌여 송환에 합의했다. 북한은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 함을 99년 대동강으로 옮겨 반미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1976년 | 도끼 만행사건
UN군 살인사건에 사용된 도끼를 들고 사건을 설명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UN군 살인사건에 사용된 도끼를 들고 사건을 설명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UN군 제3초소 인근에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살해됐다. 이들은 북측 초소를 가린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작업 중단을 요구했지만, 미군은 작업을 계속했고, 이에 북한군 무장병력 30명은 미 육군 보나파스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를 도끼로 살해했다. 이에 UN군은 8월 21일 미루나무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폴 버니언 작전’에 나섰고, 한ㆍ미 당국은 ‘데프콘 2’를 발령해 전면전에 대비했다. 미군은 항공모함 등 5척의 전투함을 한반도에 추가 배치했고, 주일 미군도 즉각 투입에 대비했다. 미루나무 제거는 북한군의 저항 없이 무사히 끝났다.
 
1976년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진 현장 [국가기록원]

1976년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진 현장 [국가기록원]

 
김일성이 직접 유감을 밝히면서 전쟁 위기는 일단락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동경비구역(JSA) 안에도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이전까지는 UN군과 북한군이 혼재되어 경비를 서는, 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었다. 그러나 우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이때부터 남ㆍ북의 경비 구역을 분리했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도 폐쇄했다.
 
1984년 | 30분간의 총격전
 
북한군과 남한군의 총격전이 벌어진 판문점 내 연못(현 정원)

북한군과 남한군의 총격전이 벌어진 판문점 내 연못(현 정원)

1984년 11월23일 판문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소련 관광 안내원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가 귀순하면서다. 그는 군사정전위원회 회담 장면을 촬영하다가 혼란한 틈을 타고 회담장 건물 사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북한군은 권총을 쏘며 저지했지만 마투조크의 귀순을 막지 못했다. 이에 북한군 17명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150m 남쪽의 연못 성큰가든(Sunken Garden)까지 내려와 대치했다. 이때 한ㆍ미군은 북한군 총격에 적극 대응했다. 76년 도끼만행 사건 이후 교전규칙이 강화된 효과였다. 당시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사건 현장 사진을 보며 “두 명이나 살해됐는데 북한군 시신은 왜 안보이냐, 권총으로 북한군을 쏴야 했던 것 아니냐”며 분노했다고 한다.  
 
판문점으로 망명한 마투조크씨(오른쪽)가 로마행 비행기에 탑승한 모습. [중앙포토]

판문점으로 망명한 마투조크씨(오른쪽)가 로마행 비행기에 탑승한 모습. [중앙포토]

마투조크 귀순으로 발생한 총격전은 30분 동안 이어졌고 한국군 1명, 북한군 3명이 사망하고 미군 1명이 부상을 당했다. 북한군은 피해가 커지자 부상자와 사상자를 수습해 돌아가겠다며 교전 중단을 요청해 왔다. 한ㆍ미군이 이를 받아들여 총격전은 종결됐고, 북한군이 내려와 시신과 부상자를 챙겨 돌아갔다. 판문점을 내려왔던 마투조크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9년 | 선을 넘은 민간인 임수경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가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 귀환하고 있다. 오른쪽은 밀입북했던 문익환 목사 [중앙포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가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 귀환하고 있다. 오른쪽은 밀입북했던 문익환 목사 [중앙포토]

평양축전 참가차 방북했던 한국외대 학생 임수경 씨와 문규현 신부가 1989년 8월 15일 판문점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북측 판문각 앞에 도착해 15분간 연설을 한 뒤 도보로 내려왔다. 판문점에선 군정위 본회의실(T2)과 군정위 소회의실(T3) 사이에 있는 높이 5㎝, 폭 50㎝의 콘크리트 연석이 군사분계선 역할을 한다. 연석과 도로 사이에는 자갈이 깔려 있고 경계 병력이 아니라면 이 자갈밭 구역으로 들어설 수 없다. 임 씨와 문 신부는 분단 이래 판문점을 통과한 첫 민간인으로 기록됐다.  
 
임수경씨는 6월 21일 출국해 도쿄~서베를린~동베를린~모스크바를 거쳐 30일 평양에 도착했다. 판문점을 건너온 임 씨는 공안 당국에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3년 5개월 뒤 가석방됐다. 이후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당시 전대협 제3기 의장으로 임 씨 등의 방북 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1993년 | 비전향 장기수 북을 향하다
 
2000년 9월. 북한 출신 비전향장기수들이 환한 얼굴로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향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0년 9월. 북한 출신 비전향장기수들이 환한 얼굴로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향하고 있다. [중앙포토]

판문점의 중감위 회의실은 송환 통로로도 사용됐다. 1993년 3월 19일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이인모씨가 판문점 중감위 회의실에서 북측에 인도됐다. 비전향장기수 출신이 북한으로 송환된 첫 사례다. 그는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 종군기자로 참전한 뒤 빨치산활동을 하다 52년 체포되어 34년간 복역했다. 2000년 9월 2일에도 비전향 장기수 출신 63명이 판문점 중감위 회의실에서 북으로 송환됐다. 정부는 이들에게 방북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한편 방북 기간을 무제한 연장해주는 방식으로 북송했다.  
 
1994년 | 서울 불바다 발언
남북간 특사 교환을 위한 8차 남북실무접촉에서 박영수 북쪽 회담 대표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발언했다. [중앙포토]

남북간 특사 교환을 위한 8차 남북실무접촉에서 박영수 북쪽 회담 대표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발언했다. [중앙포토]

 
1994년 3월 19일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에서 북측 박영수 조평통 부국장은 ‘서울 불바다’ 발언을 꺼내 충격을 줬다. 그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남측 대표에 협박을 하기도 했다. 휴전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의 장사정포 350여 문으로 서울을 공격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후 99년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도 ‘서해교전 사태를 사죄하라’며 적반하장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미국 언론과의 접견에서 불바다 발언에 대해 “전쟁열이 올라 분별없이 덤벼드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한 개별적 일군의 발언”이라며 의미축소에 나서기도 했다.
 
1994년 |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북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넘어가기 전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넘어가기 전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94년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한 뒤, 3일 뒤인 18일 같은 길로 돌아왔다. 1차 북핵위기 상황에서 중재자로 나선 그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핵 문제를 논의했다. 북ㆍ미는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핵 동결과 경수로 제공에 합의했다.  
 
1996년 |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유해 송환
 
북한 잠수함이 동해안에서 공작활동 후 복귀중 좌초, 북한무장간첩들이 강릉 등 내륙으로 침투해 소요를 일으켰다. [중앙포토]

북한 잠수함이 동해안에서 공작활동 후 복귀중 좌초, 북한무장간첩들이 강릉 등 내륙으로 침투해 소요를 일으켰다. [중앙포토]

1996년 12월 30일 북한 정찰국 소속 공작원 유해 24구가 판문점에서 북한에 인도됐다. 남북한 사이 첫 시신 송환이었다. 이들은 동해안 일대에서 공작활동을 끝내고 복귀하던 중 상어급 잠수함이 좌초돼 9월 18일 내륙으로 침투했다. 택시기사의 신고로 수색작전이 시작돼, 북한 공작원 중 1명은 생포, 24명은 사살ㆍ사망, 1명은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돌아갔다. 이 작전에 49일간 군ㆍ경ㆍ예비군 4만여 명이 동원됐다. 북한은 유해 송환 하루 전날인 29일 유감을 표명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1998년 | 북을 향한 소 1001마리
 
'통일의 소'를 실은 차량행렬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판문점=공동취재단]

'통일의 소'를 실은 차량행렬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판문점=공동취재단]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 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다녀왔다. 같은 해 10월 27일에도 501마리를 싣고 한 번 더 방북했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 십대는 회담장 우측 도로를 통해 북한에 들어갔고, 정 회장은 중감위 회의실을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 회장의 방북은 남북한 교류협력 사업의 밑거름을 마련한 계기가 됐다. 특히 2차 방북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 회장의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방문하며, 금강산 관광사업 합의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정 회장은 실향민 출신이다. 열 일곱살에 북한 고향 집에서 부친의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남한에 내려왔고 현대그룹을 창업했다. 현대아산과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2003년 평양에 실내체육관을 완공했는데, ‘버드나무가 많은 도시’를 뜻하는 평양의 옛이름(유경)과 정 회장의 이름을 합쳐 ‘유경정주영 체육관’으로 명명했다.
 
2012년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판문점 방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2년 판문점에 방문해 남한을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2년 판문점에 방문해 남한을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2012년 3월 4일 판문점을 다녀간 경험이 있다. 전년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집권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이뤄진 행보라 주목을 받았다. 판문각에 오른 김정은이 쌍안경으로 남측 지역을 내려봤다. 그는 한ㆍ미연합군사연습 중인 한국을 언급하며 “판문점의 전초병들은 적들과 항시적으로 총부리를 맞댄 만큼 언제나 최대의 격동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또한 김일성 주석이 남긴 마지막 친필을 본 따 1995년 만든 비석을 찾아 “앞으로 싸움이 일어나면 정전협정 조인이 아니라 항복서에 도장을 찍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아버지인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도 1996년 11월 24일 판문점 방문길에 김일성 친필비를 찾아 “정전협정 조인서가 아닌 항복문서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7년 | 목숨을 건 북한군 귀순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이 지프에서 내려 남한을 향해 달리는 모습 [연합뉴스]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이 지프에서 내려 남한을 향해 달리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13일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이 판문점을 넘어 귀순했다. 그는 지프를 몰고 72시간 다리를 넘어 군사분계선 앞에 도착했다. 북한 경비병은 뒤늦게 이상징후를 포착하고 뒤쫓았다. 오청성은 지프가 배수로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지프에서 내려 남쪽으로 달렸고 간발의 차로 추격조를 따돌렸다. 그를 쫓던 북한 경비병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되기도 했다.  
총격을 받고 자유의 집 근처 수풀에 쓰러져 있던 오청성은 한국군의 도움을 받아 후송됐다. 아덴만 여명 작전 때 석혜균 선장을 치료한 아주대 이국종 교수가 응급수술을 맡아 생명을 구했다. 북한군은 추가 귀순을 막기 위해 오청성이 지프를 몰고 내려왔던 곳에 나무를 심고 72시간의 다리에는 통문을 설치했다.
 
 
2018년 | 남북정상회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평화의 집 내부 모습 [중앙일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평화의 집 내부 모습 [중앙일보]

평화의 집에서 ‘2018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 평화의 집은 실무회담을 위한 장소로 건립돼 정상회담을 개최하기엔 협소하다. 이 때문에 회담을 앞두고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컨셉으로 시설을 개조했다.
 
 총 3층인 평화의 집은 1층 정상환담장, 2층 정상회담장, 3층 연회장으로 구성돼 있다. 정상회담장은 중앙에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오른쪽)이 마주 보고 앉고, 좌ㆍ우로 3명씩 남ㆍ북 각 6명이 배석한다. 두 정상이 앉는 의자는 다른 의자보다 조금 높고 등받이 상단에 한반도 지도가 새겨져 있다. 두 정상 사이 테이블 거리는 2018㎜로 역사적 정상회담이 열리는 2018년을 상징한다. 두 정상은 회담장에 걸려있는 폭 7m의 그림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신장식 작가) 앞에서 악수한 뒤 대화를 시작할 예정이다.  
 
정원엽·박용한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Jung.wonyeo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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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