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의당 학술상] "혈액 암거래 등 매혈 폐해 막자" 김기홍 박사 등 선각자 중심 현혈운동 이끌어

 헌혈은 자신의 혈액을 무상으로 기증함으로써 생명 나눔을 실천하는 고귀한 행위다. 우리나라에서 혈액의 자급이 시도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수혈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당시 혈액 공급은 매혈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했다. 혈액의 암거래 등 매혈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해 김기홍·이문호·안부호·이삼열·강득용·원종덕·이종무·김상인 등의 선각자가 중심이 돼 헌혈 계몽 운동이 싹트고 뿌리를 내렸다. 정부는 관련 제도를 정비해 이를 뒷받침했다. 국내 헌혈 운동 전개에는 한국헌혈협회와 대한혈액관리협회가 크게 기여했다. 이들 선각자와 정부 및 관련 단체의 노력이 어울려 헌혈문화가 육성됐다. 헌혈 운동 전개 과정에서 국내 진단검사의학의 기초를 다진 의학자이자 교육자이며 탁월한 병원경영자였던 의당(毅堂) 김기홍(金箕洪) 박사는 한국헌혈협회 이사장, 대한혈액관리협회 회장으로서 크게 기여했다.
 
 
수도육군병원 병원장 조명제 대령이 수혈하고 있다. 국내에 수혈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 후다.

수도육군병원 병원장 조명제 대령이 수혈하고 있다. 국내에 수혈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 후다.

 
TBC(현 JTBC) 방송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이삼열 교수와 박진탁 목사가 헌혈자들과 좌담회 를 하고 있다

TBC(현 JTBC) 방송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이삼열 교수와 박진탁 목사가 헌혈자들과 좌담회 를 하고 있다

참담한 매혈 시대
 
 수혈이 우리나라 의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참담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상자 치료와 피난민 구호를 통해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한 단계 발전했다. 이때 부상자 치료에 쓰인 혈액은 모두 미국에서 공수됐다.
 
 혈액 자급 시도는 1952년 해군혈액고(海軍血液庫) 창설, 54년 백병원 혈액은행 설립과 정부 산하 국립혈액원 개설로 이어졌다. 이 같은 움직임을 통해 우리나라 혈액사업이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혈액 공급은 거의 매혈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대한혈액관리협회가 창설돼 헌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전까지도 서울 시내 대학병원을 비롯한 전국의 각 혈액원에는 매혈자가 끊이지 않았다. 당국의 눈을 피해 불량 혈액을 거래하는 비밀혈액취급소도 있었다. 혈액의 암거래, 직업적이다시피 한 공혈자(供血者)의 반복 채혈로 인한 당사자의 건강 악화와 혈액의 질적 저하 등 매혈의 폐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53년 12월 11일 대한적십자사와 대책 회의를 갖고 이듬해인 54년 6월 국립혈액원을 창설했다. 정부 주도로 혈액원을 만들고, 정부가 관리를 시작해 공혈자의 기준을 제한했다지만 기준체중 미달자, 혈액의 비중검사에서 불합격된 자의 채혈을 금지하는 정도였다. 여전히 혈액 수급은 매혈에 의존했다. 헌혈 홍보와 계몽 운동을 펼치려도 예산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런 가운데 56년 2월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매혈을 하고 돌아가던 대학생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같은 사건이 이어지자 정부는 혈액사업을 적십자에 이관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헌혈은 너무도 미미했기 때문에 적십자 역시 매혈에 의존했다.
1954년 수도육군병원 수혈부 채혈실에서 채혈하는 모습

1954년 수도육군병원 수혈부 채혈실에서 채혈하는 모습

 
 
헌혈 운동의 태동
 
 헌혈 계몽 운동은 60년대 중반에 들어와 일부 대학에서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 헌혈 실적은 지지부진했다. 학생들은 이론과 필요성에는 많이 공감했으나 선뜻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부모나 주위 사람의 몰이해가 가장 큰 이유였다. 헌혈자의 집으로 헌혈증이나 감사장을 보내면 이를 본 부모가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헌혈 사실을 비밀로 해주기를 원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헌혈 계몽 운동이 필요했다. 이의 계기는 69년 12월 싹텄다. 헌혈센터를 한국헌혈협회로 개편하는 발기인 모임이 개최됐다. 여기에서 당시 우석대학교 병원장이었던 김기홍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한국헌혈협회는 이후 71년 5월 정식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마침으로써 본격적인 사회사업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민간단체로서 범국민적인 헌혈 계몽 운동을 통해 사랑의 교류와 상부상조하는 기풍을 일으켜 국민 보건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활동했다.
 
 71년 9월 15일, 한국헌혈협회는 광화문 지하도에 헌혈의 집을 개원하고 본격적으로 헌혈 계몽과 헌혈을 실시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에 폐쇄됐다. 하루 평균 27명의 헌혈 실적을 올렸지만 정부는 혈액관리법에 의해 혈액원이 아니면 혈액원의 업무를 행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한국헌혈협회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국헌혈협회의 정신은 좋았지만 예산이나 정책적 뒷받침을 받지 못해 점차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한국헌혈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김기홍은 정부 혈액관리 자문위원회를 통해 혈액관리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한편 헌혈 확대와 혈액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정부 주도의 혈액관리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적십자사는 헌혈사업을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로 추진하고 헌혈협회도 헌혈 운동에 전력을 다하도록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70년 8월 혈액관리법을 제정해 헌혈 위주로 혈액 수요를 충당한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행정적·법적으로 헌혈을 뒷받침했다. 법이 제정되기까지는 매혈 풍토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헌혈 운동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김기홍·이문호·안부호·이삼열·강득용·원종덕·이종무·김상인 등의 공이 컸다.
 
 하지만 법령 제정 후에도 매혈은 없어지지 않았고, 의료기관은 혈액 부족에 시달렸다. 의료기관이 늘어나고 국민 의료 수요가 증가하는 데 비례해 혈액 소요량이 많아졌지만 경제 성장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 상대적으로 매혈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한혈액관리협회 발족
 
 한국헌혈협회 이사장을 지낸 김기홍은 혈액관리위원회와 각 시도 헌혈추진협의회를 둬 헌혈 추진을 조직화하고 적십자혈액원은 헌혈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과 장비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헌혈 확충을 위해 정부가 앞장서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면 정부의 후원을 받는 혈액관리 주도 단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혈액원의 시설기준을 강화하고 종사자를 교육할 기구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하지만 매혈 위주의 혈액 수급, 혈액원의 낙후된 시설과 영세성, 전문 인력 부족, 국가적 지원의 결여, 혈액원 감독 기능의 미비 등 혈액 관리 사고 발생 가능성이 있는 여러 요인은 근절되지 못했다. 혈액관리법 제정 후 혈액관리의 질서를 잡으려는 정부와 한국헌혈협회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72년 미군 군용 혈액 도난, 74년 오염 혈액 공급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한편 대한적십자사는 국제적십자연맹이 세계 헌혈의 해로 선포한 74년 혈액사업을 완전히 헌혈로 전환해 매혈을 일절 중지하고 헌혈로만 혈액을 공급하겠다고 천명했다.
 
 정부는 혈액 관리 사고가 이어지자 혈액관리법 개정에 착수하는 한편 대한혈액관리협회 설립을 추진했다.
 
1975년 9월 17일 거행된 대한 혈액관리협회 현판식 장면. 왼쪽부터 이호 적십자사 총재, 김기홍 회장, 고재필 보사부 장관. 대한혈액관리 협회 발족을 계기로 정부 주도하에 전국적 규모로 헌혈 운동이 시작됐다.

1975년 9월 17일 거행된 대한 혈액관리협회 현판식 장면. 왼쪽부터 이호 적십자사 총재, 김기홍 회장, 고재필 보사부 장관. 대한혈액관리 협회 발족을 계기로 정부 주도하에 전국적 규모로 헌혈 운동이 시작됐다.

오염 혈액 공급 사건을 계기로 매혈을 지양하고 헌혈을 권장할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이에 대한 법적 뒷받침이라든가 국민의 헌혈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당시 한국헌혈협회 이사장이었던 김기홍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한혈액관리협회 창설에 나섰다.
 
 대한혈액관리협회는 75년 8월 14일 서울 소재 적십자혈액원의 사무실 일부를 빌려 업무를 시작했으며, 창설 1년 6개월 만인 76년 12월에 가서 법의 보장을 받는 단체가 되면서 정부 산하 혈액관리사업 총괄단체로 자리를 잡았다(『한국헌혈운동사』). 대한혈액관리협회 회장으로 추대된 김기홍은 최우선 사업을 헌혈 풍토 조성으로 정하고 온 역량을 헌혈 계몽에 투입할 뜻을 나타냈다.
 
한국헌혈협회가 세브란스병원 에 지원한 헌혈차 앞에서 협회 인사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헌혈협회가 세브란스병원 에 지원한 헌혈차 앞에서 협회 인사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헌혈 운동을 주도했던 김기홍·이삼열·강득용·이종무 등은 헌혈을 촉진하기 위해 헌혈예치제도를 제안했다. 이는 크게 다음 같은 네 가지 내용으로 구성됐다. ①헌혈자에게 헌혈증서를 교부하되, 전국 어느 혈액원에서나 똑같은 양식이 되도록 혈액관리협회 명의로 교부한다. ②헌혈을 받은 혈액원은 이를 의료기관에 공급하고 받은 공급가액 중 일정액을 혈액을 환부해주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협회에 적립한다. ③헌혈자나 헌혈자의 직계가족은 전국 어느 의료기관에서나 헌혈한 혈액을 환부받아 무료로 수혈을 받을 수 있게 한다. ④수혈해 준 의료기관은 혈액대와 수수료를 협회에 청구해야 하며, 협회는 ②항의 적립금에서 의료기관에 보상해준다.
 
 대한혈액관리협회는 헌혈의 확충에 의한 혈액의 양적인 확보에서 더 나아가 환자에게 수혈되는 혈액의 안전성과 질적 향상, 지역 간의 혈액 공급 균형을 위한 사업에도 착수했다.
 
1976년 7월, 거리에서 헌혈 운동을 하는 세브 란스병원 헌혈팀과 격려차 들른 연세대 의대 이삼열 교수(대한혈액학회 회장?왼쪽).

1976년 7월, 거리에서 헌혈 운동을 하는 세브 란스병원 헌혈팀과 격려차 들른 연세대 의대 이삼열 교수(대한혈액학회 회장?왼쪽).

 
79년 헌혈로 90% 이상 충당
 
 77년에는 개정 혈액관리법이 시행되고 같은 법 시행령이 개정됨에 따라 혈액원 설치가 의무화된 종합병원들이 혈액원을 속속 개설하면서 회원 혈액원의 수가 105개에서 123개로 늘며 협회의 역량도 커졌다. 이렇게 협회 역량이 강화되자 광고와 음악회 등을 통한 계몽사업, 의사 및 간호사에 대한 교육, 혈액 연구사업, 헌혈환부적립금을 이용한 혈액원 시설·장비의 현대화 등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처럼 대한혈액관리협회 발족을 계기로 정부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헌혈 운동이 전개된 결과 76년에는 혈액 사용량의 절반을 헌혈로 충당할 수 있게 됐다. 77년에는 그 비중이 78%에 달하며 헌혈이 매혈을 압도하고 75년 협회 창립 이래 약 35만 병의 헌혈을 확보했다.
 
지속적으로 헌혈 계몽 운동을 펼친 결과, 1979년에는 헌 혈로 전체 혈액 소요량의 90%를 충당하게 됐다.

지속적으로 헌혈 계몽 운동을 펼친 결과, 1979년에는 헌 혈로 전체 혈액 소요량의 90%를 충당하게 됐다.

 이렇듯 헌혈이 확대되는 가운데서도 혈액사업을 둘러싸고 여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헌혈환부적립금 횡령 의혹 제기, 기독청년협의회의 헌혈제도 규탄대회, 모 혈액원의 헌혈부정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서 헌혈 계몽 운동을 전개한 데 힘입어 헌혈 의식은 확대됐다. 마침내 79년에는 헌혈이 전체 혈액 소요량의 90%를 넘어섰다. 정부의 뒷받침과 대한혈액관리협회 등의 활동이 어우러져 쌓은 금자탑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헌혈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2016년에는 286만6330명이 헌혈을 했다. 헌혈자 실인원만 159만6294명에 달했다. 의료 현장에서도 혈액이 부족해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던 많은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헌혈문화가 꽃피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승수 객원기자 kim.seungsoo@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