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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의 바둑경영] 일본이 바둑 최고봉에 올랐던 원동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인기소’ 제도 이후 바둑고수 쏟아지며 급속히 발전
 
세상의 주도권이나 패권은 바뀌게 되어 있다. 한 때 잘 나가던 기업이나 국가가 새로운 도전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한 쪽이 떠오르면 다른 한 쪽은 지는 해가 된다. 바둑에서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밀려 경쟁력을 잃은 상태가 됐다. 그러나 예전에는 일본이 세계 바둑계의 태양이었다. 일본 바둑은 어떻게 해서 최고봉이 되었다가 갑자기 추락하게 되었을까?
 
일본 바둑의 전환점
20년 전 명지대 바둑학과에서 외부 강사에게 바둑사 강의를 의뢰한 적이 있다. 그 때 그 강사가 구성한 커리큘럼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바둑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강사는 한국과 중국의 바둑사는 다룰 만한 내용이 없다고 보았던 것 같다. 일본의 숱한 고수들이 펼친 쟁투와 바둑 콘텐트야말로 진정한 바둑사라고 여겼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있지만 당시는 일본의 바둑기록이 바둑사의 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한국에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일본의 슈에이 명인과 둔 접바둑이 최초의 기보일 만큼 바둑에 관한 특별한 자료가 없었다. 그 무렵 독일에서 열린 바둑문화 전시회에서 한국에 자료를 요청했었다. 그러나 한국 바둑계에서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조훈현·이창호 9단 등 고수들이 세계 대회에서 기염을 토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화려했던 일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해서 바둑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을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바둑은 백제와 관련이 있다. 일본의 보물창고인 정창원에는 백제 의자왕이 선물을 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상아 바둑알이 있다. 그 옆에는 특별하게 제작된 목화자단기국이라는 바둑판이 있다. 이 바둑판도 백제에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많다.
 
바둑이 성행한 한·중·일 삼국 중 일본에는 바둑이 가장 늦게 전파됐다. 백제를 통해서나 중국 당나라를 통해서 바둑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600년경까지는 일본에도 이렇다 할 바둑자료가 없다. 두 승려가 바둑을 두다가 규칙에 관한 문제가 생기자 주지승에게 판정을 요구한 에피소드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문인들이 바둑에 관한 시를 많이 읊었다. 왕족이나 무인들도 바둑을 애호했다. 이순신 장군도 군무를 마치고 나면 바둑을 두곤 했다. 여러 자료로 보면 이 무렵까지 일본이 한국보다 바둑기술이나 문화면에서 앞섰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일본 바둑은 도약하기 시작한다. 그 후 20세기 말엽까지 약 400년 간 일본은 바둑계의 태양으로 군림했다. 그 결과로 바둑은 국제적으로 ‘Go(碁)’라는 일본어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일본의 바둑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국내 기사들이 연구하고 공부한 바둑서적이나 기보는 대부분 일본의 것이었다. 한국이 일본을 꺾고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하기 전까지 일본은 바둑계의 표준이었다. 이처럼 일본 바둑을 흥하게 한 인물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는 ‘명인기소(名人碁所)’라는 제도를 도입해 일본 바둑을 크게 발전시켰다.
 
일본 바둑 경쟁력의 원천 명인기소: 도쿠가와는 전국을 통일한 후 바둑을 장려했다. 일설에 따르면 칼부림에 익숙한 일본의 무사들이 바둑판 위에서 싸우도록 하려는 취지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병사들의 공격성을 반상의 영토전쟁에서 발휘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닛까이라는 바둑 사범과의 친분도 작용했다.
 
도쿠가와는 일종의 바둑관직인 명인기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명인기소에 취임하는 고수가 명인(9단)이 되어 바둑계를 통솔했다. 그 아래로 준명인(8단), 상수(7단)와 같이 고수들의 서열을 매겼다. 명인기소에 취임하는 명인은 바둑계의 CEO가 되는 셈이었다. 이 명인기소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됐다. 바둑시합을 해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최고봉이 되니 자연히 바둑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시스템이 등장했다. 바둑고수를 양성하는 바둑도장 격인 ‘기원4가’가 만들어졌다. 마치 무협소설의 소림파 무당파 등과 같이 혼인보가 이노우에가 등의 바둑문파가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각 문파의 제자들이 전문적으로 바둑의 기예를 연마했다.
 
그러니까 도쿠가와가 만든 명인기소로 인해 일본의 바둑은 일종의 스포츠경기가 된 셈이다. 정상에 서기 위해 실력을 닦고 겨루면서 오늘날로 치면 프로바둑선수들이 배출된 것이다. 현대에 와서 이 시스템은 프로기사제도로 이어졌다. 이 제도는 조남철 9단에 의해 한국에도 도입됐다. 1937년 일본으로 유학을 간 조남철은 프로 초단 자격을 취득한 후 귀국해 프로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가 결실을 맺어 약 50년 후에 일본을 누르고 세계를 제패하게 된다.
 
결국 일본의 권력자 도쿠가와가 만든 명인기소는 전문가들의 경쟁체제를 만들어 일본을 바둑 분야의 최고봉으로 만든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례로 보면 여러 분야에서 고수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며 전문능력을 향상시키는 시스템이 중요한 것 같다. 국가나 기업에 다양한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면 그만큼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다.
 
프로제도의 유산
일본에서는 명인기소 제도 이후 많은 바둑 고수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사랑방에서 오락으로 바둑을 즐기던 시절에 일본에서는 전문기사들이 속속 배출된 것이다. 4대 바둑문파 중 가장 위세가 있었던 혼인보가에서 걸출한 고수들이 많이 나왔다. 기성(棋聖)으로 불린 도사쿠와 슈사쿠 같은 뛰어난 실력자들이 나와 바둑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도사쿠 명인은 ‘수나누기’라는 바둑수 분석법을 개발해 냈는데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슈사쿠가 애용한 ‘슈사쿠류 포석’도 전수되고 있다. 또한 슈사쿠가 애용한 ‘영원불멸의 호수’도 있다.
 
[1도] 도사쿠가 창안한 수나누기 방법을 보자. 오른쪽과 같은 모양이 나왔을 때 흑과 백 중 누가 유리한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아래쪽과 같은 정석을 끌어온다. 이 정석을 통해 오른쪽 모양을 분석해 보면 흑 A로 둔 것은 백의 악수, 흑B로 둔 것은 흑의 악수이고 흑C로 두게 한 백의 악수가 하나 더 있다. 백이 악수를 하나 더 두었으니 이 모양은 흑이 유리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수나누기 방식은 기업에서 신모델과 구모델을 비교할 때 응용해 볼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정책과 기존의 정책을 비교할 때도 써먹을 수 있다.
 
[2도]는 슈사쿠 명인이 애용한 슈사쿠류 포석이다. 흑1에서 5까지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는 소목을 둔 것이 특징인데 여기서 흑7에 둔 수가 영원불멸의 호수로 통하는 수다. 이 수는 자신의 자세를 갖춰놓고 공격이나 집차지 등을 보는 등 함축성이 풍부한 수다.
 
[3도] 슈사쿠가 애용한 마늘모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등장했다. 이런 포석에서 백6으로 둔 수가 슈사쿠의 마늘모다. 백이 덤에 의존해 유유하게 이끌어간다는 취지에서 현대바둑에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전문가 시스템을 일찍 구축한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보다 훨씬 뛰어난 바둑기술과 제도를 발전시켰다. 또한 명인고수들의 승부스토리와 기보 등 풍부한 바둑 콘텐트를 남겼다.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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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