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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세 현역 주방장 “60년째 오늘도 나는 갈비를 굽는다”

 박찬일의 음식만행(飮食萬行) 조선옥 ‘종신’ 주방장 박중규옹
 
80년 역사의 갈빗집 '조선옥'의 소갈비 한 접시. 조선옥 갈비는 한쪽만 고기가 붙은 외갈비가 아니다. 뼈 양쪽으로 고기가 붙어 있다. 뼈에 고기를 붙이는 갈비는 외갈비만 가능하다. 김경빈 기자

80년 역사의 갈빗집 '조선옥'의 소갈비 한 접시. 조선옥 갈비는 한쪽만 고기가 붙은 외갈비가 아니다. 뼈 양쪽으로 고기가 붙어 있다. 뼈에 고기를 붙이는 갈비는 외갈비만 가능하다. 김경빈 기자

 “하루 최고 일흔다섯 짝까지 팔아봤소. 소 한 마리에 갈비가 두 짝이니 서른일곱 마리 정도 되나요. 한 짝에 그때 25인분이 나왔으니까 인분수로는 얼맙니까.”
25인분 곱하기 75짝 하니까 1875인분이다.  

80년 역사의 소갈빗집 ‘조선옥’
60년 경력의 갈비구이 주방장
"하루에 1875인분 팔아봤다"

갈비에 담긴 우리네 현대사
60년대까지 최고 외식 메뉴
“갈비 뜯는다? 잘 산다는 뜻”

“그렇다고 손님 수가 그렇게 되진 않아요. 한 사람이 기본 서너 대는 먹고, 어떤 이는 열 대도 드셨으니까 말이지.”  
 
먼 기억을 되살리느라 박중규 주방장의 눈이 가늘어진다. 올해 일흔아홉 살. 열아홉 살에 시작한 갈비구이로 60년 세월을 맞았다. 국내 최고령 주방장급이다. 보통 우리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여성 요리사를 둘러봐도 ‘팔순급’ 주방장은 희귀하다. 게다가 남자는 더욱. 근력이 떨어지고 눈이 침침해져 칠순 넘어서는 못한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게 오랫동안 고용을 유지하는 업주도 드물다. 정년이 있으니까.  
 
“휴무 같은 건 없었어요. 추석과 구정(설날)에나 며칠 쉬었지. 새벽에 나와서 밤 10시나 끝나는 일이오.”
노구를 이끌고 그가 갈비를 굽는다. ‘19공탄’을 피워 올린 화덕에 양념 갈비가 척척 올라가고, 기름진 연기를 뿜으며 익어간다.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 기운이 주방장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저녁에 들르면 홀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갈비구이 화덕 앞에 그가 늘 서 있다.  
 
 국내 최장기 근로소득세 납부자 
조선옥의 '종신' 주방장 박중규옹. 팔순이 코앞인데도 여전히 날마다 연탄 화로 앞에서 갈비를 굽는다. 김경빈 기자

조선옥의 '종신' 주방장 박중규옹. 팔순이 코앞인데도 여전히 날마다 연탄 화로 앞에서 갈비를 굽는다. 김경빈 기자

나는 팔순이 넘은 조리장 두어 명을 아는데, 실제로는 요리는 하지 않고 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살아 있는 현역이다. 언제든 ‘조선옥’에 앉아 그가 갈비 굽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저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어쩌면 역사적 장면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사실상 종신직으로 일할 예정이다. 조선옥 3대 사장 김진영(55)씨의 요청이기도 하다.
 
“나중에 서 있을 기운이 없으면 앉아 계시기만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일꾼은 누구나 평온한 은퇴를 꿈꾼다. 그러나 그는 운명처럼 갈비를 구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허는 데까지는 해야지요. 모르겠어요. 일할 수 있으니까 좋긴 합니다. 허허.”
 
그는 아마도 국내 최장기 근로소득세 납부자 중 하나일 것이다. 국민연금은 일찌감치 납부 종료다. 첫 월급이 8000원이었고, 현 급여는 비밀인데 대형 한식당 주방장 수준은 된다. 팔순 가까이 되도록 월급을 계속 올려주었다는데, 이런 사장도 참 별나다. 원래 조선옥은 장기 근속으로 유명하다. 통상 정년이 없다. 전 주방장 김봉화씨도 72세에 퇴직했다. 이 밖에도 많은 이들이 칠순을 넘겨 보따리를 쌌다. 한때 조선옥 장기 근무자들의 모임도 있었다.  
 
조선옥 3대 사장 김진영씨. 정년 없는 노포의 법칙을 만들어간다. 김경빈 기자

조선옥 3대 사장 김진영씨. 정년 없는 노포의 법칙을 만들어간다. 김경빈 기자

조선옥은 1937년 개업했다. 김사장의 친할머니 이금순(1922∼92)씨가 조선옥의 성장기를 이끌었다. 60∼70년대가 조선옥의 황금기였다. 서울 시내에서 갈비를 먹을 만한 곳으로는 조선옥이 첫 손가락에 꼽혔다. 명동의 유명한 00갈비, 조선옥 인근의 갈비구이 전문집 00집도 여기에서 일을 배운 이가 나가서 주방을 맡아 차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강남 등지에 있는 조선옥 상호의 갈빗집은 이 집과 아무 관계가 없다.  
 
“70년대 이 근처에 ‘속리산고속’이 있었어요. 당시는 서울 시내 여러 곳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나뉘어져 있었거든. 버스 손님들이 아침을 먹으러 7시부터 가게에 줄을 섰어요. 그러니 직원은 몇 시에 나와야 하겠어요. 하루 종일 손님이 많았지요. 충무로도 가까워 영화인도 단골이었지. 최은희ㆍ김진규ㆍ이예춘ㆍ송해ㆍ김승호씨가 기억납니다. 기라성 같았지. 가수 배호도 종종 왔고. 나더러 고기 좀 잘 구워달라고 했었어요. 그때 이미 얼굴이 많이 부어 있었지(배호는 신장병으로 요절했다).”
 
갈비는 50, 60년대에 이미 최고 외식으로 등장했다. ‘불고기는 한일관’ ‘갈비는 조선옥’이라고 했다. 당시 언론은 ‘시중에 갈비짝 품귀’라는 기사를 썼다. 선물용으로 최고 인기라는 것이었다. 해방 전에는 ‘가리구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다가 갈비로 굳어졌다.  
 “갈비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어요. 우리집 손님들도 큰 맘 먹고 오는 거지요. 근처에 우래옥ㆍ한일관ㆍ서래관 등이 있었는데 다 불고기가 전문이었고 갈비는 드물었어요. 갈비 뜯자면 우리집에 몰리는 거지.”
 
 갈비의 사회사 
갈비는 우리 외식사와 사회사의 상징인 음식이다. ‘갈비 뜯고 산다’는 말을 부유함의 비유로 쓰기도 했다. 80년대 강남 개발의 상징이 ‘가든’이라거나 ‘농원’이라는 이름의 갈빗집 번성이었다. ‘마이카’를 끌고 교외로 나가서 먹는 음식으로도 갈비가 으뜸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갈비는 다 외갈비요. 우리처럼 양쪽으로 벌리는 갈비는 거의 없어요. 외갈비는 한쪽으로만 고기를 펴니까 고기를 얇게 벌릴 수 있고 커 보이거든. 무엇보다 고기를 붙여 쓰려면 외갈비라야 가능하니까.”
 
붙여 쓰는 갈비가 가짜라 하여 업자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기어이 2005년, 대법원까지 나섰다. 판결은 좀 뜻밖이었다. 현실을 감안한 현명한 결정이라는 후문이 나왔다. 뼈에 고기가 조금이라도 붙어 있는 상태에서 다른 고기를 더 붙이면 갈비라고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선옥의 ‘붙이지 않은 갈비’가 법정으로 배달되는 소동도 있었다. 판사가 직접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판결 이후로 소갈비는 한동안 갈빗집 주인 양심의 척도가 되었다. 붙이는 고기의 품질이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갈비는 육향과 씹는 감촉, 양념의 배합으로 맛을 낸다. 조선옥은 지금도 갈비를 짝으로 받아 손질한다. 김경빈 기자.

갈비는 육향과 씹는 감촉, 양념의 배합으로 맛을 낸다. 조선옥은 지금도 갈비를 짝으로 받아 손질한다. 김경빈 기자.

조선옥의 갈비는 뜯는 맛이다. 외갈비는 채끝 같은 다른 부위를 넓게 붙이므로 고기 자체의 맛을 즐기게 되지만, 조선옥은 뼈에 붙은 고기를 뜯어먹는 재미가 있다. “원래 갈비를 ‘뜯는다’ 하지 않았소. 붙여 쓰면 고기 양은 풍성하지만 뜯을 게 거의 없을 수밖에 없고.”
 
주방장의 팔뚝은 지금도 탄탄하고 심줄이 두드러진다. 일하는 자의 근육이다. 요즘은 골절기로 갈비를 썰지만, 오랫동안 작두질로 갈비를 추렸기 때문이다. 갈비만 60년을 다룬 주방장에게 좋은 갈비를 물었다. 암소갈비가 역시 최고일까.  

 
“장단점이 있어요. 옛날 황소는 뼈가 굵고 맛이 진했어요. 그런데 질겨. 일을 했으니까. 암소도 새끼를 많이 낳은 건 기름이 많아서 가게가 불리해요. 암소 자체가 빵(살의 은어)도 작고. 그래도 부드러우니까 많이들 선호합니다. 요새는 황소가 사실상 없고, 거세한 소라 또 달라요. 거세우보다는 암소가 그래도 좋습니다.”
 
정답이 없다. 요즘은 과거보다 갈비짝 작업이 어렵다고 한다. 비육우(肥肉牛)가 100%이니까 부드럽지만 기름이 많아서 손질을 많이 해야 한다. 육향도 옅어졌고 씹는 맛도 줄었다.  
 
 150원이던 양념갈비 지금은 3만원 넘어
조선옥의 갈비 맛은 적어도 60여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설탕ㆍ진간장ㆍ마늘ㆍ참기름이 전부다. 대파와 양파는 안 쓴다. 잡맛이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을 숙성한다. “설탕을 옛날보다 줄인 것 말고는 비슷해요.” 지금 갈비를 대는 거래업체는 50년이 넘었다. 오래된 가게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신용으로 장기 거래한다는 점이다.  
 
“예전엔 갈비가 품귀가 되기도 했어요. 그러면 어디 고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기도 했어요. 응암동에 도축장이 있었는데, 갈비 다섯 짝을 뺏듯이 사서는 리어카에 싣고 무악재를 넘어오던 기억이 납니다.”
 
조선옥의 냉면. 갈비와 냉면의 궁합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흥미롭게도 조선옥 3대 사장 김진영씨의 대학원 논문 주제가 냉면 육수였다. 김경빈 기자

조선옥의 냉면. 갈비와 냉면의 궁합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흥미롭게도 조선옥 3대 사장 김진영씨의 대학원 논문 주제가 냉면 육수였다. 김경빈 기자

지금 조선옥은 제2의 창업을 했다. 2층 객장을 리노베이션 해서 멋지게 만들었다. ‘조선옥 더 옥 The Oak’라고 붙였다. 김사장의 선친 김정학씨가 원래 지어둔 영문 이름이라고 한다. 김씨는 바둑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월간 바둑’을 창간하기도 했다. 2층 곳곳에 아버지의 기억을 입혔다. 별실 이름도 바둑 용어이고, 식탁 매트에 바둑판무늬를 응용했다. 원래 조선옥은 갈비구이집이었지만, 한식 전문이었으니 탕 같은 요리도 많았다. 이런 요리를 조선옥에서 다뤄볼 심산이다.
 
김사장은 어려서부터 가게를 드나들며 귀여움을 받았다. 그때 일하던 직원들을 찾고 있는데 연락이 없다. ‘가평아줌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김계화씨, 가게의 각종 수선을 맡았던 최학수씨 등이다. 조선옥의 역사 되찾기 작업이랄까. 김사장은 조선옥이 나온 옛 사진을 공모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한 접시 150원이었던 갈비가 이제 3만원이 넘는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 그래도 여전히 화덕 앞에는 노 주방장이 부지런히 진한 양념을 끼얹으며 갈비를 굽고 있다. 갈비 맛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박찬일  
 글 잘 쓰는 요리사. ‘로칸다 몽로’ ‘광화문 국밥’ 등을 운영하며 음식 관련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본인은 ‘한국 식재료로 서양요리 만드는 붐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불리는 걸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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