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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대신 거세당하고 진실을 기록했던 사람

기자
김준태 사진 김준태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5)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던가
 
 
사마천 초상화. [그림 김준태]

사마천 초상화. [그림 김준태]

 
박경리 선생이 쓴 '사마천(司馬遷)'이라는 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마천은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치욕을 감내하고 『사기(史記)』라는 불후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장엄한 삶을 이 글에서 모두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가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났던 그 날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기원전 99년 한(漢)나라 조정은 크게 술렁였다. 이릉(李陵)이 흉노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릉은 뛰어난 무장으로 보병 5000명을 거느리고 열 배가 넘는 흉노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중과부적. 화살은 모두 바닥이 났고 병사들도 지쳐갔다. 흉노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채 며칠 밤낮을 싸웠지만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릉은 남은 부하라도 살리기 위해 부득이 흉노에 투항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漢武帝)는 크게 진노했다. 문명 대국 한나라의 군대가 오랑캐로 치부하는 흉노에게 패했으니,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황제의 자존심이 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제의 눈치를 보던 신하도 하나같이 이릉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흉노에 투항한 장수 옹호한 사마천
그런데 이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 다른 목소리를 낸다. 바로 사마천이었다. 
“이릉은 항상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하며 작은 것도 나누었기에 부하들은 죽음을 마다치 않았습니다. 비록 패하였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적은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훗날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뒤에서 편안하게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 신하들이 그의 단점을 부풀려 말하니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그러면서 최고 지휘부의 작전실패도 지적했다. 이릉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뿐으로,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살이 사마천에게로 향했다. 작전실패를 거론한다는 것은 무제가 총애하던 이광리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인 데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황제에게 찬물을 끼얹으니 황제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광리를 비난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기원전 97년 항복한 이릉이 흉노족 지도자에게 병법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면서 이릉의 가족이 몰살됐고, 사마천의 처지도 더욱 어려워졌다.
 
 
한무제 [사진 baidu.com]

한무제 [사진 baidu.com]

 
사형을 앞둔 사마천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냥 사형을 받든지, 돈 50만전을 내고 감형받든지, 아니면 대신 궁형(宮刑)을 당해 사형을 면제 받든지다. 이 중에서 사마천은 궁형을 자청했는데, 그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치욕적인 궁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치욕의 궁형을 선택한 이유
50만전이야 가난해 도저히 마련할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마흔아홉의 나이에 그는 목숨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을까? “저는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무슨 행동을 하든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고, 더 잘하려 해도 더욱 나빠집니다.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으니, 저와 같은 인간이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거세되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탄하면서 말이다.
 
사마천이 ‘고통을 견디면서 구차하게 더러운 치욕 속에 빠지길 마다치 않았던 것’은 자신의 사명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훈, 수많은 임금·신하·선비의 일대기를 기록해 후대의 교훈이 되게 하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그는 굴욕을 감수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문왕은 옥에 갇혀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곤경에 처해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를 썼고 좌구명은 눈을 잃은 뒤에 『국어』를 저술했다. 손빈은 발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남겼으며 여불위는 촉 땅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여람』을 남겼다.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과 『고분』편을 지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 무엇이 맺혀 있었지만 그것을 밝힐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서술해 후세 사람들이 자기 뜻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마천은 역사서를 집필하며 옛사람들을 떠올렸다. 공자, 굴원, 좌구명, 손빈…. 이들은 절망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았다. 자기 생각이 집약된 책을 남김으로써 다음 세대에 희망을 걸었다. 그도 이러한 선배들을 뒤따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필에 전념하기를 오랜 시간, 마침내 그는 『사기』를 탈고한다. 불멸의 이름을 남긴 역사서 『사기』를.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akadem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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