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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시대에 생각하는 통합의 지도자-그는 적을 끌어안았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4월 13일은 그 유명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이 프랑스에서 선포된 날이다. 420년 전인 1598년 이날 프랑스 국왕 앙리 4세(1553~1619)는 서부 도시 낭트에서 신교도의 권리를 인정하는 이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를 동시에 얻고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 
1598년 4월 13일낭트 칙령을 선포해 국민 통합을 추구한 앙리 4세가 국왕에 오르기 전 신교도인 위그노 지도자로서 위그노 내전에서 싸우는 모습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의 그림. 가운데 갈색 말을 탄 인물이다. 앙리 4세는 신교도 지도자인데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내전을 종식했으며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들의 신앙의 자유와 시민 권리를 인전해 공존 시대를 개막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위키피디아]

1598년 4월 13일낭트 칙령을 선포해 국민 통합을 추구한 앙리 4세가 국왕에 오르기 전 신교도인 위그노 지도자로서 위그노 내전에서 싸우는 모습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의 그림. 가운데 갈색 말을 탄 인물이다. 앙리 4세는 신교도 지도자인데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내전을 종식했으며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들의 신앙의 자유와 시민 권리를 인전해 공존 시대를 개막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위키피디아]

 
낭트 칙령 선포는 단순한 종교적 관용이나 신앙의 자유만 보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종교 내전으로 분열된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용기 있는 휴머니즘적 조치로 평가된다. 이를 선포한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에서 ‘선량왕 앙리(le bon roi Henri)’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앙리 대왕(Henri le Grand)’으로 불리며 존경받는다. 프랑스 역사에서 이런 평가를 받는 군주는 드물다. 프랑스인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고 존경받는 지도자의 한 명으로도 꼽힌다.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이나 루이 14세, 샤를 드골과 같이 세계사에 기록된 지도자가 적지 않다. 하지만, 앙리 4세는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이익을 넘어 자신을 희생하며 국민 통합과 평화, 번영을 추구한 사심 없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통합의 지도자라는 점이다. 앙리 4세는 서로 찢어지고 분열된 것은 물론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을 정도로 증오하며 총칼을 겨눴던 프랑스의 가톨릭교도와 신교도를 하나의 국민으로 묶어냈다. 그는 권력자였지만 정치적 이익을 위해 편 가르기를 부추기지 않았다. 대신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하나로 만드는 포용과 관용의 리더십을 펼쳤다. 앙리 4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첫 국왕이다. 1589~1610년 프랑스 국왕을 지냈으며 1572년 프랑스 남동부 소왕국인 나바라의 국왕에 올라 1610년까지 다스리기도 했다. 
낭트 칙령을 반포한 앙리 4세의 초상. 신구교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국민통합을 시도했다. [위키피디아]

낭트 칙령을 반포한 앙리 4세의 초상. 신구교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국민통합을 시도했다. [위키피디아]

  
원래 신교도인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앙리 4세는 프랑스 국왕에 오르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대신 위그노의 신앙과 권리를 보호하는 낭트 칙령을 내렸다. 프랑스 국민의 국왕으로서 내 편과 적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신·구교도 모두를 껴안은 조치다. ‘나만 옳다’ ‘나만 정의롭다’ ‘나만 신을 바르게 따른다’는 도그마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공존할 수 있도록 균형을 추구했다. 프랑스 전역을 황폐화하며 국민을 기아 선상으로 내몰고 역사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위그노 전쟁은 그의 희생과 협상력, 균형감각에 힘입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국민 통합을 추구해 평화와 번영의 문을 연 군주다. 앙리 4세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어느 공동체, 어느 국가에서도 필요한 지도자일 것이다.  
위그노 내란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 군대가 개신교도인 위그노를 박해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

위그노 내란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 군대가 개신교도인 위그노를 박해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

 
앙리 4세의 낭트 칙령 선포 이전 프랑스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전임 국왕인 발루아 왕가의 프랑수아 1세(1494~1547년, 재위 1515~1547년)와 앙리 3세(1551~1589년, 재위 1574~1589년)는 가톨릭 이외의 신앙을 가진 자를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차별과 박해의 법을 만들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서 위그노 세력이 확산하자 인정하는 대신 박해에 나섰다. 한술 더 떠 이를 고발한 사람에게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주는 조항을 만들어 고발을 부추겼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으로 이 잔혹한 개신교도 탄압법을 폐지했다. 낭트 칙령은 위그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금지하고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 평화와 번영의 길을 열었다. 이 차별과 박해는 30년 이상 계속됐던 신·구교도 간 내전인 위그노 전쟁(1562~1598년)의 원인이 됐다. 가톨릭 세력의 눈치를 보는 대신 국민 전체의 미래를 위해 앙리 4세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프랑스 왕비로 아들 중 세 명과 사위 1명이 프랑스 국왕에 오른 카트린 드 메디치. 이탈리아 피렌체의 금융 가문인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세력균형을 추구하다 개신교인 위그노의 세력이 확산할 것으로 우려되자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을 배후조종했다/ [위키피디아]

프랑스 왕비로 아들 중 세 명과 사위 1명이 프랑스 국왕에 오른 카트린 드 메디치. 이탈리아 피렌체의 금융 가문인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세력균형을 추구하다 개신교인 위그노의 세력이 확산할 것으로 우려되자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을 배후조종했다/ [위키피디아]

  
카트린 드 메디치는 위그노 세력의 지도자로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왕국 나바라의 국왕인 앙리 4세(나바라 국왕으로서는 앙리 3세)를 ‘마고’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1553~1615)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신·구교도를 화합시킬 목적인지, 신교도 지도자를 회유하려고 한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1572년 앙리 4세는 1만 명의 위그노를 거느리고 파리에 들어와 8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결혼식이 열리는 동안 신교도인 신랑 앙리 4세는 교회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만 머물렀을 정도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1주일 뒤인 8월 24일은 성바르톨로메오를 기리는 축일이었다. 이날 축일을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가톨릭교도는 총을 들고 신교도를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가톨릭 강경파의 지도자인 기즈공작 앙리 1세(1550~1588)가 신교도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카트린 드 메디치와 교감 아래 벌인 학살극이었다. 
 

신교도 사냥이라는 표현이 차라리 더욱 정확했을 것이다. 그날 파리에서만 5000명 이상의 위그노가 살해됐다. 파리는 피의 진창이 됐다. 파리 외의 지역에서는 10월까지 그보다 더 많은 위그노가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가톨릭 세력은 신교도를 학살해 씨를 말리는 방법으로 내전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 학살은 조금씩 잠잠해져 가던 위그노 전쟁에 새롭게 기름을 부은 셈이 됐다. 당시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학살이 벌어지자 감사 미사를 올리고 기념주화까지 제작했다. 바티칸이 책임을 인정한 것은 1997년이 되어서다. 그해 8월 23일 제12회 세계 청년의 날을 맞아 파리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독교도들이 복음에 반하는 일을 저질렀다”며 책임을 인정하고 “상호 용서만이 서로 결실 있는 대화를 조금씩 이어가게 해줄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다.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가톨릭 교도들이 신교도인 위그노를 학살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나만 옳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가져온 역사의 비극이다. 바티칸은 1997년 책임을 인정하고 상호 용서를 구했다. [위키피디아]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가톨릭 교도들이 신교도인 위그노를 학살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나만 옳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가져온 역사의 비극이다. 바티칸은 1997년 책임을 인정하고 상호 용서를 구했다. [위키피디아]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앙리 4세는 궁전에 갇혀 장모인 카트린 드 메디치와 왕비(당시엔 나바라 왕국의 왕비)인 마르그리트를 비롯한 프랑스 왕실의 보호 속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심약한 샤를 9세는 죄책감 속에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 앙리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앙리 4세는 1576년 왕비의 도움을 받아 궁전에서 탈출한 뒤 위그노 군대를 지휘해 가톨릭과 치열하게 내전을 계속했다. 
 
내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1584년 왕위계승 예정자였던 프랑수아(1555~1574) 공작이 세상을 떠났다. 프랑수아는 자식이 없던 앙리 3세의 동생이다. 이로써 발루아 왕가는 남자 왕위계승 예정자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앙리 4세가 왕위계승 예정자로 떠오른 것이다. 
이유는 고대 프랑크족의 부족법에서 비롯한 살리카 법전(Lex Salica) 때문이다. 고대 프랑크족의 후예인 프랑스 왕가는 이 법전에 따라 여왕을 허용하지 않고 남성만 군주로 옹립했다. 발루아 왕가의 대가 끊기면 방계인 부르봉 가문에서 국왕을 내기로 되어 있었다. 두 가문 모두 독립국 프랑스의 첫 왕조인 카페 왕조에서 비롯했다. 가톨릭 군주인 앙리 3세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나면 위그노 지도자인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되는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톨릭 세력은 양분됐다.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주도한 기즈공작 앙리 1세와 그의 동생인 루이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앙리 3세를 비롯한 온건파는 타협을 원했다. 앙리 3세는 1588년 가톨릭 강경파가 득세했던 파리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오히려 밀려 파리를 떠나야 했다. 앙리 3세는 극단적인 해결법을 모색했다. 자객을 보내 그해 12월 23일 기즈공작을, 24일 루이 추기경을 각각 암살했다. 앙리 3세는 가톨릭 온건파 군대를 이끌고 앙리 4세의 위그노 군대에 몸을 의탁했다. 하지만 가톨릭 강경파의 한 수사가 기즈 형제의 죽음을 복수한다며 앙리 3세를 암살했다. 
  

이로써 앙리 4세는 남자 대가 끊어진 발루아 왕가를 대신해 프랑스 국왕에 오를 자격을 얻게 됐다. 그는 위그노 군대를 이끌고 파리를 포위했다. 포위된 파리에선 식량이 떨어져 3만 명이 굶어 죽었지만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고뇌하던 앙리 4세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자기 자신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1593년 7월 25일 개신교 신앙을 영원히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파리는 미사를 올릴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며 개신교도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듬해 2월 27일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파리에 입성했다. 그는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어떤 농민도 일요일에 냄비에 닭 한 마리를 넣을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일요일마다 냄비에 닭 한 마리씩”으로 축약돼 알려진 이 발언은 그가 내란에 시달린 프랑스 농민의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렸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신앙과 신념을 앞세우며 필사적으로 싸웠던 가톨릭교도들도 냄비에서 고기 끓는 냄새는 그리워했다. 지도자는 통합이나 화합과 함께 경제적 번영도 반드시 생각해야 함을 보여준다. 
 

개신교도들이 앙리 4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비극적인 내란을 끝내고 국민을 통합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 길만이 후손들에게 번영의 미래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앙리 4세는 자신과 오랜 세월 함께했던 위그노도 잊지 않았다. 결국 낭트 칙령으로 프랑스에 통합과 안정, 평화와 번영을 동시에 가져왔다. 지도자는 자신의 믿음이 아닌 국민을 위해 결단해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도자에게 무엇이 더 중한지를 알려면 앙리 4세를 보아야 한다. 
 
선량왕으로 불리며 국민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톨릭 자객의 암살 위협을 받다가 1610년 5월 14일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당했다. 자신만 옳다고 믿는 광신도는 예나 지금이나 위험한 법이다. 종교적 광신도는 물론이고 정치적 광신도, 사상적 광신도에게도 적용된다. 
 
앙리 4세가 선포한 '낭트 칙령'의 원본 서류. 관용과 공존을 위한 노력의 흔적으로 평가된다.

앙리 4세가 선포한 '낭트 칙령'의 원본 서류. 관용과 공존을 위한 노력의 흔적으로 평가된다.

사후 그를 칭송하는 노래인 ‘앙리 4세 행진곡’이 등장해 부르봉 왕조 시절 국가로 사용했다. 국민은 평소에도 이를 즐겨 불렀다. 1661년 그의 전기도 나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돼 전 유럽에서 읽혔다. 1614년 파리 퐁뇌프 다리 위에 동상이 들어섰다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사라졌지만 1818년 옛 군주의 동상 중 가장 먼저 재건돼 지금까지 서 있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도 1723년 앙리 4세를 칭송하는 『앙리아』라는 서사시집을 출간했다. 볼테르는 종교적·사상적 광신주의에 맞서 관용주의와 공존을 주장하며 휴머니즘을 주장한 사상가다. 증오와 편 가르기를 그만두고 관용과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앙리 4세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이다. 자기를 희생한 이런 화합의 지도자를 그리워하는 건 프랑스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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