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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에서 젊은 귀인을 만나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14> 세메이: 한 숨 돌리기 

노보쿠즈네츠크 기차역에서 오후 5시 45분에 출발하는 비슈케크행 완행열차를 탔다. 이번 목적지는 일곱 개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중 유일하게 러시아 밖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도시 세메이다. 19세기에는 러시아 톰스크주에 속한 도시로, 이름도 세미팔라틴스크였다. 도스토옙스키는 1854년 2월 15일 형기를 마치고 시베리아 제7보병 대대에 사병으로 배속돼 1859년 7월 2일 전역할 때까지 5년 반을 이곳에서 살았다. 마침내 그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지만, 한 숨 돌리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엔 충분했다. “나는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나 마찬가지였다.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살아났을 때 생명의 환희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희망으로 넘쳤다. 나는 너무나 살고 싶었다.”  
사병 시절의 도스토옙스키

사병 시절의 도스토옙스키

 
기차 안은 에어컨이 없어 무척 덥다. 피곤해 보이는 중앙아시아인들이 짐을 이고지고 계속 올라탄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숲이 이어진다. 밤 9시까지
도 해가 남아 전나무숲과 백양나무숲, 자작나무숲 사이로 잔광이 불그스름하게 비친다. 열차 한 량에는 9개의 객실이 있다. 다들 객실 문을 활짝 열고 오순도순 저녁식사를 한다. 아이는 울고, 숲은 장엄하고, 해는 아주 서서히 진다.  
 
새벽에 국경에 도착했다. ‘로코트’라는 낯선 지명의 역에서 검문소 직원들이 들어와 여권심사를 한다. 밤새 기온이 뚝 떨어져 옷을 여러 벌 겹쳐 입었는데도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기차는 거의 2시간 가량 정차해 있다. 서 있는 기차가 얼마나 이상한지 비로소 깨닫는다. 객실마다 식사 준비로 분주하다. 옆방 차장들은 아침부터 삶은 달걀과 햄과 닭다리와 흑빵에 보드카를 곁들여 푸짐한 식사를 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충심으로 도운 브란겔

도스토옙스키를 충심으로 도운 브란겔

 
다시 기차가 달리고 이제 카자흐스탄 영토다. 역시 낯선 이름의 도시 ‘아울’에서 군복 입은 젊은이가 올라타 꼼꼼하게 입국심사를 한다.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 왔다”고 하니 여간 반가워 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도 기차는 1시간 반 가량 멈춰서 있다. 어디선가 화려한 꽃무늬 티셔츠와 딱 붙는 바지를 입고 짙게 화장한 넉넉한 체구의 아주머니들이 올라탄다. 비닐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복도를 오가며 외친다. “코냑 있어요, 보드카 있어요, 차 있어요….”  
 
죄수에서 사병으로 그것만으로도 행복
세메이는 1990년대에 구소련이 핵실험을 했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여길 꼭 가야하나 하고 한참 망설였다. 선입견 때문인지 공기는 실제보다 더욱 탁하게 느껴졌다. 햇살은 강하고 먼지바람에 눈이 따가웠다. 사람들은 친절해서 길을 물으면 누구나 성심껏 가르쳐주었다. 세계적인 대문호가 이곳에서 5년이나 살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모스크바에서 30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 소도시에 이토록 웅장한 기념관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1971년 5월 7일, 도스토옙스키가 신혼 생활을 시작한 통나무집에 기념관이 세워졌고 5년 뒤에는 별관이 건축됐다. 모스크바 출신의 건축가 블라소프가 지은 별관은 반쯤 펼쳐진 책의 형상을 하고 있어 그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석조 기념비다.  
 
“세미팔라틴스크는 반은 도시고 반은 시골인 곳이다. 대부분 목조건물이고 인구는 주둔군과 중앙아시아인을 다 합쳐서 오천 내지 육천이다. 신문을 구독하는 가구는 10~15가구 정도다. 주민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보드카를 마시고 카드게임을 하고 뒷 담화를 즐기고 장사 얘기하는 것이 고작이다.”  
세메이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세메이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가로등도 없고 숙박시설도 없었다. 마을 전체에 피아노는 딱 한 대 있었다. 지적인 삶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사병 도스토옙스키는 부대 막사에 기거했으나 곧 이바노프 장군의 배려로 개인집에서 하숙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숙박과 세탁을 합쳐 한 달에 5루블을 지불했다. 하숙집은 풀 한 포기 없이 완전 메마른 지대에 있었다. 읍내에서 빠져나가 한참을 걸어 이르티시 강변으로 가야 비로소 침엽수림이 나왔다. 처음에 도스토옙스키는 옴스크나 세미팔라틴스크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이제 죄수복이 아닌 군복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제 자신이 죄수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는 곧 군 생활에도 적응했다. “군인이 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야, 이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하지만 난 불평하고 싶지 않아. 이건 내가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니까.”  
 
시간은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특유의 행복관이 생활을 견딜만하게 해주었다. “행복이란 외적인 조건에 있는 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맑은 시선 속에, 부끄럼 없는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다.”  
 
막사에서 그의 옆 침대를 사용했던 카츠는 그를 무척 견실하고 부지런한 사병이었다고 기억했다. “책임감이 강했으며,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 한 번도 지적을 받은 적이 없었다. 동료 군인들에게는 항상 친절했다.” 군 장성들과 지역 유지들 역시 모두 호의적이었고 그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젊은 브란겔 남작의 헌신적인 도움
도스토옙스키의 생활은 브란겔 남작(1833~1915)이 부임해 오면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갑자기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에 뛰어들어 수호천사 역할을 수행한 브란겔은 이 시절을 회고하며 1912년 『시베리아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회상』을 출간했다. 대문호와 함께 생활하며 밀착취재라도 하듯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과 행동, 검열 때문에 쓰지는 못하고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생각, 심지어 인간적 약점까지도 모두 담아낸 소중한 자료다.  
유서 깊은 남작 가문의 자제인 브란겔은 귀족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에 취직했는데, 단조로운 사무실 업무에 싫증이 나서 시베리아 근무를 자원했다. 그는 학창시절 『가난한 사람들』을 여러 번 독파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처형대에 세워졌던 그 시간에 우연히 세묘놉스키 연병장 앞을 지나가다가 그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훌륭한 소설가와 소설보다 더 기구한 그의 삶에 대해 청년은 깊은 존경심과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세미팔라틴스크 지방 검사로 발령을 받은 그는 출발 전 도스토옙스키의 형 미하일과 만났다. 미하일은 편지와 50루블의 돈, 옷가지, 그리고 책을 동생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기념관 내부

기념관 내부

1854년 11월 20일, 젊은 검사는 부임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재부터 파악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초대를 받고 의심쩍어 하며 검사의 방에 왔다. 남작에 의하면 “군복이 그렇게 안 어울리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통성명을 한 뒤 도스토옙스키는 남작이 전해준 형과 여동생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토록 강인한 사람도 혈육의 정 앞에서는 그냥 허물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란겔도 덩달아 슬퍼졌다. 갑자기 수도에 두고 온 아버지와 누나 생각이 나면서 그리움이 사무치게 몰려왔고, 비록 원해서 오긴 했지만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는 아예 도스토옙스키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범 사병은 스물한 살 먹은 새파란 검사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이 순간 “착하고 섬세하고 믿을 수 없이 친절한 젊은이”와 “무쇠와 같은 의지의 소유자”는 굳건한 우정으로 엮어졌다.  
 
두 사람은 근무 시간 외에는 거의 함께 살다시피 했다. 브란겔은 인맥과 경제력을 최대한 활용해 도스토옙스키를 백방으로 도왔다. 차와 담배를 비롯한 생필품을 제공했고 진지한 대화상대가 되어주는 것은 물론 복무기간 단축 및 기타 등등을 위해 상부에 청을 넣었다. 심지어 애인과의 밀회도 주선했다. 이 시기의 젊은 검사는 오로지 정치범 소설가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브란겔은 누나에게 “나는 그분을 친형처럼 사랑하고 아버지처럼 존경해요”라고 썼다. 아버지에게는 “운명은 저를 한 비범한 인물과 지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가까워질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그 인물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의 말과 사상과 조언은 한평생 저를 지탱해 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도스토옙스키는 “나에게 당신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진실한 감정을 공유하던 그 시절 당신은 혈육이자 친구였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듬해 봄, 브란겔은 이르티시 강변의 작은 오두막을 빌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썼다. 그들 사이에서 ‘카자크 정원’이라 불린 녹지 공간에서 보낸 두 달간은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시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러시아는 크림 전쟁, 세바스토폴 방어전, 니콜라이 1세의 서거와 새 황제의 등극, 개혁의 열망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것들과 뚝 떨어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치유와 재충전을 만끽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태풍의 눈 같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잡초를 뽑고 화단에 물을 주었다. 말을 타고 초원을 산책했고 이르티시 강에서 수영도 했다. 서늘한 강바람에 땀을 식히며 갓 구운 빵과 신선한 치즈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유와 평화 속에서 희망과 의욕이 점점 강렬해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정원 일을 하면서 로시니 오페라의 한 소절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고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의 미래, 앞으로 할 일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내 삶에 만족한다.”  
 
아쉽게도 평화의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도스토옙스키는 곧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예기치 못한 폭풍이었다. 타고난 운명인가보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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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