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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집단성과 개별성, 그리고 그 너머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국가주의의 시대에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것은 집단성의 이데올로기였다. 전 국민이 국가의 주체가 아니라 교육 ‘대상’이었고 모두가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야 했다. 진리는 항상 한 가지밖에 없었으며 동일성의 논리를 담은 구호들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산아를 제한하는 것도 국가의 몫이었고, 두발과 치마의 길이도 국가에서 정했다. 문제는 이에 맞서는 저항 세력도 집단성의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는 주장 역시 자기 집단에게 일사불란한 동일성과 통일성을 요구하는 구호였다. 국가주의는 스스로 집단성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이처럼 그 반대편에도 다른 형태의 집단성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집단성과 집단성이 충돌하는 공간에 개체들이 설 자리는 없다. 그곳에는 무리 짓기, 편 가르기, 그리고 집단들 사이의 팽팽한 적대감만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체들이 가장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개체성을 죽이고 더 큰 집단을 선택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개체들에게 집단은 일종의 ‘보호색’이었으며, 개체들은 특정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자신들을 은폐시켰다.
 
삶의 향기 4/14

삶의 향기 4/14

사회 전체가 서서히 합리화되면서 이것과 정반대의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오랜 집단성에서 벗어나는 동안 신자유주의의 강풍이 몰아쳤고, 개인들은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졌다. 개체들은 집단이 자신들의 안위를 더 이상 책임져주지 않음을 실감하게 되었고, 자력갱생의 ‘외로운’ 길로 몰려나갔다. 봉건 시대와 식민지, 뒤이은 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집단주의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던 개체들은 이제 겉으로는 자유로운 주체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타자들을 경쟁과 배제의 대상으로 밀어냄으로써 타자들과의 건강하고도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탈(脫)정치화된 개체들은 이제 ‘시장’이라는 새로운 올무에 얽매인 채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다.
 
이제야 비로소 봉건에서 (탈)근대로 넘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는 오래 묵은 불합리와 비도덕과 비리들이 (일시에) 노출되느라 소란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관행’으로 정당화되었던 온갖 사회악들이 발가벗겨지고 있다. 가히 혁명에 가까운 이런 변화들은 이제 새로운 주체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집단성과 개체성 너머의 주체이다. 개체의 개별성을 유지하되 타자들과의 느슨하지만 건강한 연합 상태를 지향하는 개체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국가에서 행복한 개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개체들의 삶은 전체 시스템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개체의 행복에 이바지하지 않는 모든 시스템은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일지라도 무의미하다. 그리하여 단독자로서의 고유한 자유를 구가하되 동시에 시스템과의 관계적 상상력을 잘 가동시키는 ‘겹 주체(double subject)’가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
 
우리 사회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 집단주의와 탈정치적 개별주의를 이미 통과해왔다. 이제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공통의 문제’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복수(複數)적 주체”(안또니오 네그리)의 탄생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정의와 공정의 이름으로 오래 묵은 사회악들과 싸우고 있다. 바야흐로 진리담론이 부상하고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진리담론이 독점담론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리담론은 그 안에 동질성뿐만 아니라 이질성을 동시에 열어놓는다. 무오류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외부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내부를 성찰하는 ‘겹 지혜(double wisdom)’가 필요하다. 수많은 복수적 주체들이 그 모든 비합리적 봉건성과 싸우되, 자성(自省)의 칼날을 자신에게도 들이댈 때 개혁은 지속가능한 미래가 될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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