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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김정은과 협상하려면 속아넘어간 뮌헨의 교훈과 참지 못한 사라예보의 교훈 모두 새겨야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북한 비핵화 이슈에 중국이 키 플레이어로 재등장하면서 남·북·미·중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 [중앙포토]

북한 비핵화 이슈에 중국이 키 플레이어로 재등장하면서 남·북·미·중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 [중앙포토]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5월 말 또는 6월 초 북미정상회담 준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평창 겨울 올림픽과 패럴림픽과 관련한 남북 접촉을 시작으로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북한의 핵 포기와 하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이를 계기로 한반도 평화가 곧 다가올 것으로 기대하는 평화 기대론자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평화 기대론자들은 지난해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탄도미사일시험 발사로 인해 대결 국면으로 치닫던 한반도 국면이 이를 계기로 평화 무드로 전환될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평화 회의론자들도 적지 않다. 지난해까지 그렇게 공세적으로 나오던 북한이 갑자기 평화공세를 펴는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국제관계에 문외한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기만해 뭔가 일을 꾸밀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 9일 워싱턴에서 고위 군사관계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연설하고 있다. 오른쪽은 군사력 활용을 주장하는 존 볼튼 백악관 안보보좌관.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 9일 워싱턴에서 고위 군사관계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연설하고 있다. 오른쪽은 군사력 활용을 주장하는 존 볼튼 백악관 안보보좌관. [AFP=연합뉴스]

이번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진다고 해서 당장 돌파구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상회담 한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번 정상회담들으 한반도 평화로 가는 '시작의 시작'일 뿐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 비핵화의 길도 험난할 수밖에 없으며, 한반도 평화협정도 마찬가지다. 없던 신뢰가 갑자기 생기기도 쉽지 않다.  
 
회담이 실패 수준으로 끝난다면 비극이 시작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력을 동원할 것이라는 우려다. 무력사용을 주장하는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취임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물론 미국이 대대적인 폭격과 지상군 투입의 시나리오를 실행에 옮길 가능성은 커 보이지는 않는다. 미 행정부가 특별 예산이 필요한 전쟁을 시작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따라 만일 미국이 북한에 무력을 동원한다면 추가 예산 없이 현재의 전력과 비용으로 치를 수 있는 ‘외과수술적인폭격’ 이나 ‘코피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보복, 중국과 러시아의 개입을 유발하고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확전은 태평양 건너의 미국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대신 인구 밀집 지역과 산업 시설이 밀집한 한국과 일본에 결정적인 피해를 줄 가능성이 크다.  
협상도 무력도 한반도 위기를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시간을 갖고 충분한 소통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물론 대화를 지속하고 협상에 도움을 주는 전략으로 ‘최대한 압박’을 빼놓을 수 없다. 경제 제재를 지속해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계속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데 많은 사람이 동조하고 있다. 군사력은 북한의 도발과 오판을 막으면서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같은 도발이 이어지는 위기 상황에서 강대국 지도자들은 두 가지 시도를 했음을 보여준다. 둘 다 극단적인 시도로 비극적인 결과를 유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외교 대신 성급하게 무력을 택한 실수의 결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은 평화를 구걸하다시피 하며 단호함 대신 지나친 유화정책을 편 업보였다고 볼 수 있겠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 있는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의 정문 팻말. 1914년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벌어진 거리의 바로 앞 건물에 설치된 박물관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은 불신과 증오, 그리고 속전속결의 그릇된 유혹에서 나왔다. 왜 그들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 팻말 속 '1878~1918'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사라예보를 비롯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영토로 삼았던 시기를 가리킨다. 이 박물관은 사라예보 암살을 비롯해 그 시기의 사건과 관련한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채인택 촬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 있는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의 정문 팻말. 1914년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벌어진 거리의 바로 앞 건물에 설치된 박물관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은 불신과 증오, 그리고 속전속결의 그릇된 유혹에서 나왔다. 왜 그들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 팻말 속 '1878~1918'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사라예보를 비롯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영토로 삼았던 시기를 가리킨다. 이 박물관은 사라예보 암살을 비롯해 그 시기의 사건과 관련한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채인택 촬영]

잘 알려졌다시피 1차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됐다. 1914년 6월 2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권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처가 제국의 새로운 영토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도 사라예보를 찾았다가 암살을 당한 사건이다. 범인 일당은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오랫동안 오스만 튀르크 영토였던 발칸반도 서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손에 넘어가자 이 지역이 세르비아와 통합되기를 바랐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황위 계승예정자 암살로 보복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 예정자 부부가 암살당한 다음 날인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의 도로가 아수라장으로 변해있다.[중앙포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 예정자 부부가 암살당한 다음 날인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의 도로가 아수라장으로 변해있다.[중앙포토]

문제는 사라예보 사건 자체보다 사건 이후 유럽 국가들의 대응에 있었다. 6월 28일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 터지고 7월 28일 개전이 되기까지 딱 한 달이 걸렸다. 전쟁을 막을 한 달의 시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유럽은 외교적 협상과 최후통첩, 국내 동원령 발동 등으로 분주했다. 역사적으로 시기를 ‘7월 위기’라고 부른다. 유럽 열강은 사라예보 사건 뒤 개전까지 1개월간의 시간 동안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는데도 결국 대화와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지도자들이 지루한 외교 대신 무력이라는 한 방의 유혹에 넘어간 셈이다. ‘내가 전력 우위에 있으니 한두 방이면 화끈하게 끝난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한두 방으로 끝난 무력 개입은 20세기 이후 역사에서 드물다. 전쟁은 전쟁을 낳기 때문이다. 불씨 한 점이 온 벌판을 붉게 태우는 불바다 천리로 이어지기 일쑤다.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 위에 있는 요새 터에서 바라본 사라예보 시내. 1991~1995년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의 흔적이다. 비극은 반복되는 모양이다.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 위에 있는 요새 터에서 바라본 사라예보 시내. 1991~1995년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의 흔적이다. 비극은 반복되는 모양이다.

 
결국 7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했고, 그러자 7월 28일 세르비아와 슬라브 동맹국이었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뒤 서로 사촌 사이인 러시아 차르와 독일 황제 사이에 긴급 전부가 오갔으나 결국 전쟁을 막지 못했다.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했으며, 8월 3일에는 일본에, 8월 4일에는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발동했다. 그러자 영국이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와 함께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렇게 연속으로 선전포고가 계속 이어지면서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으로 인류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비극을 당해야 했다.  
 
이것이 사라예보의 교훈이다. 1차대전은 외교적인 해결보다 군사력을 동원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듯 한방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욕심이 일으킨 비극일 수 있다. 감정을 삭이면서 조금만 더 참고 힘이 아닌 외교와 협상으로 갈등을 회복하려고 했으면 그 숱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라예보 교훈의 핵심은 국제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고 들면 더 큰 불행을 당한다는 것이다. 결국 1차대전은 엄청난 교훈을 남겼다. ‘무력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큰 비극을 유발할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이다.  
뮌헨협정 조인식에 참석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무솔리니의 사위인 치아노 백작. (왼쪽부터)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 [중앙포토]

뮌헨협정 조인식에 참석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무솔리니의 사위인 치아노 백작. (왼쪽부터)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 [중앙포토]

 
1차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전쟁을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미약한 자세가 오히려 전쟁을 유발했다. ‘뮌헨의 비극’이다. 2차대전은 1차대전과는 반대로 단호함 대신 유화정책을 편 결과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1938년 9월 30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뮌헨에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와 함께 뮌헨협정((Munich Agreement)에 서명했다. 히틀러는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며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해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 거주지인 주데텐란트를 합병했다. 
 
바로 그날 독일 뮌헨에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 서부 헤스턴 공항에 도착한 체임벌린 총리는 몰려온 환영인파 앞에서 환이 웃으며 협정문을 흔들어 보였다. 이날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이 장면은 BBC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중계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다시는 영국과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국의 희생을 포함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는 히틀러의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를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고 부른다. 이 정책에 따라 앞서 1938년 3월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한 오스트리아 병합을 강행했을 때도 외교적인 항의만 했을 뿐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말만 할 뿐 행동이 따르지 않는 정책(only talk, no action)은 영국의 개입을 두려워하며 조마조마하던 히틀러의 간만 키운 셈이 됐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중앙포토]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중앙포토]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 뮌헨협정과 체임벌린 총리는 인기가 높았다.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켰다”고 생각해 체임벌린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 미국 CBS방송의 에드워드 머로는 당시 이렇게 보도했다. “수천 인파가 총리관저로 이어지는 화이트홀 대로에서 뮌헨에서 귀환하는 총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했다. 몇몇 석간신문은 그가 이번 공로로 총리 재임 중 기사 작위를 받는 영국 역사상 두 번째 인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떤 신문은 그가 다음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대전의 참혹한 기억이 생생했을 당시, 체임벌린은 약소국을 희생시켜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고 유화정책을 폈고 국민은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히틀러의 야욕만 키워 더 큰 전쟁만 초래했을 뿐이다. 인기나 여론은 전쟁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윈스턴 처칠과 앤서니 이든을 비롯한 몇몇 의원만 하원에서 영국이 불명예스럽게 행동했다고 협정 체결을 비난했을 뿐이다. 이든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을 때 체임벌린이 유화정책을 앞세워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자 이에 반발해 외무장관을 사임했던 인물이다. 처칠은 초지일관 독일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했다. 당시 처칠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총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인가”라고 항의했다.  
 
당시 체임벌린은 개인비서에게 “히틀러가 서명한 내용을 지킨다면 좋은 일이다. 만일 그가 협정을 위반한다면 전 세계에 자신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는 아마 세계 여론이 등을 돌릴까봐 차마 약속을 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당시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정치적 인기는 전쟁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앙포토]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당시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정치적 인기는 전쟁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앙포토]

 
하지만 여론의 지지와 체임벌린의 믿음에도 ‘우리 시대의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잽싸게 주데텐란트를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 3월 남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까지 점령해 협정문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세계 여론이 무서워 협정을 깨지 못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냉혹한 침략자였다. 힘을 비축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상대방의 약점을 찾으며 평화를 원하는 척 연기했다. 사실 뮌헨협정을 앞두고 독일과 영국이 위기상황에 빠졌을 때 독일 군부의 일각에서는 만일 전쟁이 벌어지면 군사력 부족으로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많은 인명이 희생될 것을 우려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반히틀러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독일은 군사력과 국력이 전쟁을 벌이기에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반하틀러 세력은 독일 군부내 저항세력을 형성해 나중에 '암호명 발키리로 알려진 히틀러 암살 기도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자신이 힘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주데텐란트만 차지하면 더 이상 영토 야심이 없다며 영국과 프랑스를 기만한 셈이다. 평화가 급했던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평화의 사도로 착각해 거기에 성급하게 속아 넘어갔다. 뮌헨협정으로 위기 상황을 넘기고 시간을 번 히틀러는 군사력을 충분히 축적하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침략에 나섰다. 힘을 가졌던 체임벌린이 초기에 무력 압박을 포기하는 바람에 오히려 히틀러의 오판과 자만을 부르고 침략야욕에 불을 지른 셈이 됐다.  
 
체임벌린이 이런 식으로까지 지키려 했던 유화정책은 짧은 유효기간에 비해 대가가 엄청났다. 독일이 1939년 9월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의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치 독일은 서방세계가 절대 손잡을 수 없다고 믿었던 공산국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동시에 침공해 영토를 나눴다. 체임벌린은 오판의 대가로 그토록 하기 싫어하던 전쟁을 자기 손으로 선포해야만 했다. 평화는 군사력과 함께 전쟁도 불사한다는 의지가 바탕이 돼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의지 없이 협상으로만 평화를 얻으려다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 희생은 고스란히 영국 국민이 짊어져야 했다. 체임벌린의 리더십은 유화정책과 뮌헨협정이라는 두 단어로 기억된다. 이 두 단어는 국제정치에서 실패한 리더십의 상징으로 남았으며 체임벌린을 역사의 반면교사로 만들었다.  
 
결국 체임벌린은 시간을 기다리며 발톱을 숨기고 말로만 평화를 떠들던 히틀러의 기만평화전술에 속아 처절하게 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과의 협상에선 힘을 보여줘야지 평화에 대한 의지만 보여줘선 나약한 것으로 얕잡아 보일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는 양보를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환상인지 몰랐다. 심지어 영국민조차 이를 실상을 제대로 몰랐다. 히틀러가 뮌헨협정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자 국왕 조지 6세는 체임벌린에게 편지를 보내 “평화를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지도자의 리더십 실패는 국민과 군주의 판단력까지 어둡게 한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히틀러는 물렁한 강대국의 모습에 침략 야욕을 키워 결국 제2차대전 발바에 이어졌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중앙포토]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히틀러는 물렁한 강대국의 모습에 침략 야욕을 키워 결국 제2차대전 발바에 이어졌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중앙포토]

 
영국민과 국제사회는 2차대전의 엄청난 비극을 겪은 뒤에야 실상을 깨달았다.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로 인해 얻어진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은 전후 국제정치 용어가 됐다. 국제정치학자 스티브 챈은 “유화정책은 방어자의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떨어뜨리며 공격자의 야욕을 더욱 키우게 된다”고 정리했다.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도발이 오히려 더욱 거세진다는 교훈이다.  
 
냉전 시대 서방세계는 이 교훈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194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서방진영이 신속하게 공동방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결성해 대응한 것도 이 교훈을 의식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후 소련은 약소국을 한나라씩 야금야금 먹어가는 살라미 전술(salami technique)을 더는 써먹을 수 없게 됐다. 소련에 양보하거나 도발을 방관해 ‘제2의 체임벌린’으로 비난받고 싶어하는 서방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며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는 국제사회에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동맹도, 우방국을 존중하는 책임 있는 강대국도 없다’는 생생한 교훈도 함께 남겼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으나 독일에 유린당하면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영국은 이 나라를 탄생시킨 베르사유 조약을 이끈 강대국으로서 도덕적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한 나라와 그 국민의 운명을 협정문 한장과 맞바꿨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선 뮌헨회담을 ‘뮌헨배신(Munich betrayal)’이라고 부른다. 체임벌린은 뮌헨회담 직후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 에두아르트 베네스가 항의하자 싸늘하게 대답했다. “영국은 주데텐란트건으로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소.”  
 
결국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사라예보와 뮌헨의 교훈을 동시에 살펴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순진한 평화주의로도, 한 방의 유혹으로도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현명한 자만이 평화와 번영을 지킬 수 있다. 전쟁은 물론 기만술에 당하는 것도 문제다. 둘 다 한국민이 지금까지 이룬 경제적 성과에도, 민주화에도, 현재 추구하고 있는 정의사회 구현에도 심각한 상처를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중앙일보plus가 발행하는 중앙일보의 고품격 주간 경제지 '이코노미스트' 1429호(4월 16일자)에 게재되는 내용의 디저털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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