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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자동차 CO2 배출량, 미국 기준 바뀌면 한국 법도 고칠 판

한·미 FTA 개정 협상에서 양국이 원칙적 동의를 이끌어낸 사실을 알린 미국 무역대표부. [미국 무역대표부 홈페이지 캡처]

한·미 FTA 개정 협상에서 양국이 원칙적 동의를 이끌어낸 사실을 알린 미국 무역대표부. [미국 무역대표부 홈페이지 캡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안 일부가 한국 자동차 관련 법규를 무력화하는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확인됐다. 향후 FTA 개정안 문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미 FTA 대응 방향’정부 문건 입수
우리 환경기준 못 미쳐도 예외 허용
허술한 미 안전규정 한국이 첫 수용
수입 할당량 5만대 보행자 안전 구멍

약 6개월간의 협상 끝에 한국과 미국은 지난달 26일 FTA 개정에 ‘원칙적으로(in principle)’ 합의했다. 이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일 “자동차 수출과 농업을 지켜내고 철강 관세 면제 등을 이끌어 냈다”고 호평했다. 하지만 아직 모든 협상이 끝난 건 아니다. 큰 틀에서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이어서 문안 확정→법률 검토→이견 조율→최종 서명 등 절차가 남아 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한·미 FTA 주요 이슈별 대응 방향’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자동차 이산화탄소(CO2 ) 배출량 규제 완화를 요구했다.
 
한국 대기환경보전법 시행령은 자동차가 1㎞ 주행할 때 나오는 CO2 배출량을 오는 2020년까지 97g 이하로 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미국 기준(113g/㎞·2020년)보다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미국 자동차 제조사가 자국에서 판매할 때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만든 차를 한국에 판매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이번 협정 개정에서 ‘미국에서 생산한 차는 기준을 더 완화하라’고 한국에 요구했다.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이 지난해 12월 “한국에 수출하는 미국산 자동차에 적용되는 의무 규정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요구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의도로 알려진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에 한국 정부는 규제는 그대로 두되 각종 예외 조항을 허용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사실상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한국이 수용하기로 한 두 가지 예외 조항(에코이노베이션·크레디트 제도)만 활용해도 미국 자동차는 1㎞당 최대 16.9g의 CO2 를 더 배출할 수 있다.
 
결국 미국 기준(113g/㎞)만 충족하는 차량을 한국에서 팔아도 한국 기준(97g/㎞+예외 조항 16.9g/㎞)을 충족하게 된다. CO2 배출을 규제하려는 한국의 환경 규제 법안이 미국차엔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하면 법 규정은 달라진 게 없어서 환경단체의 비판을 피할 수 있지만 미국차는 CO2 를 규정 이상으로 배출해도 위반이 아니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환경 규제 완화를 반대하는 환경단체를 염두에 둔 협상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미국 정부는 향후(2021~2025년) 한국 환경부가 CO2 규제 기준을 신설할 때 이미 미국이 정해놓은 기준(89g/㎞·2025년)을 그대로 적용하라는 요구도 했다. 현행 한국법엔 2021년 이후 CO2 배출량에 대한 규정이 없다.
 
심지어 미국 정부가 현행 기준을 완화하게 된다면(중간점검제도) 그때 한국도 미국과 똑같이 따라 하라는 요구도 했다. 미국법이 바뀌면 한국도 바꾸라는 요구는 ‘입법 주권’을 침해했다는 해석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해 한국 통상당국은 “미국의 요구는 요구일 뿐”이라며 “향후 환경부가 2021년 CO2 배출 기준을 설정할 때 미국 배출 기준도 고려하겠다는 수준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해석했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이 미국산 자동차 수입 할당량을 배(업체당 2만5000대→5만 대)로 늘리기로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문제는 수입 할당량을 늘릴 경우 한국 안전 규정에도 구멍이 뚫린다는 점이다.
 
한·미 FTA가 개정되면 1개 기업당 5만 대의 미국산 자동차는 한국 안전기준을 충족하지 못해도 조건 없이 수입해야 한다. 이 경우 한국 정부가 마련한 ‘보행자 보호’ 규정이 무용지물이 된다. 한국 자동차 성능·기준에 관한 규칙은 보행자가 차량 전면에 충돌했을 때 다치지 않도록 범퍼 안전 사양을 규정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탑승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테스트는 많지만 차량과 부딪친 사람의 안전을 확인하는 실험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 법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에서 자동차 제조사가 미국 안전기준만 충족하면 한국에서도 차를 판매할 수 있다. 또 한국 지형을 고려해 만든 다양한 자동차 법규도 미국차에는 예외다. 예컨대 평지가 대부분인 미국에서는 굳이 헤드라이트의 높이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장치가 필요하지 않아 법으로 강제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 다르다. 인구밀도가 높고 툭하면 오르막·내리막이 반복하는 한국 도로에서는 헤드라이트 높이가 자동으로 조절되지 않을 경우 보행자와 반대편 차로 운전자의 시야를 가로막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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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국 정부가 한국 지형을 고려해서 제정한 안전 규정은 150여 개 안팎이다. 미국 안전 규정은 한국의 절반 수준(60여 개 안팎)에 불과하다. 한·미 FTA 개정으로 1개 제조사당 5만 대의 미국차를 들여올 수 있다면 90여 개의 한국 규정이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개정안이 한국 정부의 ‘안전 주권’을 포기하라는 요구사항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20개 국가 중 미국 안전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국가는 한국뿐이다. 미국에서 조립한 차량이라는 이유로 미국 정부가 규정한 안전 규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특혜를 제공하는 국가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픽업트럭 관세 혜택이 2041년까지 미뤄지면서 한국 자동차 제조사는 비중이 큰 미래 수출 시장을 잃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통상 압력에 굴복해 한국 자동차 관련 법규가 실효성을 잃는다면 한·미 FTA 개정안이 논란에 휩싸일 여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통상당국의 관계자는 “현재 한·미 FTA 협상 실무진이 세부 개정 문안을 마련 중”이라며 “이 과정에서 문구 표현 등 미세 조정만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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