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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범에 가장 피해야 할 말 "진정하라"

이종화 크라시스 네고 대표.

이종화 크라시스 네고 대표.

“현장에 몇 명 있어요? 30명? 50명? 지금 인질 다치게 만들 거예요? 다 빠지라고 해요.”
 
지난 2일 경찰에서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서울 방배초등학교에서 20대 남성이 4학년 여자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커터칼을 든 범인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대뜸 "기자를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전화를 받은 주인공은 국내 1호 ‘위기협상전문가’인 이종화 전 경찰대 위기협상연구센터 교수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이번 일이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는 걸 직감했다. 현장에 남아있는 경찰들을 최대한 물러서게 해야했다. 자칫 범인을 자극해 돌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1시간 만에 범인을 제압하고 인질을 무사히 구출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나라는 위기협상의 불모지로 꼽힌다. 국내 위기협상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인원은 80명 정도다. 그중 첫손에 꼽히는 이가 이 교수다. 그는 2005년부터 미국 FBI, 뉴욕 경찰, 프랑스 경찰특공대에서 위기협상 교육을 받고 2009년 경찰대 위기협상 과정을 개설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내 최초로 위기협상 전문 컨설팅사인 ‘크라시스 네고’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그의 건의로 2014년 각 지방경찰청에 위기협상전담팀이 생겼다.
 
지난달 26일 아프리카 가나 인근 해역에서 피랍된 한국인 3명은 여전히 생사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납치 사태가 장기화되면 인질들의 생명도 위험해질 수 있다며, 제2의 ‘아덴만의 여명’ 같은 무력 진압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88년 서울 북가좌동에서 벌어진 지강헌 인질극 사건.

88년 서울 북가좌동에서 벌어진 지강헌 인질극 사건.

하지만 이 교수는 인질·납치 사건에선 무력을 사용하는 ‘작전’보다는 대화를 통한 ‘위기협상’이 인질의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위기협상에서 가장 큰 무기는 ‘시간’이다. 실제로 위기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적인 대화 방식이다. 대화를 통해 인질범의 감정과 요구를 읽어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인질범은 대화를 하며 감정을 분출할 수 있고, 이야기를 할때는 인질을 해치지 않는다. 무작정 ‘진정하라’거나 ‘나오라’고 말하는 것은 인질범을 자극할 수 있다”며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많이 힘들어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이다. 시간이 항상 우리 편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현장에서는 범인을 체포하거나 사건을 빨리 해결하려는 작전을 펼치는데 급급하다고 지적한다. 가장 대표적인 위기협상 실패 사례가 1988년 ‘지강헌 인질극’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탈주한 지강헌 일당을 단순 흉악범으로 취급하면서 협상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4년 전 강원도 ‘22사단 총기 난사사건’에서도 이런 방식은 반복됐다. 군 당국은 탈영병인 임모(28)병장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그의 부모를 현장으로 불렀다. 이 교수는 “위기 상황에서 가족이나 친지 등 ‘제3자 중재인’을 부르는 것은 서로의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결국 잘못된 관행 때문에 자살시도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인질극에서 피해자의 생존 요령은 무조건 인질범의 지시나 요구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해자와 범인 사이의 일종의 ‘유대 관계’(rapport)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의 가족 얘기 등 대화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사건 이후에는 피해자의 심리적 충격에 대한 치료와 지원이 중요하다. 이를 무시할 경우 가해자를 동정하는 ‘스톡홀름 신드롬’ 같은 트라우마까지 생길 수도 있다.
 
이 교수는 가나 피랍사건에서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응해야 한다고 전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테러단체와 직접 협상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국가가 테러범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를 수용하는 선례를 남길 경우 위험이 더 크다. 결국 선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이 있는 선사나 가족이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구조다. 그러나 피랍 지역의 현지 당국조차 테러조직과 결탁한 경우가 많다.
 
이 교수는 “실제로 1~2년 전 필리핀에서 한국인 선원이 납치됐을 때, 선사와 가족이 정부의 도움 없이 엉뚱한 사람에게 몸값을 전달해 인질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신뢰할 수 있는 정보나 협상 전략을 제공하는 등 여러 채널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손에 쥔 패가 유리하다고 게임에서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니다”고 지적했다. 심리적으로 쫓기는 건 가해자인 인질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글·사진=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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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