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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권력이 '준' 권력을 소외시킨 죄

 
생각할 게 참 많은 날이었습니다. 아침 출근길을 부러 먼 길로 돌았습니다. 터널 대신 남산 순환도로를 돌아 돌았습니다. 벚꽃과 개나리는 벌써 색이 바랬고, 버드나무엔 새로운 생명을 머금은 연초록 눈들이 달렸습니다. 겨울을 밀쳐낸 봄은 어느덧 우리 눈 앞을 지나쳐 달음질치고 있습니다. 자꾸 짧아지고 있어 더 귀한 봄입니다. 잠시 눈을 감습니다. 부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아침이기를.

 
VVIP 독자 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징역 24년, 벌금 180억원. 출석하지 않은 피고인의 자리는 휑했습니다. 주임판사 혼자 2시간 가까이 판결문을 읽는 모습이 생중계됐습니다. 기이한 장면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 당한 첫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통령이 사실은 취임사에서 ‘국민’이라는 단어를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많이 썼습니다. 2013년 취임사에서 무려 57회에 걸쳐 ‘국민’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2008년에 취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30차례, 2017년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이라는 단어를 27차례 썼습니다.
“국민 개개인의 행복의 크기가 국력의 크기가 되고, 그 국력을 모든 국민이 함께 향유하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민 행복의 필수 요건입니다.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도, 여성이나 장애인 또는 그 누구라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정부 역량을 집중할 것입니다”
“국민행복은 국민이 편안하고 안전할 때 꽃 피울 수 있습니다. 저는 국민의 생명과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근혜 시대는 이처럼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 갑시다”라는 취임사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일인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서 김세윤 판사가 판결문을 읽고 있다. 박근혜 피고인 자리가 불출석으로 비어 있다. 변호인만 자리해 궐석재판으로 열리고 있다. [KBS 뉴스특보 화면 촬영] 2018.04.06.금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일인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서 김세윤 판사가 판결문을 읽고 있다. 박근혜 피고인 자리가 불출석으로 비어 있다. 변호인만 자리해 궐석재판으로 열리고 있다. [KBS 뉴스특보 화면 촬영] 2018.04.06.금

그랬던 대통령의 추락을 부른 건 세월호 7시간, 최순실의 존재 등으로 대표되는 ‘국민 소외’였습니다. 국민을 그토록 강조했던 대통령에게서 배신당한 국민은 탄핵이라는 해일을 일으켰습니다.
 
2018년 4월6일 김세윤 부장판사가 읽은 재판부의 선고문에도 유난히 많은 ‘국민’이 등장했습니다.  

“피고인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으로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국민 전체의 자유와 행복, 복리증진을 위해서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다시는 대통령이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함부로 남용해서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그런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피고인에게는 그 범죄 사실에 상응하는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일인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서 김세윤 판사가 판결문을 읽고 있다. [KBS 뉴스특보 화면 촬영] 2018.04.06.금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일인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서 김세윤 판사가 판결문을 읽고 있다. [KBS 뉴스특보 화면 촬영] 2018.04.06.금

정치 '하는' 사람들은 국민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때론 자기 행동을 변호하기 위해, 때론 정말 이타적인 생각을 내보이기 위해 “국민 여러분”을 부르고 외칩니다. 하지만 ‘국민’은 양 날의 칼입니다. 국민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피지배자이면서, 지배자입니다. 우리는 권력이 종종 대통령의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착시 현상입니다. 김 부장판사가 읽은 선고문에 명시돼 있듯이 권력을 빌려준 건 국민입니다. ‘빌린’ 권력이 ‘준’ 권력을 소외시킨 결과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아픈 교훈입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뽑아준’ 대통령을 탄핵한 국민도 입은 내상(內傷)입니다. 심리학자들은 피해자의 상처 못지않게 가해자의 상처도 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치유입니다. 상처는 치유해야 하는 것이지, 다시 헤집어선 안됩니다. 치유하는 정치, 치유하는 언론, 치유하는 집단의 존재가 더더욱 절실하고 소중합니다.  

 

중앙SUNDAY는 이번 주 스페셜리포트로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판결’을 다룹니다. 18개 혐의를 사법부는 어떻게 판단했는지 조목조목 펼칩니다. 변호사이면서 기자인 임장혁 선데이 탐사보도팀장이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출신 서민석 변호사와 함께 ‘판결문 읽기’를 해 드립니다. 카카오 조수용 대표도 인터뷰했습니다. 조 대표는 “모범생보다는 일을 벌리는 끼 있는 청년정신”을 강조합니다. 곰곰히 읽을 수 있는 콘텐트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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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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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