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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퍼스펙티브] 자유한국당, 보수 포퓰리즘으로는 미래 없다

보수정당의 살 길 
선거라는 치열한 권력 다툼은 정당들에 잠시나마 본질적 근심을 잊게 해주는 즐거운 망각의 계절이다. 지지자들의 환호, 상대에 대한 열띤 공격과 그 속에서 다져지는 결속감 덕분에 자유한국당은 오는 6월 지방선거까지 근본적인 문제를 잊은 채 잠시 생기를 되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정당을 대표해 오던 자유한국당은 지방선거가 끝나고 나면 곧이어 영국 시인 매슈 아널드가 묘사했던 음울한 늪 속으로 다시 빠져들 것이다.
 
“우울하고 긴 퇴각의 울부짖음
밤바람의 속삭임에 따라
세상의 거대하고 음울한 끝으로 
그리고 세상의 벌거벗은 자갈 쪽으로 밀려나는 울부짖음”
 
 
설사 6월 지방선거에서 선전하게 되더라도(현재 그 가능성도 크지 않지만)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우리 보수정당의 “긴 퇴각과 세상의 벌거벗은 자갈 쪽으로 밀려나는” 흐름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필자는 본다. 지금 보수정당의 위기는 단지 인기가 높은 문재인 대통령 임기에 한정된 5년의 위기가 아니다. 또한 부패 혐의를 받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던 때를 기점으로 한 10년의 위기도 아니다.
 
자유한국당이라는 오래된 보수정당의 위기는 박정희 정부가 출범하던 1963년 이래 최대의 위기, 즉 50년의 위기이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2007년 이명박 후보가 주도한 ‘경제 살리기’ ‘747’ 공약은 결국 박정희 시대 발전주의의 옅은 변형이었고 이러한 시도는 상처만 남긴 채 실패하였다. 또 2012년 박근혜 후보가 내세운 맞춤형 복지와 창조경제는 박정희 시대 성장의 기적과 사회 통합을 업데이트해보려는 시도였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였다.
 
 
국가 주도 발전주의 설 자리 없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60년대에 씨가 뿌려진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로서의 발전주의, 국가중심주의, 그리고 국가 주도 발전주의의 외피로서의 한미동맹 중심주의는 이제 우리 한국 사람들과 분명하게 작별하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와 더불어 이제 국가 주도 발전주의의 어떠한 변형 방식도 한국 사회에서는 발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달리 말해, 한국의 보수정치는 이제 과거의 성공 신화에 매달리는 어떠한 유형의 미봉책도 시도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과거로의 퇴로가 막힌 보수정치, 좁은 의미로는 보수정당이 이제 나아갈 선택지는 매우 제한적이다. 첫 번째 대안은 위험스런 대안이지만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보수 포퓰리즘의 길이다. 두 번째 대안은 좀 더 이성적인 대안이지만, 그 길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고는 할 수 없는 보수 실용주의의 길이다. 세 번째 대안은 앞의 두 대안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일관된 미래를 설계하지 못한 채 보수정당이 “세상의 음울한 끝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될 것이다.
 
먼저 보수 포퓰리즘의 길부터 살펴보자. 이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드러난 트럼프 현상과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바로 위기에 몰린 보수세력이 퇴행해가는 보수 포퓰리즘의 상징적인 사례이다. 트럼프 현상은 자동화와 4차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노동의 위기’를 맞고 있는 백인 노동자 계층의 좌절과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아 출발하였다. 하지만 노동의 위기를 직업교육과 복지프로그램을 통해 대응하기보다는, 이민자들을 포함한 사회 소수자에 대한 분노와 배제 그리고 미국 우선주의라는 퇴행적 슬로건을 통해서 고단한 현실을 잊고자 하는 것이 트럼프 포퓰리즘의 본질이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영국 유권자들의 국민투표를 거쳐 영국이 유럽연합(EU)으로부터 탈퇴한 브렉시트(Brexit) 역시 활발해지는 경제·사회적 통합의 흐름 속에서 소외된 영국의 노동자층·중산층·노년층의 좌절 폭발이었다. EU 내 경제·사회적 개방과 통합이 진행되면서 젊고 유능하며 새로운 기술에 능한 ‘유럽인들’의 영국으로의 유입이 확대되어왔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통합 네트워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년층과 일부 중산층의 불안은 날로 치솟아왔다. 마침내 이 같은 불안 의식은 유럽인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고 살아가는 영국보다는, 덜 잘 살고 덜 자유롭더라도 영국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수구적 선택, 즉 브렉시트를 낳았다.
 
자유한국당, 보수 포퓰리즘 유혹 받아
 
자유한국당 역시 보수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우리는 경제·문화 패러다임의 대변동에 따른 경계인들을 양산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이미 산업용 로봇의 의존도가 매우 높은 사회이며 그에 따라 단순 노동의 자동화 대체가 급속히 진행 중이다. 게다가 육체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을 넘어 지식 노동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이 삶의 곳곳을 파고드는 중대한 변화가 다시 한번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놓게 될 것이다.
 
패러다임 변화의 쓰나미는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많은 주변인을 낳게 될 것이다. 노년층, 저학력 또는 단순 노동 종사자들은 우리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할 때 사회적으로 해체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던 60~70년대 농민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IT 대한민국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이들의 좌절과 분노는 정치적 분출구를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여기에 발전주의라는 오래된 지지 공식을 상실한 자유한국당이 디지털 사회의 탈 중심성, 탈 권위 흐름에 적응하지 못할수록 이들 4차 산업혁명 경계인들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에게 시대를 거스르는 선택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라는 뜻 그대로 보수정당이 혁명적 변화 대신에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다면, 새로운 세대의 흐름에 주목해야만 한다. 보수 사상가 스크러튼이 예리하게 표현한 바 있듯이 “세대 간의 동적인 관계를 통해서 보수주의는 이어져가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세계화 개방 이후에 출생 성장한 20대 청년들이 기존의 보수·진보 이분법으로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실용주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청년 실용주의를 적극 수용하는 길이 자유한국당이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생존해 갈 수 있는 마지막 출구가 될 것이다.
 
 
청년세대는 현실주의적 대미 의식 가져
 
지난 몇 년 사이에 본격화하고 있는 청년 실용주의는 미국과 북한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과 국가와 개인의 자유에 관한 새로운 균형 등을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먼저 청년세대 실용주의의 핵심으로서의 현실주의적 대미 의식을 보자. 90년대 세계화 개방 이후에 성장한 청년세대들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친미·반미의 이분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미 의식을 갖고 있다. 20대 청년들은 미국에 대해 다른 세대보다 확연히 우호적이다. 60대 이상의 구세대가 한국전쟁과 그 이후 경제 성장, 안보의 후견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해서 절대적인 우호(혹은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유지해왔다면, 청년 세대의 대미 우호 의식은 기성의 친미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논리를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청년세대는 (비록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에 흔들리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을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혁신 경제(구글·아마존·애플 등으로 상징되는)를 상징하는 꽤 괜찮은 선진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냉전 시대의 기성세대가 거대 헤게모니 국가,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눌려 지내온 한국인으로서의 소국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면, 민주주의를 갖춘 세계 10위권 무역 국가에서 성장해온 청년세대는 이 같은 심리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다. 청년들은 한국과 미국은 기존의 대국·소국의 비대칭을 넘어 우호적 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동시에 청년들은 미국을 군사주의와 일방주의로 무장한 채 전 세계의 소국들을 무시하고, 한국의 권위주의 세력을 지원해온 부도덕한 패권 국가로 이해하는 민주화 세대의 열정적 반미주의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북한과의 빠른 통일 원하지 않아
 
현실주의 인식은 북한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이어진다. 청년들은 북한을 뜨거운 형제애로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민주화 세대의 열정적 민족주의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동시에 청년들은 북한에 대한 강렬한 대결 의식과 적대 의식에 사로잡힌 기성세대의 냉전 반공주의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청년들에게 북한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불편하고 위협적인 이웃으로 이해된다. 꾸준한 교류를 통해 극심해진 이질감을 완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잘 지내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북한과의 빠른 통일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청년들은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에 대한 청년들의 의식 역시 기성의 보수·진보의 문법으로는 재단하기 어려운 새로운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논란에서 첨예하게 드러났듯, 청년들은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들의 기회가 제약되거나 혹은 특혜가 주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들은 기성 진보의 민족주의를 공감하지 않으며 기성 보수의 국가주의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현실주의적 대미 의식, 대북 의식, 자유주의로 집약되는 청년들의 실용주의는 20대의 일시적인 흐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10년 후에는 20~30대 대부분이, 그리고 20년 후에는 20~40대에 이르는 시민들 대부분이 낡은 보수·진보 문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실용주의자들로 채워질 것이다. 비단 보수정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이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 물론 퇴각의 절벽에 먼저 서 있는 것은 자유한국당이다.
 
장훈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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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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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