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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예수에서 유다가 된 남자, 로저 버

“강연이 끝난 후 내게 오면 비트코인캐시(BCH)를 주겠다.”
 
일명 ‘비트코인 예수’라 불리는 로저 버(Roger Verㆍ39) 비트코인닷컴 대표가 강연 때마다 하는 말이다. 비트코인캐시는 지난해 8월 1일 하드포크 때 비트코인에서 분리된 암호화폐다. 비트코인의 블록 사이즈가 1메가바이트(MB)인데 비해, 비트코인캐시는 8MB다. 블록 사이즈가 커진 만큼 결제 처리 속도가 빠르고, 수수료가 싸다. 그래서 이름에도 ‘캐시(현금)’가 붙었다.
 
지난 2일 서울 강남 한화생명빌딩 지하 강당에서 열린 ‘크립토서울’ 밋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연이 끝난 후 그와 인사하고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비트코인캐시를 나눠줬다.  
 
기자도 인사를 건네자 버는 “구글스토어에서 비트코인닷컴 지갑을 다운 받아라”고 말했다. 기자의 스마트폰에 비트코인닷컴 지갑이 생성되자, 지갑의 QR코드를 찍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비트코인캐시 0.006972개(약 5000원)를 보냈다. 버는 “봤지? 빠르지? 수수료도 싸”라고 말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버의 스마트폰 지갑에 표시된 비트코인캐시 전송 수수료는 약 1.7원에 불과헀다. 
출처: 스팀잇

출처: 스팀잇



◇무정부 자본주의를 꿈꾸다
버의 사상적 근간은 ‘무정부 자본주의(Anarcho-capitalism)’다. ‘무정부’와 ‘자본주의’, 어울리지 않는 한 쌍 같다. 하지만 묘하게 결합됐다. 무정부 자본주의는 극단의 자유를 추종하는 자유지상주의와 철학적 궤를 같이 한다. 이 사고 체계에서 국가란 개인의 자유를 옥죄는 악이기 때문에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머레이 로스바드가 대표적이다. 그는 “세금은 도둑질”, “모든 세금은 다 나쁘다”, “세금을 없애라”고 주장했다. 무정부 자본주의자들은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고는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봤다.
 
버 역시 극단의 자유를 추구한다. 미국 태생이지만, 2014년엔 미국 시민권을 버리고 중앙 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있는 세인트키츠나비스 국적을 취득했다. 탈세 혐의를 의심한 미국은 이듬해 버의 비자 발급을 거부하기도 했다(그해 말 일본 도쿄 주재 미국대사관이 결국 비자 승인을 내주기는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디엔자컬리지에 입학했지만, 1년 다니다 그만뒀다. 학업보다는 사업이 더 의미 있다고 판단했다. 1999년 컴퓨터 부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사이트 메모리딜러스를 만들었다. 2002년에는 이베이에서 농업용 폭발물을 판매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0개월을 연방 감옥에서 보냈다. 그리고 2005년 일본으로 이사 갔다. 일본어는 수감 기간 중에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버가 비트코인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11년이다. 첫 번째 투자한 회사는 비트인스턴트였다. 비트코인과 달러를 환전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비트인스턴트 창업자인 찰리 슈렘과 일명 다크웹인 실크로드를 만든 로스 울브리히트는 모두 2014년 마약 밀매와 관련한 돈세탁 혐의로 처벌받았다. 버는 당시 울브리히트의 구명을 위해 15만 달러를 쓰면서 화제가 됐다).
 
버는 이어 리플(시가총액 3위 암호화폐 발행 기업), 블록체인닷인포(비트코인 지갑 공급 업체), 비트페이(암호화폐 지급 결제 플랫폼), 크라켄(암호화폐 거래소) 등 12개 비트코인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이 같은 초기 투자는 버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트코인 생태계 형성에도 큰 기여를 했다.
출처: 휴대전화 캡처

출처: 휴대전화 캡처

 
버는 특히 2011년, 자신이 소유한 회사인 메모리딜러스에 비트코인 결제를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2012년에는 비트코인 개발자 개빈 안드레센 등과 함께 ‘비트코인 재단(Bitcoin Foundation)’을 설립했다. 2014년에는 비트코인닷컴의 도메인 이름을 샀고, 이곳의 대표가 됐다. 그는 이후 다양한 암호화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며 비트코인 대중화에 힘썼다.  
 
◇“비트코인캐시는 비트코인이다”
버가 2013년 12월 경제 전문방송 CNBC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비트코인 예수’라는 별명은 비트코인재단의 피터 베세네스 전 회장이 붙여줬다.
 
“바비큐 파티를 할 때였어요. 20여명의 고등학생들에게 비트코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죠. 학생들은 제 말을 조금이라도 놓칠 새라 하나하나 집중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베네세스 회장이 마치 제자들이 예수를 둘러싼 모습과 비슷하다면서 ‘비트코인 예수’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버의 노력 덕분인지 비트코인은 점점 더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계가 노출됐다. 거래량이 증가하면서 전송 속도가 지나치게 느려졌고, 채굴자들 수수료는 지나치게 비싸졌다. 버는 정부나 중앙은행, 그 어떤 곳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화폐가 통용되는 세상을 꿈꿨다. 그는 비트코인이 달러ㆍ유로와 같은 법정화폐를 대체하길 바랬다.
 
화폐의 기능은 크게 3가지다. 교환의 매개, 회계의 척도, 가치저장의 수단. 그 가운데 직관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기능은 교환의 매개다. 그런데 지금의 비트코인과 같은 전송 속도로는 법정화폐를 대체할 수 없다. 누가 커피 한 잔 사 먹자고 몇십 분을 기다릴 수 있겠나.
 
버는 전송 처리 능력을 높이는 손쉬운 방법은 비트코인의 블록 크기를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게가 좁아 기다리는 손님이 많다면 가게를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기면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비트코인 코어 개발자들은 블록 크기의 증가는 채굴자들의 힘을 지나치게 강화시켜 사토시 나카모토(비트코인 창시자)가 주창한 탈중앙화 정신을 거스른다고 반박했다. 넓은 가게로 옮겨 건물주만 좋은 일 시키느니 가게 안 테이블 배치를 효율적으로 다시 해(세그윗 등) 손님을 더 받는 게 낫다는 설명이다.
 
버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백서를 다시 볼 것을 주문한다. 제목이 ‘비트코인: 개인 간 거래 전자 현금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다. 사토시 나카모토 역시 교환의 매개로서의 화폐에 초점을 뒀다는 게 버의 해석이다.
 
비트코인을 가치 저장의 수단으로, 곧 ‘디지털 금’으로 인식하는 개발자들과 비트코인은 ‘디지털 캐시’가 돼야 한다고 믿는 버 사이에 타협이란 없다. 한때 열렬한 비트코인 지지자였던 버는 매서운 비트코인 비관론자가 됐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에 더 근접한 비트코인캐시 전도사로 변신했다. 비트코인캐시는 비트코인보다 빠르고, 수수료도 싸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비트코인닷컴의 모든 서비스 및 결제에서 비트코인을 몰아내고 비트코인캐시를 도입했다. 비트코인 커뮤니티에서는 이제 버를 ‘비트코인 유다’로 바꿔 부른다.
 
버는 지난 2일 크립토서울 강연에서 “비트코인은 한 국가의 경제적 자유도를 높여준다”며 “경제적 자유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평균 소득이 높고, 실업률이 낮으며, 수명이 길고, 행복 지수도 높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비트코인은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비트코인은 비트코인캐시다”고 강조했다.  
 
이튿 날인 3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분산경제포럼 2018’의 패널 토론에서는 “널리 쓰여야 의미 있는 암호화폐이며, 그래서 살아남는 것은 비트코인캐시”라며 “확장성 문제 외에도 비트코인은 처음 백서와는 달리 검열되기 시작해 암호화폐의 기본 정신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비트코인캐시는 블록 사이즈가 커지면서 (비트코인보다) 미래가 아주 밝다”고 덧붙였다.
 
시장에서는 그러나, 버를 의심한다. 그는 특히, 세계 최대 체굴업체인 비트메인의 우지한 대표와 함께 비트코인캐시 가격을 조작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지난 연말 CNBC와의 인터뷰에서 “내부자 거래는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발언은 그런 의심에 확신의 기름을 부었다. 지난해 11월 빗썸 서버 다운 사태를 부른 비트코인캐시의 급등과 급락에도 버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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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의 어쩌다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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