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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흐르는 유적지 여행-이집트] ‘카이로 선언’의 현장 메나하우스 호텔

한국의 독립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천명…이집트파운드화 가치 떨어져 가성비 높은 여행지
 
미국·영국·중국 지도자는 1943년 11월 이집트 기자의 메나하우스 호텔에 모여 전후(戰後) 일본의 영토 문제 등을 논의한 ‘카이로 회담’을 열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천명했다. 이 호텔 뒤편의 정원에는 2015년 이집트 한국대사관과 이집트 한인회가 건립한 카이로 선언 기념석이 있다. / 사진:김세원 교수

미국·영국·중국 지도자는 1943년 11월 이집트 기자의 메나하우스 호텔에 모여 전후(戰後) 일본의 영토 문제 등을 논의한 ‘카이로 회담’을 열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천명했다. 이 호텔 뒤편의 정원에는 2015년 이집트 한국대사관과 이집트 한인회가 건립한 카이로 선언 기념석이 있다. / 사진:김세원 교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대표되는 문명의 발상지, 일부다처가 인정되고 술과 돼지고기는 허용되지 않는 이슬람 국가. 우리가 이집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다. 2월 중순 다녀온 이집트 여행은 이같은 이미지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이집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그것은 서기 639년 아랍이 정복하기 전까지 이집트는 명실상부한 기독교국가였으며 초기 교회의 전통을 2000년 동안 지켜온 성서의 땅이라는 것이다. 2월 12일 오전 아부다비를 거쳐 인천 공항을 출발한 지 19시간 만에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거리에 나서니 현대·기아차의 엘란트라와 세라토, 러시아제 라다, 체코의 스코다, 스즈키의 알토, 중국의 체리 같은 온갖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으로 공해가 심했다. 차선·인도·신호등·횡단보도를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인도가 있더라도 비포장이거나 곳곳이 깨져 있어 걷기가 쉽지 않았다. 카이로의 번화가인 자말렉에 있는 나일강변의 노보텔에 여장을 풀었다. 오성호텔의 하룻밤 숙박료가 75유로. 게다가 16세 이하 동반 자녀는 무료 숙박이란다. 이집트 여행은 2016년 말부터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만족도가 최고다. 2016년 11월 3일 이집트 중앙은행이 이집트파운드(EGP)화의 환율을 달러당 8.8파운드에서 13파운드로 32.3%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이집트에 3년 간 12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집트파운드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라는 조건을 걸었는데 이를 이집트 정부가 수용해 가치가 반토막 난 것. 원화 대비 환율은 2016년 1월 160원이던 것이 2018년 3월 현재 60원 정도로 떨어졌다. 테러 위협만 없다면 관광객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관광지인 셈이다.
 
루프탑 레스토랑에 가니 호텔인데도 알콜 음료는 없었다. 음주·도박·매춘을 금지하는 이슬람 계율에 따라 술을 판매하지 않는 대신 전통 물담배 시샤(shisha)가 대표적인 기호품이다. 카페, 레스토랑, 전통 찻집 어딜가나 남녀노청 구분없이 시샤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시샤는 담배잎을 숯으로 태운 후 물이 담긴 용기의 관을 통해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으로 메론·사과·바닐라 등 다양한 과일향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첫날 저녁은 디너크루즈를 타고 전통 음식 뷔페와 나일강의 야경, 밸리댄스 공연을 즐겼다. 다음 날 새벽 5시 모스크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아잔(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 소리에 잠을 깼다. 아잔은 무슬림에게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 등 하루에 다섯 번 메카 방향을 향해 기도하는 시간을 알려주는 신호지만 관광객에겐 이곳이 이방의 땅임을 일깨워주는 이국적 풍물이다.
 
이집트(고고학)박물관: 카이로 나들이의 출발점은 신시가지에 있는 ‘타흐리르 광장’이다. 2011년 이집트 민주화 혁명의 시발점이기도 했던 이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상업지구가, 동쪽으로는 이슬람 문화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크루즈 레스토랑이 정박해 있는 나일강변에 이른다. 타흐리르 광장에는 스핑크스·피라미드에 버금가는 ‘이집트박물관’이 있다. 전 세계에 이집트붐을 불러일으킨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와 황금관을 비롯, 카프레왕·멘카우레왕·람세스왕의 조상은 물론 서기, 귀족, 일하는 노예의 조상, 묘실 부장품 등 12만점이 넘는 유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카이로 외곽 기자에 개관할 예정인 이집트 대박물관으로 유물 이관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집트박물관은 이집트 고(古)미술품의 해외 반출을 우려한 프랑스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1821∼1881)가 1858년 카이로 교외에 세웠다. 그래서인지 안내문이 프랑스어·영어·아랍어로 되어 있고 내부 구조가 오르세 미술관을 닮았다. 1, 2층으로 나뉜 전시장에는 이집트가 통일 왕조를 이룩한 기원전 3100년 고왕국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시대별로 각종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역대 11명의 파라오와 왕비의 미라를 직접 볼 수 있는 미라 전시실은 추가 요금을 내야 입장이 가능하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32년 아홉 살에 18왕조의 12대 왕이 되어 9년 만인 18살에 사망했다. 피라미드나 파라오의 무덤이 대부분 도굴당한 것과는 달리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3200년 만에 투탕카멘의 묘실을 발굴했을 때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부장품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파라오의 평안을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관 위 석판 글귀처럼 발굴에 참가한 사람 중 13명이 1년 내에 사망해 한동안 소년왕의 저주가 실현됐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정작 발굴책임자인 카터는 66세에 자연사해 소문을 잠재웠다.
 
피라미드: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기자(Giza) 평원의 피라미드를 보러 갔다. 쿠푸·카프라·멘카우라. 사진을 통해 수없이 보았던 풍경이지만 광활한 사막 가운데 우뚝 솟은 세 개의 피라미드는 장관을 넘어 비현실적이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 서니 나라는 존재가 하염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고대 이집트인은 인간의 삶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초월적이며 영원한 법칙, 대자연의 섭리를 피라미드에 구현하고자 했다. 나침반이나 컴파스 같은 간단한 측량도구도 없던 4500년 전, 그레이엄 행콕이 [신의 지문]에서 말했던 대로 오리온 별자리의 삼태성처럼 나란히 배치했으며 피라미드의 네 방향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정면으로 북극성 방향을 향하도록 설계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3대에 걸친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처럼 무모한 건축을 시도한 까닭은 죽음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영생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낸 것으로도 유명한 스핑크스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목적이나 역할이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자체가 아닐까 싶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낸 것으로도 유명한 스핑크스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목적이나 역할이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자체가 아닐까 싶다.

서기 820년 아랍의 왕 마문이 만들었다는 입구를 통해 기원전 2560년에 건축된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에 들어가 보았다. 높이 약 147m, 밑변 길이 230m의 거대한 구조물을 평균 무게 2.5t의 석회암 230만개를 쌓아올려 만들었다고 하니 선뜻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매우 비좁고 경사가 심한 통로가 나타났다. 잔뜩 몸을 낮춘 채 오르고 내려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끝에 피라미드 가운데 있는 파라오의 현실에 이르를 수 있었다. 텅빈 왕의 방에는 왕의 시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파라오의 부활과 영생을 위해 사각뿔의 꼭지점으로 모아진 우주 에너지가 파라오의 시신 위로 집중되도록 피라미드를 설계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석관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잠시 명상에 들었다. 4500년 시간을 거슬러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건축했던 이집트의 엔지니어들과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스핑크스: “아침에는 네 발, 점심 때는 두 발,저녁 때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지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는 틀린 답을 말하면 잡아먹어 테베시민을 공포에 떨게했던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나타나 ‘사람’이라고 정답을 말하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이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통에 날개가 사람의 얼굴을 한 상상의 동물이다. 거대한 돌을 쌓아만든 피라미드와 달리, 기자의 스핑크스는 상체와 머리는 석회암 언덕을 깎아서 만들고 몸통 일부와 발은 벽돌처럼 돌을 쌓아 만들었다. 전체 길이 73m, 높이는 22m로 피라미드보다 500년 앞선 기원전 3000년경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축조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로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 있는 투트모스 4세의 비문을 제시한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있다고 한다. 쿠푸왕보다 500년 앞서 이집트를 통치했던 투트모스는 왕자 시절, 근처를 지나다 잠이 들었는데 스핑크스가 꿈에 나타나 모래에 묻힌 몸을 밖으로 드러나게 해주면 파라오가 되게 해주겠다고 말해서 그의 말대로 사람들을 시켜 스핑크스의 몸통을 파냈더니 추후에 파라오가 되었더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그레이엄 행콕은 스핑크스 주변의 벽에 수많은 홈이 나있는데 이는 대홍수로 인한 풍화작용의 결과물이라면서 스핑크스가 5000년 전이 아니라 기자평원 일대가 숲이었던 9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편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목적이나 역할이 밝혀지지 않은 스핑크스야말로 수수께끼 자체가 아닌가 싶다.
 
이집트박물관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와 황금관을 비롯, 카프레왕·멘카우레왕·람세스왕의 조상 등 12만점이 넘는 유물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 사진:김세원 교수

이집트박물관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와 황금관을 비롯, 카프레왕·멘카우레왕·람세스왕의 조상 등 12만점이 넘는 유물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 사진:김세원 교수

메나하우스 호텔: 연합국이 2차 세계대전의 승기를 잡은 1943년 11월 미국과 영국, 중국 등 연합국의 3개국 실무 대표단들이 속속 이집트 기자의 메나(MENA)하우스 호텔에 들어섰다. 대일본 전쟁에서 연합국 간의 상호협력 문제와 전후(戰後) 일본의 영토 문제에 관한 기본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카이로 회담’은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 열렸다. 연합국 지도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이 11월 27일 조인하고 12월 1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한국에 관한 특별 조항을 삽입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천명했다. 이들은 일본 패전 처리에 대한 기본 방침을 정하면서 특별 조항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을 적절한 절차를 거쳐 자유 독립국가로 만든다고 명시했다. 이 호텔 뒤편의 정원에는 2015년 이집트 한국대사관과 이집트 한인회가 건립한 카이로 선언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3개국 정상의 서명이 이뤄진 325호실은 카이로 회담 기간 동안 처칠 총리가 묵었던 방이기도 하다. 70여년이 지난 현재 이 호텔은 325실에 ‘처칠 스위트(Churchill Suite)’라는 문패를 붙여놓고 하루 1500달러(170만원)의 숙박비를 받아왔는데 현재는 보수 공사중이다. 1886년 개관한 메나하우스는 ‘카이로 선언’의 서명 장소일 뿐 아니라 영국의 조지 5세와 메리 여왕, 추리 작가 아더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 등 유명인이 머물렀던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 왕국을 창건한 파라오 메네스의 이름을 딴 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바라보면 대피라미드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카이로=김세원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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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