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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12> 다로보예: 아, 불쌍한 아버지!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다로보예 모노가로보 성당 묘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아버지의 무덤

다로보예 모노가로보 성당 묘지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아버지의 무덤

1839년 6월 6일,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작은 마을 다로보예와 인근 체레모슈냐 마을 사이의 숲길에서 중년 남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남자는 마을 지주이자 전 모스크바 빈민병원 의사인 미하일 도스토옙스키임이 밝혀졌다. 지역 의사와 경찰이 시신을 면밀히 조사했으나 타살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나 흔적은 없었다. 의사는 뇌졸중으로 인한 사망으로 결론을 내렸다. 고인은 평소에 과음을 일삼았던 터라 뇌졸중은 자연스러운 사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닥터가 농노들한테 피살당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다로보예는 중부 내륙의 요새 도시 자라이스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1831년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가 무섭게 그동안 모은 돈에 빚을 더해 이 마을을 구입했다. 척박한 대지에 20여 농가가 전부인 초라한 영지였지만, 아버지에게 그것은 신분상승의 물적 증거였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해마다 여름을 이곳의 통나무집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아버지는 무리를 해서 인접한 체레모슈냐 마을까지 구입했다.  
 
가족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되던 통나무집은 현재 자라이스크 시 역사박물관 산하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으로 보존돼 있다. 기념관 방문 절차는 매우 복잡하다. 방문을 원하는 사람은 일단 전화로 역사박물관 직원과 약속을 잡은 뒤 약속 시간에 맞춰 ‘자기 차’를 가지고 간다. 박물관 도착 후 1500루블을 내고 입장권을 사면 배정된 가이드가 현관에 나타난다. 방문객은 가이드를 차에 태우고 함께 다로보예 마을로 간다. 가이드가 통나무집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 내부를 보여주며 두어 시간 설명해 준다. 설명이 끝나면 방문객은 다시 가이드를 차에 태워 자라이스크 박물관까지 데려다 준다….  
 
이렇게 초현실적인(!) 절차는 생전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러시아 생활에 익숙해져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홍지인 박사도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LG전자의 심재우 부장이 흔쾌히 차편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다로보예 방문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자라이스크 박물관에 도착해 필요한 절차를 밟자 어디선가 안드레이란 이름의 중후한 가이드가 백발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우리는 20분 정도 함께 쏟아지는 비를 가르며 차로 달렸다. 포장 안 된 진흙탕 길을 꼬불꼬불 지나 영지에 도착했다. 인적이 끊긴 황량한 대지 위에 초록색 통나무 집 한 채가 덩그마니 서 있었다. 들어가 보니 구석에 낡은 피아노 한 대가 있을 뿐 내부는 텅 비어 있고 벽에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설명문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부인이 죽고 아이들도 떠나자 아버지는  
이 한적한 마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는 엄격하고 가부장적이었지만 상냥하고 독실한 어머니 덕분에 가정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1837년 어머니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두 아들마저 멀리 수도로 떠나고 나자 닥터는 공허감을 달랠 길이 없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절제와 규율을 중시했던 그는 의심 많고 표독스러운 폭군으로 변해갔다. 결국 병원에서 은퇴해 영지에 칩거했다. 그의 눈에 비친 농노들은 게으르고 어리석고 반항적이었다. 그는 더욱 술에 의존했고 더욱더 가혹하게 농노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돈이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그는 자식들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싸게 구입한 영지의 지질은 형편없었고 쥐꼬리만한 수익은 대부분이 이자로 나갔다. 닥터의 고독과 공허와 극심한 불안은 농노들에 대한 잔혹 행위로 이어졌다.  
 
살해설은 여기서 나온다. 농노들은 지주의 폭행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한패가 되어 “짐승 같은 나리”를 숲으로 유인해 “영원히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 제압한 뒤 입에 재갈을 물려 질식사시켰다. 어찌나 교묘하게 죽였는지 살인의 흔적은 전혀 없었고 농노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상당한 액수의 돈을 갹출해 의사 두 명과 경찰을 매수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외할머니는 소문을 듣고서도 사건을 덮어두기로 작정했다. 혹시라도 진실이 밝혀져 농노들이 모두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질 경우 손주들에게 돌아갈 유산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와 송금  
이게 교과서 버전인데 여기에는 허점이 많다. 일단, 이게 무슨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도 아니고 한 마을 주민 전체가 대동단결해 악당 한 사람을 살해한다는 시나리오 자체가 황당하게 들린다. 게다가 러시아 제국에서 지주 살해라는 중범죄가 철저한 조사 없이 흐지부지 넘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뇌물 얘기도 신빙성이 없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노들이 오랜 가뭄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판에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긁어모아 뇌물을 먹인단 말인가.  
 
다로보예 가는 길

다로보예 가는 길

살해설이 거짓이라는 정황도 나중에 드러났다. 당시 닥터는 인근 마을의 지주인 어느 소령과 토지 경계선 문제로 소송 중에 있었다. 닥터가 사망하자 소령은 지인을 시켜 살해설을 유포시켰다. 농노들이 전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조사 및 처벌을 받도록 하고 그 틈에 닥터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인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소령의 지인이 실토한 사실이다. 한 마디로 아버지의 죽음은 아직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는 얘기다.  
 
많은 연구자가 이 비극적인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프로이트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간 무의식으로 연결시켜 바라보았다. 모든 아들의 내면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게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속에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가 죽자 그는 커다란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친부 살해 모티프가 등장하게 된다, 대략 이런 식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주장은 오늘날 ‘한물 간’ 연구로 여기 동조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자라이스크시에 있던 통나무집은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이 됐다.

자라이스크시에 있던 통나무집은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이 됐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이 사건은 무슨 콤플렉스로 환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죄책감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멀리 무의식으로 갈 것까지 없이 지극히 현실적인 의식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죽음이 상당 정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도 하다. 아버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아들들에게 시골 사정이 얼마나 나쁜지 편지로 알려주었다. 실제로 다로보예 지역의 작황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철딱서니 없는 이 둘째 아들은 수시로 아버지에게 돈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것도 필수품 구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잣집 아들처럼 보이고 싶은 허영심에서 그랬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구시렁거리면서도 늘 돈을 부쳐주었다. “봄부터 지금까지 비라고는 한 방울도 안 내렸단다. 이슬 한 방울 본 적이 없어. 강풍과 땡볕이 모든 걸 다 망쳤다…그냥 농사를 망친 정도가 아니란다. 대기근이 몰려오는 것 같구나.” 돈을 보내달라는 아들의 편지에 그는 이렇게 답장을 써서 돈과 함께 부쳤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이 편지를 쓰고 2주 뒤 그는 죽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편지를 받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자신의 헤픈 씀씀이가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자책감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폭력의 해결책을 찾아 나서다
죄의식은 폭력에 대한 깊은 우려로 이어졌다. 농노제는 제국 러시아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였다. 농노란 ‘노예 같은 농부’를 의미하는 단어로 지주는 마음 내키는 대로 농노를 때리거나 학대하거나 가축처럼 내다 팔거나 노름판의 판돈으로 계산할 수 있었다. 농노는 부동산과 똑같이 과세대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농노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훨씬 복잡해졌다.  
 
당대 지식인들이 순수한 박애주의 차원에서 농노제 철폐를 주장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거기서 인간의 본성을, 내면에 깊이 새겨진 폭력과 그것의 악순환을 읽었다. 다른 지식인이 지주와 농노의 관계를 가해자-피해자, 갑-을 관계로 보았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양자를 폭력의 순환 고리 속에서 바라보았다. 지주건 농노건 폭력의 수레바퀴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공멸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가게 된다. 너무 세게 누르면 터지고 너무 세게 치면 더 세게 되받아치는 게 인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린 시절 다로보예 마을에서 소름끼치는 폭력의 현장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농부들의 삶은 순박하고 목가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주한테 매질 당한 농부는 집에 돌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구타했다. 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아이들은 말 못하는 동물들을 학대했다. 어떤 아이들은 닭을 잡아 죽였고 또 어떤 아이들은 나무 둥지에서 새끼 새를 꺼내다 모가지를 비틀었다.  
 
폭력의 순환 고리 속에서는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극도의 불안 속에서, 존재감이 박살나는 상황에서, 생사의 벼랑 끝에서 인간은 폭력의 주체가 되어 폭력으로 저항한다. 그에게 농노제도는 제도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 본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법적인 농노 해방을 넘어 러시아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잠재된 폭력의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결국 그는 다시 다로보예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 얘기는 다음 호에서 하기로 하자.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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