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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없는 ‘분배 잔치’ 후유증, 베네수엘라 민생 파탄

[빠른 삶, 느린 생각] 새로운 세계 질서, 그리고 한반도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1992년에 출간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은 출간되고서 곧 인구에 회자되는 책이 되었다. 두 개의 진영, 즉 미국과 소련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체제 가운데 공산주의가 무너짐으로써, 전혀 달라지게 된 세계사의 방향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일정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생각은 헤겔에서 나온 것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하여 현실 역사의 힘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쿠야마가 이제 역사가 끝났다고 할 때, 그러한 생각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러한 진보의 이념을 좌우 어느 쪽에나 적용하여 말한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을 비롯하여 각종의 전체주의를 뒷받침하는 것도 역사가 진보한다는 이념이다. 전체주의적인 권력 체제를 정당화한다고 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도 예나 지금이나 일종의 진보론이 들어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우의 저서 『경제발전의 단계들: 비공산주의 선언』(1960)은 제목에서부터 자본주의에도 들어있는 역사 발전론 또는 진보론을 보여준다. 역사가 발전한다는 생각은 좌우에 두루 들어있는 것인데, 후쿠야마의 생각으로는 좌우가 냉전으로 또는 열전(熱戰)으로 맞서있을 때, 발전의 이념은 경쟁적으로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진영의 붕괴와 더불어 경쟁하는 발전론은 사라졌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과열 상태인 진보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냉전이 끝나면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 그리고 그러한 역사관이 끝나고, 역사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손 안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역사의 사건들이 끝난 것도 아니고, 그것들이 하나의 큰 발전으로 통합되는 일도 끝난 것이 아니다.
 
 
평등이 긴급한 정치적 과제로 떠올라
 
발전이 승리자가 된 자유민주주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발전은 두 가지 이상에 관계하여 이야기될 수 있다. 자유의 신장은, 말할 것도 없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요청이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논하는 바로는 더 중요한 발전의 목표가 되는 것은 평등이다. 그의 저서의 제목에 들어 있는 ‘마지막 인간’은 평등에 대한 요구가 극단적인 것이 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인간성의 변화, 열악(劣惡)한 변화를 말한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마지막 인간’이 상징하는 극단적인 평등화에 이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마지막 인간’이란 말의 출처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에게 이상적 인간은, 흔히 초인(超人)이라고 번역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다. 그는 모든 뛰어난 것을 추구한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힘도 추구의 대상이 된다. 물론 다른 이상도 있다. ‘별을 낳는다’는 말이 그것을 요약하여 표현한다. 이에 대하여 ‘최후의 인간’은 일상의 행복에 안주하며, 스스로를 넘어 수월(秀越)한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평등화는 범용(凡庸)한 인간의 원형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후쿠아마의 생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종착점이 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수월성(秀越性) 추구의 동기는, 후쿠야마의 생각으로는, 사회적 인정을 받고자하는 욕망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불평등을 조건으로 한다. 물론 니체가 초월적 이상의 추구를 반드시 그러한 사회적 인정의 경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그러한 수월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에 못지않게 평등이 긴급한 정치적 과제가 된다는 점이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마지막 인간’은 끝까지 간 평등화의 소산이다.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 또 자본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것이 고용과 사회 복지의 문제라는 사실에서도 민주주의 내에서의 평등화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페미니즘, 인종차별 폐지, 장애자 우대, 문화 다원주의 등도 평등의 보편화에서 나오는 과제들이다.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실험 세계 최대 실패
 
이런 일들에서 중심적 가치가 행복이다. 그리고 일상적 수준에서의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경제다.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고 그것의 구조화를 특히 역설한 것이 마르크스주의다. 그런데 경제적 생산성에 있어서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공산주의 체제다. 그 붕괴의 근본 원인도 경제적 후진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 사회주의 실험에 있어서 가장 크게 실패한 나라의 하나가 베네수엘라다. 그 나라에서 일상적 삶의 어려움은 요즘의 뉴스 보도에서 되풀이 되는 가십감이다. 식료 가게의 선반이 텅 비어 있고, 장 보러 간 주부들이 버터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하고, 굶주린 아이들이 음식을 찾아서 쓰레기를 뒤지고, 병이 들어도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약을 구할 수도 없다는 비참한 이야기들이 자주 전해진다.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지만, 베네수엘라의 그러한 난경(難境)은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에서 유래한다고 평가된다. 1999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많은 기업을 국유화하고, 국가 수입을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였다. 초기에 거둔 성공은 석유 자원에서 들어 오는 수입으로 뒷받침되었었는데, 석유 수입의 급격한 감소는 그러한 성공을 불가능한 것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유화한 기업들의 비능률과 부패를 통제하는데에도 실패하였다. 사회주의 정책의 ‘잔치’가 끝나게 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은 여러  가지 정책에 있어서의 그의 독단적 결정, 길고 넓은 관련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는 결정들이었다고 말하여진다.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것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다. 국민의 저항이 커짐에 따라 그는 이제 정치를 독단에서 독재로 옮겨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배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든, 그 실패도 후쿠야마가 생각하는 바 역사 진보의 종언의 일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자유민주주의는 역사를 담당하는 체제가 되고, 평범한 행복을 제조하는 기본 기구가 된다. 유엔의 지원 아래 발표되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은 대체로 민주주의 체제에 기초하는 나라들이다. 금년의 보고서에서도 조사 대상이 되었던 156개 국가 중  상위권에 들어 가는 나라들은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그러면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가장 앞서 있는 것이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라는 사실이다. 베네수엘라는 이 순위 표에서 102위에 분류된다. (2013년에는 20위였다.) 미국은 18위고, 영국은 19위다. 한국은 57위다.
 
여기에 대하여 최상위권에 드는 나라들은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대체로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이다. 이것은 이들 나라가 튼튼한 사회복지 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관계된다. 어떤 평가에서는 핀란드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도 그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좋은 사우나 그리고 울창한 숲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들 북구의 나라들이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정신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평창 만남 같은 민족적 하나됨 지속됐으면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바야흐로 진행되려는 우리의 남북 간 교섭에 이러한 세계적 현실이 배경이 된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경제발전과 그 혜택의 평등한 분배, 그리고 자유의 확보, 또 인간적 사회의 실현이 어떤 특정한 이념과 체제의 전유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지도자의 의지에 작용하는 것이 이러한 현실의 힘이다. 지도자의 개인적인 결정의 배후에 있는 것도 알게 모르게 이러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의식이다.
 
이렇게 볼 때, 남북이 회동을 함에 있어서도 이데올로기나 체제적 차이는 본질적 차이이기를 그쳤다. 더 중요한 것은 공유하는 인간 가치다. 그 가치는 깊은 차원에서 또 간단한 만남에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의 정치적 확인은 복잡한 경위를 통하여 가능하게 될 것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에서의 남북의 만남은 인간적 만남이었고, 민족적 하나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희망해보는 것은 이러한 인간적 그리고 민족적 만남의 단순한 진실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실은, 우리의 전통적 사고의 용어를 빌려, 선만 있고 악이 없는 순선무악(純善無惡)의 상태로, 또 인간 본성의 선한 상태, 즉 성지본선(性之本善)의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 가까이 가고, 또 그것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대하여 한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경(持敬)의 자세라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일을 외경심을 가지고 대한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예를 들면, 땅을 밟아 감에 있어서 개미집 두덤(蟻封)까지도 밟지않고 돌아서 가는 것과 같은 데에서도 그러한 조심스러움이 작용한다. 여기의 표현들은 전통적인 수신론(修身論)에서 따온 것인데, 그것들이 시사하는 것은 오늘의 논의들에 차고 넘치는 전략과 술수의 사고에 대조된다. 남북 간에 오고 가는 것에는 위계(僞計)가 있고, 감추어진 위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민족으로서, 한결같이 본래의 선(善)을 지키면서 병법(兵法)의 전략들을 다시 선으로 전환하는 것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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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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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