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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는 자기 고통을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된 소녀들"

아주 이상한 ‘백조의 호수’가 온다. 차이콥스키의 웅장한 음악은 흔적도 없고, 보호본능 자극하는 스무 살 왕자도 없다. 대신 조촐한 라이브 악단이 연주하는 민요풍 음악에 허름한 운동복을 걸친 중년 남자 지미가 있다. 화려한 궁전을 대신하는 건 콘크리트 벽돌 2개. 나레이터는 “내가 집이라고 하면 집”이라면서 지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용극답지 않게 말이 정말 많다. 하지만 보다보면 ‘백조의 호수’가 맞다.  
 
‘백조의 호수’(3월 29~31일 LG아트센터)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아일랜드 대표 안무가 마이클 키간-돌란의 작품이다. 2016년 더블린 연극 페스티벌과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 공연에서 극찬받았다. “거칠고 야생적이면서도 구원의 장엄함과 활력과 힘이 넘치는 작품”(The Irish Times)이라는 평 그대로, 고전 발레와 정반대에 위치한 ‘험블한’ 무대지만, 원조 못지않은 장엄미를 발산한다. 19세기 러시아에서 날아와 현대 아일랜드에 내려앉은 ‘백조’의 정체는 어떤 것일까. 마이클 키간-돌란에게 e메일로 물었다.  
 
지미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서른여섯 살의 우울한 실업자다. 정부의 주택 공영화 정책으로 아버지의 추억이 깃든 집을 잃게 된 그에게 네 마리 백조가 나타난다. 마을의 성직자에게 성추행당한 뒤 저주받아 백조가 된 소녀 피놀라와 동생들이다. 지미는 피놀라와의 사랑으로 구원을 꿈꾸지만, 현실엔 주택 문제로 지미를 압박하는 어머니와 정치인, 경찰이 있다.  
 
차이콥스키 발레를 파괴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고전발레 ‘백조’의 뼈대에 아일랜드의 전설 ‘리어의 아이들’과 2000년 정부의 주택 철거에 반발하다 사살당한 ‘존 카티 사건’을 엮었다. 세계적 고전에 아일랜드의 민족적 정서와 동시대 사회적 이슈까지 담아낸 것이다.  
 
“제가 스무 살 왕자보다 서른 여섯의 우울한 남자와 더 가깝잖아요. 스무 살이란 나이는 별로 재미없어요. 사물의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질 만큼 살아보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이 캐릭터에 제 모습을 투영했고, 저와 존 카티가 살던 곳의 사람들을 겹쳐 놓았습니다. 특히 제 마음속 캐릭터를 3D로 만들어낼 수 있는 무용수 알렉스 레온하츠버거 덕에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죠.”  
 
아름다운 동화 ‘백조’와 잔인한 실화인 존 카티 사건의 연결고리는 ‘우울증’이다. 평소 우울증에 관심 많은 그는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온 몸을 움직여 밖으로 배출시키고, 극장을 나설 때에는 모두 같은 고민거리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의 짐을 덜게 하는 데 춤의 의미를 부여한다. “발레 ‘백조’는 아름다운 동화로만 그려지지만 사실 어둡고 충격적인 비극입니다. 끔찍한 손실, 잔인함, 그리고 여성 혐오가 포함돼 있거든요. 튀튀와 토슈즈를 걷어내면 요즘 신문에서 보는 이야기와도 닮았어요. 지그프리드 왕자가 우울한 기분에 휩싸여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존 카티 역시 죽도록 우울증에 빠졌던 거죠.”  
 
이 무대에서 ‘백조’와 ‘왕자’보다 튀는 존재는 ‘로트바르트’다. 중년배우 마이클 머피가 팬티만 걸친 채 콘크리트 블록에 묶여 염소처럼 우는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대부분의 대사를 읊고 노래까지 부르며 극의 진행을 도맡는데, 소녀를 추행한 가톨릭 성직자에서 부패한 정치인, 폭력적인 경찰서장을 종횡무진 오가며 ‘악의 축’ 구실을 한다.  
 
“동화 속에서 로트바르트는 젊은 여성들을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게 만들어버렸죠. 그럼 왜 그가 이런 짓을 하는지 질문해야 해요. 악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발레 버전은 설명하지 않지만, 저는 종종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죠. 안타깝게도 권력자들의 힘이 자기 행동을 부패시킨 거에요. 아일랜드의 많은 성직자·정치인·경찰 등은 끔찍하게 부패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손실과 고통이 있었어요. 저는 죄와 벌에 대해 ‘뿌린 대로 거둔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쓰레기처럼 행동한다면, 결국 쓰레기가 될 거에요. 올라가는 것은 결국 내려오죠. 세상은 언제나 아름답고 세련된 방법으로 모든 것들을 균형잡으니까요.”
 
 
어둡지만 아름답고, 슬프지만 해학적인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대신하는 것은 무대 위의 3인조 현악 밴드 ‘슬로우 무빙 클라우드’다. 북유럽 민요풍의 음악과 비극적인 춤, 나레이터의 속사포 대사가 마구 섞이지만 희한하게 이질감이 없다. 무용과 연극, 음악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춤과 연기, 노래 사이에는 벽이 없어요. 인간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일 뿐이죠. 제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무엇과도 함께 일할 겁니다. 제가 무용을 좋아하는 이유는 진실된 몸짓이기 때문이에요. 아일랜드인들은 수백년 동안 언어·예술·정신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갈취당해 왔어요. 고문 당하고 참수 당하는 것을 피하려면 순식간에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어야 하기에,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데 천부적이죠. 그래서 우리는 스토리텔링과 연극의 달인이 됐어요.” 
 
그는 세계적인 고전에 아일랜드의 전설과 현대 사회 문제를 결합하는 자신의 스타일이 “신화를 현대인들에게 유용하게 살려내 그 내재된 힘을 제대로 전하려는 작업”이라고 했다. “모든 민속과 전설은 어딘가 하나의 기원이 있죠. 백조 전설은 발레보다 앞서 다양한 문화권에서 비슷하게 변주되어 왔는데, 아일랜드 신화에도 비슷한 전설들이 있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리어의 아이들’이에요. 아일랜드 토착 문화는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신화는 중요한 사회학적 기능이 있거든요. 잠재적 고통에 대한 노출을 줄이기 위해 조상들로부터 전해지는 중요한 지혜니까요. 디즈니 같은 엔터테인먼트 기업도 신화를 소재 삼지만 이런 데는 관심 없죠. 그들은 더 많은 티켓을 팔기 위해 신화나 전래 동화의 심오함을 덜어내고 표피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출 뿐이에요.”  
 
흥미로운 점은 부패와 폭력, 우울증으로 가득한 무대가 시종 유머를 추구하고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미의 죽음 뒤를 잇는 한바탕 축제는 삶의 고통을 털어내는 씻김굿 같다. 비극을 해학으로 초월하는 한국적 정서와도 통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권력을 비웃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을 거에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타인에게 가했던 잔인함의 결과를 모면할 것이라고 믿는 바보들을 크게 비웃어주자고, 그리고 다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라고.”  
 
작품은 고전발레의 정제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8명의 무용수는 아일랜드 민속춤과 현대무용을 오가며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호수에서 펼쳐지는 백조 4인무나 지미의 생일파티 포크댄스, 깃털을 흩날리는 마지막 춤판 등이 모두 인상적이지만 일관된 스타일은 아니다. 마이클은 “내게 주어진 경제적·문화적·심리적 에너지들이 충돌한 결과물이 바로 내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2000년에 샌도르 레메트라는 요가 선생님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었어요. 제가 만난 서양의 어떤 선생님도 이 세상이 춤이나 연극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거든요. 샌도르는 저에게 그걸 알려줬는데, 마치 평생 갇혀 지내던 감옥 문의 열쇠를 받은 것 같았어요. 춤을 추는 사람들은 몸이 어떤 형태를 만들 때, 내적인 원인이 밖으로 나오는 거란 걸 세심하게 의식해야 해요. 무의미한 몸짓만 만들다가는 결국 댓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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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