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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청소 하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다

봄은 뛰어난 협상가다. 창문으로 싱그러운 봄바람을 불어넣으며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어서 몸을 움직이라고 말한다. 청소를 위한 ‘햇볕정책’이다.  
그래서 봄날 아침에는 아내의 잔소리가 없어도 알아서 청소를 한다. 이불을 널고 카펫을 치우고 베개도 힘을 줘서 팡! 팡! 두드린다. 걸레질을 하고 칙칙해진 가구도 광택을 낸다.  
 
청소를 하다 조금 지루하다 싶을 때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을 틀어놓는다. 작곡가가 붙인 이름은 아니지만 탁월한 작명 센스다. 1악장의 봄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주선율, 손발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4/4박자, 반복적으로 주고받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아르페지오 음형. 봄날 대청소 음악으로 제격이다.  
 
볼프강 슈나이더한과 칼 제만이 연주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크로이처’. 1959년 도이치 그라모폰 녹음이다.

볼프강 슈나이더한과 칼 제만이 연주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크로이처’. 1959년 도이치 그라모폰 녹음이다.

이 곡은 명연주가 수두룩해서 어떤 연주를 골라도 봄을 집안에 들일 수 있다. 나는 오래된 연주들의 절제된 우아함을 좋아해서 1959년 녹음한 볼프강 슈나이더한과 칼 제만의 음반에 자주 손이 간다. 60년대 나온 음반이 90년대 LP 마감의 시기까지 나왔으니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다. CD시대에는 오히려 조금 귀해진 듯 했다.  
 
이 음반을 샀던 고등학교 시절 봄날을 기억한다. 라디오에서 이 곡을 처음 듣고는 “오! 역시 비틀즈에 버금가는 베토벤이군!”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체하며 록음악의 계보를 외우던 시절이었다. 연주자가 누군지는 알바가 아니었다. 곡 제목만 기억하고는 음반가게로 가서 “베토벤의 ‘봄’이라고 있나요?”라고 물었다. 주인은 몇 종의 음반을 보여주며 “어떤 거요?”라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그렇게 여러 종의 음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당시 클·알·못(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음반 위의 노란 마크는 본 적이 있었던지라 고민 없이 이 음반을 골랐다. 그리고 몇 번 듣고는 다시 록음악으로 청년의 혈기를 달랬다. 내가 산 음반의 연주자가 슈나이더한과 제만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나서다.  
 
볼프강 슈나이더한은 20세기 초 빈 필하모닉의 악장을 역임하다가 솔로로 전향한 바이올린 연주자다. 생김새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19세기 말 빈 스타일의 우아한 낭만성과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피아니스트 칼 제만은 독주자로서는 그다지 큰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강호고수가 난립하는 20세기 초반 피아니스트계에서 그의 수더분한 스타일은 상품성이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숨은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칼의 피아노는 곡의 구조를 명징하게 드러내면서 바이올린과 사려 깊은 대화를 이어간다.  
 
봄을 음악으로 그려 놓은 듯한 1악장에서 이들의 연주는 하늘거리는 실크 블라우스 같다. 느린 2악장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게 만든다. 반복되는 피아노 음형 위로 별빛이 흐르는 듯 아련한 슈나이더한의 바이올린이 슬며시 등장한다. 봄밤의 달콤한 향기가 난다. 짧은 3악장이 지나고 나면 같은 주제가 여러 번 반복되는 4악장 론도가 시작된다.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풀어 헤쳐지는 주선율이 봄 햇살을 세상에 풀어놓는 것 같다.  
 
멋진 두 신사들의 품격 있는 대화가 짧게 느껴진다면 또 다른 수록곡인 ‘크로이처 소나타’까지 들으면 더욱 좋다. ‘봄’과 함께 가장 유명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곡이니 말이다.  
 
봄맞이 청소를 하며 퇴계 이황과 어깨를 나란히 한 남명 조식의 ‘쇄소응대(灑掃應對)’를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야 말로 모든 공부의 시작이라고 했다. 물 뿌리고 비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하의 이치를 말하고 헛된 명성을 훔쳐서 세상을 속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운이 좋다면 마룻바닥을 닦다가 세상의 이치 하나쯤 얻을지도 모른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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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