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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 은은한 광채… 밥맛이 달라졌다

어머니는 장식장에 넣어둔 예쁜 그릇을 채 써보지도 못한 채 돌아가셨다. 집안에 큰 일이 생기거나 귀한 손님들에게 내려던 그릇들이다. 그 중엔 유기도 있었다. 금과 은을 섞어놓은 듯한 광채는 내가 봐도 멋졌다. 왜 이런 그릇들을 평소 쓰지 않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다가오리라던 집 안의 큰일은 어수선한 병원 영안실과 결혼식장에서 치뤘고, 귀한 손님들은 더더욱 아파트로 찾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용도 잃은 그릇들로 가득했다.  
 
난 어머니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로 했다. 좋고 예쁜 그릇은 우선 꺼내 쓴다. 산다는 것은 지금의 충만함으로 채워져야 후회가 없다. 다행히 마누라도 나와 생각이 같다. 마음에 드는 생활용품을 사기 위해 눈에 띄는 가게를 찾는 일은 우리 부부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한옥이 남아있는 서촌의 골목을 거니는 일은 재미있다. 유기그릇 ‘놋이(NOSHI)’를 만난 곳도 여기다. 한 눈에 들어오는 독특한 디자인은 전통을 고수하는 천편일률의 유기와 달랐다. 기억 속의 놋그릇은 거무튀튀한 반점과 녹청을 뒤집어 쓴 주발과 수저뿐이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유기 장인들을 몇 명 안다. 모두 기자 시절의 인연이다. 그들이 만든 물건들이 시대와 불화해서 쇠락의 과정을 거치는 모습도 지켜봤다. “옛 것은 좋은 것이여”로 정리되는 바탕의 정신만큼 지금의 생활을 수용하지 못해 생긴 일이다. 전통을 잇는 일은 낡고 불편한 것조차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뜻할까. 시대와 함께 숨 쉬지 못하는 과거의 아름다움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쓰는 이의 의문만큼 만드는 이의 고민도 만만치 않음을 이해한다. 고민의 결과는 대개 원형을 지켜가는 것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무형문화재가 만든 물건들은 실생활에 쓰여지는 상품이길 포기하고 예술의 길로 들어선 인상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헌정이랄까.  
 
또 다른 선택이 있다. 전통의 본질만이 중요하고 시대에 맞는 변신의 노력을 했던 이다. 필요의 장점만을 취하는 절충의 방안이다. 이 또한 쉽지 않다. 익숙한 전통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어정쩡한 결과로 비난받기 일쑤다. 서로 다른 요소의 결합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볼 기대가 번번이 실패했던 것을 안다. 이래저래 전통과 현실의 동거는 불편하고 조화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유기의 질감을 현대적 디자인으로 구현
‘놋이’의 그릇들은 달랐다. 유기의 질감과 색채, 무게감을 그대로 지녔는데 형태가 신선했다. 밥주발과 국그릇, 수저에 국한되지 않은 다채로운 용기의 파격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큼직한 원형 접시는 도톰한 두께만큼 움푹 패어진 굴곡의 깊이가 비례의 균형으로 아름다웠다. 고운 사포로 밀어낸 듯한 부드러운 결이 느껴지는 광택은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그릇의 형태와 질감이 어울려 풍기는 묵직한 느낌은 인스턴트 시대의 가벼움을 비웃는 듯 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유기라는 새로운 재료의 그릇이 등장한 느낌을 받았다.  
 
‘놋이’를 만드는 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맘에 드는 유기를 만든 이라면 기대 이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거창의 공장까지 찾아가는 수고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읍 외곽의 중소기업 공단에 자리 잡은 ‘놋이’는 생각보다 연원이 깊은 회사였다. 징을 만드는 무형문화재인 아버지의 유기 공장을 아들이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징은 사물놀이의 김덕수가 애호하며 국립국악원에 명기로 소장될 만큼 유명하다. 징과 유기는 재료가 같고 수법을 공유한다. 아들 이경동은 아버지의 정신과 유기의 전통 제법만을 이어받기로 했다.  
 
유기는 아는 대로 동과 주석의 합금이다. 유기는 청동기로 분류된다. 합금의 비율이 중요하다. 동의 함량이 높으면 굳어지고 주석의 함량을 높이면 연해진다. 유기는 동과 주석의 비율이 78:22다. 주석의 함량을 높인 다른 나라에서는 쓰지 않는 우리만의 고유한 비율이다. 재미있는 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기를 식기로 쓰는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다. 인도권 국가에서 많이 쓰는 동 그릇엔 주석이 들어가지 않는다. 유기의 합금비율이 결국 전통의 핵심이다. 경험으로 찾아낸 독특한 조성은 어디에도 없는 유기의 장점으로 바뀌었다.  
 
‘놋이’의 이경동은 유기의 특성을 떠올렸다. 합금의 효과는 항균효과로 이어진다. 유기만큼 안전한 식기가 없다는 확신을 더한 이유다. 유기는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주조, 눌러서 만드는 단조, 망치로 때려 만드는 방짜 등 수법이 여럿이다. 다양한 형태로 가공될 가능성이 의외로 많았다. 여러 실험을 거쳐 시대와 겉돌지 않는 생활유기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 유기란 밥그릇·국사발·제기·향로나 촛대 같은 불교용품으로 국한된 용도만 떠오른다. 요즘 우리의 식습관이 밥과 국만 떠먹던가. 샐러드는? 스파게티는? 무침과 찜 요리를 담을 때 쓰는 접시는? 달라진 입맛에 걸맞은 식기란 어떤 모습일까? 낡은 전통에 얽매여 바꾸지 못하는 유기의 고정된 디자인은 손대지 못하는 것일까? 세계 각국의 요리가 등장하는 우리 식탁의 변화를 그릇이 받아주지 못할 이유란 없다.  
 
징 만드는 무형문화재 아버지의 비법 고스란히  
‘놋이’는 이런 점에서 파격이다. 바로 지금 사랑받을 수 있는 유기가 우선이다. 전통방식의 유기가 지닌 기품과 격조를 매일 경험하게 하자는 생각은 멋졌다. 접시보다 육중하고 단단해 보이는, 굽 달린 유기의 존재감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놓인 음식과 어우러진 금속광채의 은은함은 먹는 일의 즐거움을 눈으로 먼저 전달한다. 그릇의 디자인이 바뀌었을 뿐인데 음식의 맛까지 달라진 듯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냉면을 유기에 담아 내주는 집이 서울에 몇 있다. 싸게 보이는 얇은 스테인리스 그릇과 비교해 보라. 손에 닿는 차가운 감촉과 무게의 듬직함이 느껴지는 유기 속에 담긴 냉면은 맛까지 좋다. 유기는 한 번 사면 평생 쓸 수 있는 그릇이다. 음식점 뿐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쓰임의 현장에서 아름다운 자태와 기품을 풍기는 멋진 그릇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그릇인 유기를 그동안 잊고 살았다.  
 
모든 물건의 품질은 좋은 재료에서 나온다. 좋은 유기 또한 쇳물의 순도와 함량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으로 출발한다. 방짜단조방식으로 만든 놋이의 그릇들은 수천 번의 망치질이 필요한 방짜 기법을 일부 기계화시켜 효율을 높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짜는 작은 그릇을 만들기 어려우며, 있다 하더라도 너무 비싸다. 장인의 혼이 담겼다는 방짜 그릇은 많은 사람이 돌려쓰는 수량을 대지 못한다. 아무나 쓰지 못하는, 박물관 소장품이 되기 쉽다는 말이다. 
 
놋이의 그릇은 방짜만을 고집해 다가설 수 없는 생활유기의 허상을 비틀었다. 이경동은 제 식탁 위에서 빛나는 전통이라야만 의미 있다고 믿는 이다. 
 
이래서 ‘놋이’의 그릇엔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습관적으로 새겨 넣던 과시의 표식이 없다. 새로운 유기엔 누구를 위한 그릇인가를 분명히 한 세련된 글씨체의 상표뿐이다. 전통을 내세우지도, 그렇다고 잊어버리지도 않은 유기의 아름다움은 눈 밝은 이들의 입을 통해 퍼졌다. 살아 숨쉬는 전통의 계승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 셈이다.  
 
결국은 생각이다. 본질을 건드리지 않은 디자인의 차별성으로 유기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었다. 누구라도 갖고 싶은 멋진 그릇이라면 성공한 것이다. ‘놋이’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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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